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08화 (10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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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살다 <땅>에 떨어진 날.

    아이, 차레스는 생각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라져야겠다고.

    이 <땅>에 적응해야겠다고.

    **

    터어어엉...

    "오! 살아왔구나!"

    바닥 아래서 치솟아올라 내려앉은 차레스를 보며 마르트가 반갑다는듯 외쳤다.

    한때는 그 자의 아래, 같은 진영에 있던 녀석.

    거기에 붕괴의 날 죽은줄 알았는데 살아서 오랜만에 만난데다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걸고 미끼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안 반가울수가 없는 노릇.

    '거기다 위험한 역할같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멀쩡하잖아.'

    칼 한자루를 들고 선 차레스를 한번 안아주기라도 하려고 성큼 걸어가던 마르트가 순간 멈칫했다.

    위로 올라온 녀석이 기묘한 눈으로 사방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생존에 대한 안도나 다시 만난 것에 대한 반가움이라곤 전혀 없이, 무언가를 평가하고 살피듯.

    그런 차레스의 행동에 온몸의 털이 왠지 모르게 곤두선 마르트가 저도 모르게 멈춰선 그때.

    투타타타타타타타타!

    타타타타타타!

    "...! 무슨! 야 이것들아! 미쳤어? 무슨 짓이야!"

    갑자기 차레스가 있던 자리를 훅 뒤덮어버린 레일건의 폭풍에 마르트가 뒤쪽, 생존자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치이이익...

    "미쳤어? 무슨..."

    놀란건 마르트뿐만이 아니었다.

    연기가 피어오를때까지 쏘아댄 레일건을 든 일백의 생존자들을 향해 버럭 내쏘아진 시카른의 외침에 가장 앞, 리더인 중년사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미치긴. 지극히 정상이외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짓을! 저놈 너희편 아냐?"

    그 말에 중년 사내가 웃었다.

    그럴리가 있겠는가.

    저놈은 그냥 오는 길에 마주쳤을 뿐이다.

    청염이 휩쓴 대지, 간신히 살아난 자신들의 앞으로.

    흉흉한 소문이 돌던 동쪽 평원에서 걸어나타난 자.

    동쪽에서 들려오던 소문은 간단했다.

    어느순간부터 생존구역과 마을들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다고.

    수십, 수백명이 모여살던 곳부터 나름 수천명이 살아가던 곳까지.

    차츰차츰 소문이 퍼져 평원이 황량해지고 아무도 왕래하지 않을때쯔음.

    그런 대지를 청염이 휩쓸었을때 청년은 이를 뚫고 동쪽에서 나타났다.

    그야말로 4층에서는 보기 힘든 압도적인 강함을 몸에 휘감은채.

    철컥.

    "너무 수상한데 차마 허튼짓할수도 없으니까 그냥 쥐죽은듯 조용히 있었던 거지. 지금 아니면 방법도 없다고."

    "그런 추측만으로..."

    하지만 시카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후우우우우우웅.

    저 멀리, 탄자가 깨지며 피어오른 자욱한 연기속에서 무언가가 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을 휘갈랐다.

    그들이 선 통로 안쪽, 전체를.

    뭔지 모를 소리지만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 정체모를 현상에 시카른이 채 반응하기도 전.

    쩌어어어어엉!

    스거거거거거거걱!

    칠채영창을 칼의 형태로 벼려 시카른과 중년사내의 앞을 가로막은 강태석의 주변, 온 사방에서 섬뜩한 절삭음이 들려왔다.

    **

    쩌어어어어어엉!

    시퍼런 무량검기를 머금은 영롱한 칼과 부딪친 무언가가 섬뜩한 파공음을 터트려낸다.

    휘둘러진 무언가의 정체는 가느다란 한줄기 푸른 실.

    검사.

    연기 속을 중심으로 길쭉하게 뻗어나온, 수백미터의 가는 실이 온 사방을 위와 아래로 깔끔하게 내갈랐다.

    다행히 이에 반응한 몇몇은 뛰어올랐고 닻사내, 마르트와 적검여인, 민트라같은 이들은 각자의 검기를 뽑아올려 막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쩌저저적...

    쩌적...

    커헉...

    끄어어어억....

    ... 어어... 어어어?

    무언가 비스듬히 잘려 미끄러지는 소리.

    상반신이 떨어져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소리.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는 이도 있고.

    서서히 믿기 힘들다는 신음성을 토해내기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잘려나간 상체에서, 홀로 우뚝선 자신의 하체를 보며.

    잠시후.

    끄어어억...

    "우아아아아악! 이새끼 뭐하는거야!"

    콰아아아아아아앙!

    본능적으로 닻을 휘둘러 연기속을 내리찍은 마르트가 괴성을 토해냈다.

    이미 온사방은 피칠갑.

    상하체가 모조리 잘려나간 수십명이 자신들의 절단면을 보며 신음섞인 비명을 토하고 있다.

    아무리 초인의 생명력이 강해도, 회복제를 투여한다고 해도 절대로 살릴수없는 부상.

    순간.

    꾸드드득...

    "저는 정당방위였잖아요. 뭐가 문제죠?"

    "....!"

    자신의 닻을 칼로 여유롭게 막아내고있는 차레스의 말에 마르트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던 그때.

    콰아아아아앙!

    "정당방위는 무슨. 작정하고 올라온 놈이."

    어느새 창으로 바꾼 칠채영창을 내던져 마르트와 차레스를 떼어놓은 강태석이 산산히 가루로 흩어지는 유리파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올라올때 느꼈다.

    눈에 스산하게 서려있는 살기를.

    처음에는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건가 했는데 이제 적조차 없고 안전해진 지금 보인 살기의 의미는 명확.

    녀석들은 애초에 자신들을 다 죽일 생각이었던 것.

    그리고 그런 강태석의 말에.

    후웅...

    "그렇다곤 해도 선제공격은 아니죠. 설령 제가 그런 마음을 먹었어도 무슨 짓을 아직 했던건 아니잖아요?"

    "너..."

    공격을 가볍게 막고 멀쩡히 걸어오는 차레스의, 예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뻔뻔한 멘트에 마르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

    말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그 뻔뻔한 행동에 마르트가 뭐라 하기도 전 먼저 움직인 청년의 발차기.

    거의 130kg는 되어보이는 체구에 그보다 더 무거워보이는 닻을 든 마르트에 비하면 70kg밖에 안되어보이는 청년의 체구는 더할나위없이 작고 가벼웠다.

    하지만 발이 휘둘러진 순간.

    후우우웅...

    퍼어어어어어어억!

    "!!!!!!!!!!!!!!!!!!!!!!!!!!!"

    간신히 닻을 내리찍어 자신을 향하는 공격을 막은 마르트가 푹 패여나간 자신의 닻을 보고는 기겁을 하며 쿵쿵 물러섰다.

    가볍게 휘둘러진 발길질에 자신의 병기가 마치 뭐에 베어물린 것처럼 슥 지워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 원인은 청년의 정강이를 시퍼렇게 감싸고 있는 얇은 막.

    츠츠츠츠츠...

    면검기.

    검사와 검사가 얽혀 만들어진 시퍼런 막이 청년의 정강이를 감싸고 있었다.

    평범한 검기로는 버티기 힘든 위력.

    실제로 단번에 박살나버린 마르트의 닻이 그 증거다.

    그리고 사념탄환 역시 마찬가지.

    타타타타타타탕!

    강태석은 위협적으로 느꼈던 소녀의 녹색탄환들이 청년의 앞 허공에 너울거리며 푸른 면에 걸려 모조리 스러져내렸다.

    검사.

    한가닥 한가닥은 검기보다 훨씬 약해도 검체를 썰어낼 정도는 충분하며.

    그런게 수백, 수천가닥이나 되니 응용면에서 몽둥이와 같은 검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시카른과 중년사내 앞에서 지켜보던 강태석의 한탄성.

    "... 인생 참."

    검사를 사용할수 있어도 면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하면 자신도 썰려나가거나 타래가 엉켜 폭주할수 있으니까.

    한데 저런 식으로 무슨 면직포마냥 써먹다니.

    거기에 상대는 자신들을 절대 놔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말로 하면 안될까? 왜 그리 열받아있어."

    통로 밖, 5층으로 나가는 입구를 철통처럼 막아서고 검기사용자들을 비롯한 생존자들을 겨누는 상대를 향해 강태석이 혀를 차며 묻자 묵묵히 칼을 휘두르려던 청년, 차레스가 오히려 멈칫했다.

    도저히 궁지에 몰린 자가 내뱉을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으니까.

    저들은 검기사용자들도 모두 싸우느라 지친데다 올라오느라 엑소슈트까지 놓고와야했고.

    반면 자신은 유인을 핑계로 몸안에 여력을 최대한 쌓아둔채 위로 멀쩡히 올라왔다.

    그나마 신경쓰이는 반지도 방금 써서 재충전상태일테니 전력차는 명확하다못해 절망적.

    한데 저런 태도라니.

    그리고 이게 오히려 차레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뭐.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있으니까.'

    후웅.

    칼을 휘두르며 여유있게 주변을 둘러본 차레스가 덤덤히 입을 열었다.

    "화난건 아닙니다. 다만 당신들 몸의 <정수>가 필요한거죠."

    "정수..."

    중얼거리는 시카른을 본 차레스는 한발짝 옆으로 걸어 시체를 향해갔다.

    정수는 죽은 직후 최대한 빨리 뽑는게 좋다.

    서서히 허공으로 휘발되듯 날아가니까.

    보여줄겸 두토막난 시체의 곁에 선 차레스가 조용히 시체에 발을 올린순간.

    쭈르르르르르륵...

    시체의 몸안에서 무언가 빨려나가는 소리가 들려오며 순식간에 미라처럼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어 차레스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시뻘건 증기.

    그 일련의 반응이 끝난 직후.

    "..."

    "... ..."

    할말을 잃은채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이들을 보며 차레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허접하게 체력이나 마력따위를 빨아먹는게 아니다.

    이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를 흡수하는 행위.

    그들이 가진 세월과 재능이 자신의 것이 되며.

    이를 통해 자신은 채 2년도 안되어 이렇게 자라났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세월을 앞당기며.

    필부에서 천재로 스스로를 개화시키며.

    "예전 그시절엔 전장도 많고 시체도 많아서 더 좋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여기 4층에 내려와서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모두다 흩어져있어서 편했으니."

    꾸욱.

    말을 마친 차레스가 주변, 평범한 생존자를 제외한 검기사용자 여섯을 바라보았다.

    벽을 넘은 이들의 재능과 정수는 평범한 이들의 몇십, 몇백배.

    절대 놓칠수 없는 먹이.

    '나름 잘 대해준 이들이긴 하지만...'

    마르트등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리던 차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신들이 그간 먹어치워온 이들도 마찬가지.

    자신은 모두에게 공평해야하며 걸린 이들에게 예외란 없다.

    자신이 떨어져내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화르르르륵...

    마음을 굳힌 차레스의 손끝에 검사가 실타래처럼 뭉치고 뭉쳐 마치 휏불처럼 타올랐다.

    검화.

    검사의 또 다른 응용형태.

    이 마력의 불길은 터져나가 휘둘러지는 경로의 모든것을 불태우고 녹여버린다.

    심지어 어지간한 검기마저도!

    "너무 원망말아주세요. 딱히 악감정은 없으니까."

    말을 마친 차레스가 손안의 불길을 화악 휘두르려던 순간.

    "너도 나 너무 원망마라."

    "...?"

    덤덤한 상대의 말과 동시에.

    욱신.

    "커헉..."

    심장과 폐, 마력회로를 조여오는 통증에 차레스가 입에서 피를 토했다.

    **

    콰득...

    심장, 폐, 혈관, 신경.

    온몸의 내장에서 치고 올라오는, 모든것이 산산히 찢어발겨지는듯한 통증에 차레스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어 보이는, 상대의 손안에 서서히 그러모이는 유리파편가루.

    "아까 전 그 창... 말도 안돼. 내몸에 파편이나 독같은건 안통할텐데."

    이에 칠채영창 파편을 그러모으던 강태석이 손바닥을 까딱거렸다.

    독같은게 아니다.

    저 가루파편 하나하나에 올올히 서린 저주가 상대의 호흡을 타고 폐로, 폐를 타고 심장으로, 심장을 타고 혈관을 통해 전신으로 흘러나가 상대를 내부에서 찢어발기고 있을 뿐.

    유리가루정도였다면 검기사용자의 육체 자체가 그러모아 배출시켜버렸겠지만 칠채영창에 서린 저주는 그럴수있는 수준이 아니다.

    B등급 무기들은 명색이 강기사용자급의 권위가 서린 것들이니.

    이건 말 그대로 인간의 정신을 감염시키고 영혼을 파괴한다.

    화르르륵...

    주저앉듯 무너져 무릎꿇은 청년의 칼끝에 서려있던 검화가 연료잃은 불길처럼 후르륵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서서히 무너져가는 청년을 모든 강태석은 한숨을 내쉬며 모은 유리칼날을 손끝에서 스윽 뽑아내고는 천천히 상대에게 걸어갔다.

    사람을 죽이는걸 거리낄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만 내킬리도 없다.

    하지만 이녀석은 안된다.

    <식인포식> 계열의 녀석들은 강해지는 과정도, 강해진 결말도 재앙 그자체이기 때문에.

    잠시후.

    "끄륵..."

    "잘가라. 이게 더 편할거다."

    촤아아악!

    이제는 전신이 침식당해 눈동자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청년을 보던 강태석이 손에 들린 유리칼을 그대로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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