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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구...!
누워 내달려오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은빛 빌딩.
서있어야 할 것이 누운 채, 그것도 땅 위를 붕떠서 달려오니 이상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와중에 천천히 주변을 두르고 있던 광학 위장막이 풀리고 그 실체가 드러나자 어색함이 사라졌다.
쿠르르릉...!
키이이잉...
은빛 유리창 같던 외관이 사라지고 안으로 드러난 건 직육면체 형태의 커다랗고 검은 금속상자.
한눈에 보아도 단단해 보이는 외벽의 질감.
그 외벽으로 줄기줄기 그려진 회로들과 정체불명의 돌기들.
사옥선.
혹은 아벨 이동 지부.
연구, 판매, 보관, 채굴, 거래, 운송.
아벨이 기업이던 시절부터 이익을 내고 신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과정들을 담당한 핵심모듈.
어찌 보면 저게 왜 생뚱맞게 5층 심부, 그것도 한층 더 깊숙한 이곳 이 공간에 있나 의아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앞뒤의 사정과 예전 경험, 그리고 자신을 습격해왔던 병종들을 종합해 고려해본 강태석은 금방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여기서 생체실험 연구라도 했나 본데."
강태석이 1km에 달하는 황무지를 순식간에 주파하며 다가오는 거대한 금속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인체의 비밀에 대한 해부.
이는 온 인류의 숙원.
병기화, 신약개발, 신체 강화, 불로불사.
무엇이 되었건 개발에 성공하기만 하면 이는 막대한 돈이 된다.
다만 그 근본이 되는 인체실험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게 이 모든 것의 최대 문제.
모르모트처럼 정도 이상의 실험들을 행할 수 없고 필요한 만큼의 실험체들을 마음껏 확보할 수도 없다.
연방이 겉으로 인권을 표방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고.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그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다.
곧 죽어도 모를, 인권 따윈 무시당한 범죄자들이 이곳에만 해도 수십만 수백만.
아벨은 자신들의 새로운 상품개발을 위한 실험체를 무제한에 가깝게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행정부는 냉동시켰다고 해도 계속해서 지출될, 짜증 나는 범죄자 놈들의 보관비용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어서 좋고.
거기다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게 이슈화되어도 아벨이 바퀴벌레처럼 숨어들었다 하며 떠넘기고 모르쇠 하면 그만이니 일석이조.
애초에 기업, 아벨이라는 놈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에 들어가 연구를 진행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 말이다.
잠시 후.
쿠르르르릉...
강태석이 코앞 100m까지 들이닥쳐 허공에 부웅 조용히 멈춰 선 금속의 상자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볼 땐 도시의 건물들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빌딩 사이즈다 보니 가까이서 본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그런 구조물이 상공 200m 위에 붕 떠있었으니 더욱 그랬고.
하늘에 뜬 금속상자의 그림자가 강태석이 선 대지를 온통 가려버릴 지경.
크르르릉...
"가만있어."
확 넓어진 그림자를 통해 외부의 변화를 느꼈는지 발 밑 이 공간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영뇌수를 진정시킨 강태석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맞서 싸워줄 이유는 없지만 그랬다가는 저 놈들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문제.
저 정도 규모의 사옥선이 드랍쉽처럼 병력을 태우고 구체 밖으로 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그게 더 짜증 난다.
보아하니 녀석들도 여기서 어느 정도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서로의 니즈가 맞으니 한판 붙어보는 게 윈윈.
치직...
치지지직...
강태석이 왼손에 번개를 스파크처럼 끌어올려 타탁타탁 튀기며 커다란 금속상자를 조용히 바라보던 그때.
키이이잉...
금속상자의 하부, 네모난 금속판이 쩌억 열리며 마치 UFO의 탑승부처럼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
도시, 오른쪽.
쿠구궁...
쿠구구궁!
"와 저 계집애. 조용해 보이더니 장난 아니네 성깔."
조용히 도시 안쪽으로 자신들 섹터원들을 데리고 숨어들던 군파츠가 도시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소음에 혀를 내둘렀다.
임무가 임무니 시끄럽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만, 아니 오히려 좋지만 얌전해 보이길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웬걸.
그야말로 도시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굉음을 만들어내며 도시 한켠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범주를 진즉 벗어났으니 저게 본디 성격이라는 의미.
"니들 조심해라. 괜히 만만해 보인다고 찍접대다가 처맞지 말고."
"..."
군파츠의 말에 뒤따르던 무장병들이 슬쩍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기 사용자란 것들이 얼마나 살벌한지는 이미 카트란과 아린등을 통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얌전하건 아니건 미쳤다고 그런 것들에게 찍접댄단 말인가.
그러지 말라고 휙 내저은 손에도 스치면 어디 한 군데가 박살 나거나 날아갈 텐데.
거기에 자신들은 여자라고 절대 만만히 보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그 좋은 예시가 그들 눈앞에 있으니.
키이잉...
철컥.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포식 장갑의 바이저를 다시 얼굴에 쓴 군파츠가 가라앉은 눈으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아니타가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적막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도시.
하지만 군파츠는 아니타와 다르게 조금 다른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가슴 전면부, 포식 장갑의 주둥이가 크릉거리며 어딘가를 향해 울부짖는 걸 내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
크르릉...
<이놈 아까부터 왜 이래.>
아무리 군파츠라고 해도 껄끄러운 건 있는 법.
아까 전 기갑화보병을 게걸스럽게 해체해 뜯어먹던 광경이 아직도 선명했기에 영 찝찝한 눈으로 가슴팍을 내려다보던 군파츠가 이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가면 무언가 중요한 걸 발견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건 이성이 아닌 감에 가까운 판단.
"대장. 저기로 안 갑니까?"
그르렁거리는 포식 장갑이 가리키는 방향.
동시에 뒤쪽 수하가 가리키는, 한눈에 봐도 도시에서 가장 크고 중요해 보이는 건물.
둘 중 하나를 놓고 고심하던 군파츠가 이내 결심을 내렸다.
감을 믿어보기로.
애초에 자신이 이때까지 수없이 많은 고비를 넘길 수 있게 도와준 것들이 그 특유의 감이었으니.
<아냐. 다들 이쪽으로 와봐.>
"설마 그놈이 킁킁거리는 방향으로 가자고요? 무슨 개도 아니고..."
크르릉...
콰직!
"헉!"
알아들은 듯 으르렁거리며 주둥이를 콱 내밀어 물려는 포식 장갑에 기겁하며 물러선 수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 군파츠가 이내 녀석이 가리키던 방향을 향해 조용히 몸을 낮췄다.
**
도시 외곽, 황무지.
키이이잉...
가로세로 20m, 네모난 판을 타고 아래로 내려온 말더듬이 사내가 자신의 전면을 바라보았다.
일단 보이는 건 황무지 위로 온통 토막 나고 망가진 50구의 기갑화보병.
그리고 그 앞, 이 구석진 곳에서 나름 짬날 때마다 취미 삼아 열심히 개조했지만 이제는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사이보그 검사 인형 하나.
더불어 그 모든 광경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 알레고리아의 주인.
쿠궁...
쿠구궁...
뒤쪽, 여전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도시를 흘끔 바라본 말더듬이 사내는 이내 그 소음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쪽도 적당히 병력을 남겨두고 왔으니 자칭 시장, 론 그 작자가 맡은 바 일을 끝낼 때까지는 적당히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지금 자신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눈앞의 상대.
"너... 너너... 어느... 국에서... 왔지?"
말더듬이 사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면의 상대를 보며 물었다.
검기 사용자도 급이 있다.
비슷한 수준의 경지라고 해도 특별한 이는 하나가 열을, 혹은 그 이상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나는 법.
저 정도면 절대 그냥 생존자 무리에서 운 좋게 태어난 녀석이 아니다.
그게 일단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이유.
눈앞 한 놈이면 모를까, 소속 국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거라면 일이 매우 귀찮아지니까.
그리고 그런 사내의 말에.
'흠.'
강태석이 턱을 매만졌다.
보아하니 다른 칠 국 중 하나에서 왔다고 오해 중인데 운 좋으면 날로 먹을 수 있겠다 싶었기에.
그리고 어지간하면 조금 충돌 없이 날로 먹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단 도시로 들어간 아니타와 군파츠들이 걱정되기도 했고 더 큰 이유는...
키이이잉...
키이잉...
"..."
'몇 놈 안되면 그냥 들이받아버리려고 했는데.'
그야말로 한 무더기.
말더듬이 사내와 함께 철판을 타고 내려온, 아까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의 각종 사이보그 검기 사용자와 기갑화보병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던 강태석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도시 한켠, 군파츠가 향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기대감을 듬뿍 담은 채.
**
도시 오른편, 지하통로.
<... 갑자기 웬 오한이.>
저벅.
하수도 비슷하게 생긴 시설을 따라 지하를 향하던 군파츠가 자신의 포식 장갑 위를 매만지다 이내 웃기다는 듯 픽 웃었다.
자신 자체가 검기 사용자가 되고 어느 정도 한서불침이 된 것이 느껴지는 데다 환경 저항능력까지 있는 포식 장갑까지 입고 있다.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그와 별개로 긴장감을 풀지는 않았다.
미로 같은 지하구조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수록 포식 장갑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으니까.
<주변 철저히 경계하고. 뭔가 위험한 게 나타났다 싶으면 바로 쏴버려.>
뒤따라오는 이들을 향해 말한 군파츠의 말에 따라오던 이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들으면 과잉대응 같긴 하지만 모두 이유가 있다.
이유는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한 기분 때문.
스르륵...
...
...
천천히 걸어오던 무장병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듯한 기분으로 통로 앞을 향했다.
평범한 지하통로 같긴 한데 왠지 모를 시선이 온 피부를 휘감고 있는 듯하다.
마치 무언가가 벽 너머에 숨어서 수천, 수만 개의 눈들로 자신들을 살피는 기분.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혹시나 하여 감지센서로 무언가가 자신들을 살피고 있나 철저히 벽면을 검사하고, 심지어 일부를 부숴보기까지 했지만 모두 무소용.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을뿐더러 지하로 들어온 이후로 계속되고 있는 이 느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게 군파츠를 비롯한 무장병들 모두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이유.
이 도시는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지하로 오니 한층 더 선명히 그게 느껴진다.
타박.
타박.
키이이잉...
앞장선 군파츠와 팀원들의 발걸음 소리가 축축한 지하통로 사이를 메꾸던 그때.
그르릉...
<?>
갑자기 통로 어딘가를 향해 그르렁거리는 포식 장갑에 고개를 쳐든 군파츠가 가늘게 눈을 떴다.
보이는 건 널찍한 환기구.
촘촘하게 철망이 쳐진 곳 그 너머로 훙훙거리는, 팬이 돌아가는 환기구 특유의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
......
<빙고.>
바람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것도 들어보니 한둘이 아니다.
잠시 후.
콰드드드드득.
<여기 지키고 있어. 금방 갔다 올 테니.>
환풍구의 철망을 강제로 뜯어낸 군파츠가 그 안으로 몸을 넣으며 뒤쪽 수하들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