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20화 (12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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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건.'

구련장을 이끌던 중년 사내의 눈매가 가름해졌다.

운무 속, 사내의 시선 속에 들어온 건 어린아이 수준의 작은 체구.

원래 이 세계는 이질적인 게 보일수록 더욱 긴장되는 법이다.

중갑 병기와 총격, 풀려나 난리 치는 범죄자들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어린 녀석이 돌아다닌다니?

하지만 긴장도 잠시.

저벅.

"후우... 아는 얼굴을 보니 반갑군. 그래, 카티라고 했나?"

온전히 운무 속에서 드러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고서야 중년 사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카티라고 했던가?

어린아이의 외양을 지녔지만,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던, 생존자 쉘터의 한 주축을 맡고 있던 인물.

그 외양이 기괴하다든지, 아래층의 주요 인물 중 하나라든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년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가장 큰 이유.

상대가 벽도 못 넘은 수준의 무력을 지녔다는 것.

당연히 자신에게 위협이 될 리가 없다.

더 나아가 그게 자신이 아래 쉘터를 버리고 위층의 또 다른 군세 중 하나, <거두정>으로 갈아탈 결정을 한 가장 큰 이유.

"나름 쉘터의 주축이라고 열심히 일하는가 보오. 하지만 그 수준으론 힘들지 않겠는가?"

쿠쿠쿠쿵...

쿠쿵..

쿠아아아악!

와악! 이거 뭐야! 무슨 괴물이야!

쏴라! 쏴서 죽여!

콰아아아아앙!

자욱한 녹색의 운무 너머, 터져 나오는 포격 소리와 괴물들의 고성을 들으며 중년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또 다른 무언가들이 난입하며 한층 더 격전이 심해져 간다.

이곳은 괴물과 전쟁병기들이 격돌하는 세상.

이곳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더 나아가 단신으로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벽의 돌파이다.

지위, 보구, 명성, 세력.

심지어 무력조차 나약한 이의 명령은 제대로 듣지 않는다.

한데 벽도 못 넘은 자가 한 세력의 중요한 자리 하나를 맡고 있다?

이 세력이 애초에 글러 먹었다는 증거.

무능이 인맥을 뛰어넘은 조직엔 희망이 없다.

그리고 그런 중년 사내의 말에.

캬릉...

"그래. 네 말이 맞지. 나는 지금 자격이 없다."

"...?"

자신의 뒤쪽, 건방진 상대의 태도에 갸릉 소리를 내뱉으며 등장한 소녀 크란의 머리를 쓰다듬은 카티가 목을 우득 풀었다.

저 말이 맞다.

예전 도시, 아만테오에서 자신과 격돌한 청무의 무인이 자신을 무시했듯.

자신은 예전 <생존>을 위해 금지된 거래를 한 대가로 한계가 지어진 존재.

덕분에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괴력을 얻었지만... 이걸로 검기를 사용하는 이를 상대할 수 없음은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전, 자신은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에 있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지금 중년 사내를 상대할 건 자신이 아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중년 사내 때문이 아니었고.

"..."

중년 사내와 구련장들, 그들의 전신에 튄 제법 많은 혈흔을 본 카티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적들과 싸웠다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이서 튄 흔적들.

예전 자신이 하던 <일>이 일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저건 적이 아닌, 방심한 아군을 베어냈을 때의 흔적들이란 것을.

그런 카티의 상념에 쐐기를 박듯.

"... 미안하게 됐소. 굳이 불필요한 희생을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구련장, 그들 중 리더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죄책감이 없어져서 더 좋으니까."

"...?"

그런 카티의 말에 멈칫하던 중년 사내의 입꼬리가 어이없다는 듯 올라갔다.

마치 각오를 다졌다는 듯한 말투.

약한 주제에 무슨 저런 태도를 보인단 말인가?

"미안한데 이제 좀 비켜주지. 갈 길이 바빠서 말..."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쩌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

자리에서 사라지듯 없어졌다 나타난 소녀, 아니 숙녀의 손톱을 간신히 칼을 세워 막아 든 중년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검기 사용자인 자신의 눈에도 빨라 보이는 속도라고?

거기에 이 괴력, 이 강렬한 검기!

"끄으윽..."

"카티. 죽여?"

콰드드드득...

손톱으로 내리찍어 짓누르는 와중에도 여유롭게 뒤를 바라보며 묻는 크란의 태도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카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기 전부터 마음을 결정했고, 죄책감도 사라진 상황.

자신에게 걸린 저주, <구룡박>을 해제하기 위해 필요한 목숨은 아홉.

검기 사용자를 제외하고 필요한 건 여덟이니...

"딱 맞구나. 너희는 내가 상대해주마."

키이이잉...

그 급격한 상황 변화 속, 양손의 청홍투갑에 붉고 푸른빛을 빛내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카티의 말에 구련장들의 눈썹이 크게 꺾였다.

**

구체 안, 황무지.

콰아아아아아아앙!

"이... 이이이이... 멍청... 한! 내... 내가 필요없... 다고... 생각한 건가...! 우리... 는 협력해야 한다... 고 했건... 만!"

사방에서 달려드는 중갑 괴수병종들의 근접 공격에 미친 듯이 찢겨 나가는 사이보그 검사들과 기갑화 보병들을 보며, 말더듬이 사내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어리석어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군대를 손에 넣었다고 한들 확실히 아군이 되어줄 자신을 배신한단 말인가!

정황상 사내, 론이 자신을 공격할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이 갑작스런 공격은 론의 의지가 아니고서야 설명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병력은 궤멸 직전.

안 그래도 싸우느라 피해가 누적되었던 상황에 이루어진 중갑 병종들의 압도적인 습격은, 단번에 자신들의 병종들을 찢어발겼다.

하늘에 뜬 사옥 선도 괴성과 함께 괴수들의 등에서 쏘아진 등가시비늘에 관통당하고 있고, 이제는 자신의 앞까지 녀석들이 들이닥친 상황.

후우우웅...!

자신의 몸을 감싼 얇은 역장에 비해 지나치게 굵고 거대한 괴수의 앞발 발톱이 날아드는 걸 본 말더듬이 사내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쿠아아아악!

"...?"

온몸을 덮쳐와야 할 통증 대신, 귓가로 울려 퍼지는 커다란 고성과 격투음에 눈을 뜬 말더듬이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전방을 바라보았다.

눈앞으로 보이는 건 옥색의 비늘을 가진 커다란 뇌전의 늑대가 괴수 병종과 휘감겨 괴성을 내지르고 치고받으며 땅을 나뒹굴고 있는 광경.

그렇게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의 앞으로.

터덕.

"어때? 살려주니까 반갑지?"

"날... 날... 왜... 살... 살려주지?"

그 말에 사내의 앞으로 내려앉은 강태석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보기를 줄까? 일 번, 네가 갑자기 너무 사랑스럽게 보여서. 이 번, 내가 갑자기 박애주의자가 되어서. 삼 번, 네가 아직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 삼... 삼 번?"

"정답."

그 말과 동시에.

퍼어어억!

"커헉..."

"좀 자라."

단번에 흐트러진 역장을 꿰뚫고 상대의 배를 후려쳐 기절시킨 강태석이 뒤쪽의 시카른을 향해 말더듬이 사내를 훅 내던졌다.

"잘 챙겨줘."

"나보고 챙기라고?"

"나 대신 저 안으로 들어가 주면 더 좋고."

쿠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아아악!

강태석이 가리킨, 그야말로 끝도 없이 소환되며 기갑 괴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도시를 바라본 시카른이 사내를 들춰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냐 아냐. 내가 또 인명구조는 전문이지."

목숨이 열두 개라도 저런 곳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다.

기세 좋게 밀어닥친 엑소 슈트들도 차례대로 황무지 쪽, 구체로 쭉쭉 밀려나고 있었으니까.

사실 저 안으로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뛰어들겠다는 녀석이 미치광이로 보일 지경.

'아니지. 그러니 다들 녀석을 따르는 건가.'

터어어어엉!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번에 황무지를 가로질러 뛰어가기 시작한 카트란의 등을 지켜보던 시카른이 이내 숨을 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

별거 안 바라고 살아 남아있으라고만 했는데, 그것조차 쉬운 상황은 아니다.

끊임없이 생겨나 황무지를 밀어붙인 괴물 녀석들은 이제는 구체 근처까지 버글거리며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저 난전 속에 목숨 건지는 것만 해도 쉬워 보이지 않는 상황.

꾸득.

어깨에 기절한 사내를 들쳐 멘 시카른이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며 개판이 되어가는 구체 근처를 바라보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 ????? 저건 또 뭐야."

구체를 튀어나와 단번에 사방을 휩쓸기 시작하는 두 남녀, 한 소년과 숙녀의 등장에 시카른이 눈을 꿈뻑였다.

**

도시, 지하.

쿠쿠쿠쿠쿠쿵...

쿠쿵....

"뭐야. 대체 왜 이래.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수정을 중심으로 광대하게 주욱 뻗어 나간 보랏빛 영역으로 모든 시야과 감각이 흘러들어온다.

이를 통해 온 사방을 마치 자신의 손아귀처럼 살피던 사내, 론이 허공에 뜬 채 당황하며 소리쳤다.

바깥의 군대, 구체안의 생존자, 황무지를 딛고 선 사람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소환된 병종들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었다.

앞은 그렇다 치고, 아직은 쓸만하다 여겨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말더듬이 사내의 병력들도!

심지어 거기까지면 말도 안 한다.

콰득...

콰드드드득...

지하 공동에 속속히 드러난 병종들이 이제는 론의 말조차도 숫제 무시하며 바닥에 널브러진 제물들을 속속들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이제까지 떠먹여 주는 신세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접 퍼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런 병종들의 모습에 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버렸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허공에 뜬 자신의 몸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지경.

"윽... 끄윽... 왜... 왜 안 움직여..."

자신을 갑옷처럼 든든하게 지켜주던 보랏빛 기운은 어느새 속박이자 사슬이 되어 허공에 자신의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그 모든 현상에 론의 표정이 굳다 못해 일그러지기 시작하던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터어어어어엉!

지하 공동 벽면에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자욱한 먼지구름을 뚫고 누군가가 그 속에서 걸어 나왔다.

**

콰직!

콰지지지직!

쿠아아아아앙!

<아오 진짜! 말 좀 들어라!>

간신히 제압한 거대 기갑 병종 하나를 뜯어먹기 바쁜 포식 장갑의 흉부 장갑부 주둥이를 턱으로 쿡쿡 내리찍던 군파츠가 지친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절레절레 저었다.

녀석 덕분에 잘 싸워서 달려들던 놈 하나 쳐 죽인 건 좋은데 뭐 그리 배고팠는지 하나 죽이자마자 달려들어 뜯어먹기 바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다른 녀석들 또한 <식사>에 바빠 보인다는 것 정도?

콰드드득...

<후우. 내가 여기 찾아 놓은 거 알지? 그나저나 저놈들 왜 그러는 거야?>

배가 좀 찼는지 그제서야 손을 떼는 포식 장갑 덕에 바로 선 군파츠가 옆, 먼지를 뚫고 도달한 카트란을 향해 물었다.

상식적으로 방금 도착한 이 녀석이 알 리 없지만, 또 왠지 알고 있었을 것 같았기에.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입만 있던 놈이 이제 손도 생겼으니 더 이상 거칠 게 없지."

군파츠의 옆에 서서 지하 동공의 모든 상황을 살핀 강태석이 작게 대답했다.

이제까지 수정은 저기 허공에 뜬 녀석이 떠먹여 주는 제물만 먹었어야 했을 것이다.

본디 이차원 너머의 경계에 있는 존재는 현세에 간섭하기 힘들기에.

하지만 직접 자신의 군세를 <계약>에 의해 차원 너머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제는 굳이 제물을 조공 받지 않아도 자신의 병종들이 집어삼키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 제물이 된다.

거기에 그 제물을 또다시 활용할 수 있으니 이제 저 너머 존재의 입장에서는 족쇄가 풀려 광활한 자유를 얻은 셈.

<제기랄. 그러면 저놈들이 계속해서 소환된다고?>

콰드드득...

콰득...

끊임없이 소환되는 녀석들을 보며 군파츠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군대가 소환되어 사람을 삼키고.

그렇게 삼킨 사람이 제물이 되어 또다시 군대가 소환되고.

이를 무한히 반복한다면 그야말로 온 생명이 사라질 때까지 저 바퀴 같은 놈들이 세상을 휩쓸 터.

그런 군파츠의 말에.

"아니. 차라리 저놈들이 계속 소환되면 양반이지."

<양반? 양반은 또 뭐야.>

순간.

쿠르르르르릉.

말을 나누던 둘의 눈앞, 지하 공동의 한가운데 뜬 보랏빛 수정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진동을 토해냈다.

**

차원 너머 존재들의 모든 소망.

<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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