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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96화 (9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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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우우웅!

    키이이잉...

    쿠웅!

    갑판을 통해 수천대의 엑소슈트들이 차례대로, 줄지어 궤도엘리베이터의 층으로 이동했다.

    완만하게 굴곡지어져있는 바닥.

    그 위로 장엄하게 펼쳐진 천장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메꾸는 온갖 금속벽과 구조물, 기둥들까지.

    거주구라고는 하지만 마치 커다란 우주선의 틈바구니에 들어온것과 같은 형태.

    <구조가 엄청 복잡한데. 이거 괜찮나?>

    포식장갑을 입은채 엑소슈트까지 장착한 군파츠가 주변을 둘러보며 강태석에게 물었다.

    다른 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군파츠의 엑소슈트는 이미 포식장갑에 일부 침식당해 기이하게 형태가 변해있었다는 것.

    두개의 팔 부위에 달려있던 디스트로이어는 꺾여올라 양쪽 어깨로 향했고.

    엑소슈트의 다리부분은 포식장갑과 합쳐져 총 중량 6톤이라는의 육중한 무게를 버텨내고 있었으며.

    자유로워진 포식장갑의 두 팔의 양쪽 허리춤에는 고철선에서 얻은 커다란, 4m짜리 기갑병용 에너지소드와 기갑투창 세개가 걸려있었다.

    원거리와 근거리를 모두 대처하기에 적합한 형태.

    그런 군파츠의 말에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각자 맡은 것만 잘 하면 구조는 괜찮아."

    일부러 복잡하게 지어놓은것도 아니고 결국 거주구라는게 사람 살라고 지어놓은 곳이다.

    환경의 특수성때문에 지상보다는 우주의 그것에 형태가 가깝기는 해도 사방을 향하는 길과 위아래 층계를 넘나드는 통로정도야 충분.

    방향만 잃지 않는다면 미로에 빠져 길을 헤멜리는 없다.

    문제는 혹시라도 있을 방해꾼들.

    수천명이 익숙하지 않은 구조를 줄지어, 눈에 띄게 대이동하는 상황.

    누가 봐도 기습에 취약하다.

    짐승, 혹은 인간, 혹은 무언가.

    어떤 것들이 습격해올지도 모르는 환경.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건 두가지가 된다.

    정찰.

    그리고 요격조.

    최대한 주변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자신들을 습격하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들을 오히려 선제공격해 뒤흔든다.

    이를 위해 꾸려진 팀.

    "각자 잘해주면... 그래도 좀 낫겠지."

    이미 정찰대는 진즉 앞쪽으로 출발한 상황.

    강태석이 지금쯤 어둠속으로 흩어졌을 200명 가량의 이들을 떠올리며 거대한 궤도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

    바스락.

    "젠장할이군 진짜로. 대장 되면 고생 좀 덜할줄 알았더니."

    복잡하게 생긴 거대한 구조물 사이, 그중 회색 벽면 뒤에 숨은 더그가 바깥을 슬쩍 내다보았다.

    그런 더그의 전신은 몸뿐 아니라 안면부까지 주변과 동화된 상태.

    치리리릭...

    은폐슈트.

    몸에서 나오는 생체펄스파장을 차단하고 빛을 굴절시키며 소음마저 최소화해주는 장비.

    목적은 당연히 스파이용.

    하지만 걸치기만 해도 든든하던 엑소슈트대신 이런걸 입고 외지에 툭 떨어져있으니 거의 벌거벗은것마냥 불안하다.

    심지어 어찌나 얇은지 바람이 숭숭 통하는게 진짜 아무것도 안입은 느낌.

    이대로 적을 조우한다면?

    녀석들은 둘째치고 이쪽으로 집중될 엑소슈트들의 화망에 정면으로 노출될수도 있다.

    땅을 갈아엎고 금속을 부숴버리는 레일건 중탄자들의 포화가 자신의 머리위로 쏟아져내린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

    "제기랄... 제기랄. 진작 훈련 좀 시켜놓을걸. 덕분에 예전에 하던 일만 이어받게 되었잖아."

    웃기게도 칼슨이 살아있던 시절 자신이 하던 일이 이런거였다.

    정탐 및 감시.

    그리고 매우 유능하게 이를 해냈기에 오른팔까지 올라간거고.

    이윽고.

    깜빡.

    불평을 그만두고 숨죽인 더그가 주변을 살핀뒤 저 뒤쪽, 본대를 향해 아주 가느다란 레이저를 쏘아보냈다.

    **

    깜빡.

    깜빡깜빡.

    사방에서 조용히 흩어진 이들이 쏘아보내는 희미한 빛의 점들이 모여있던 수신호 담당들에게 흘러들었다.

    일단 주변은 안전하다는 신호.

    은빛바다, 전파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세상속에서 어설픈 통신기기보다도 근거리에서는 더 믿을만한 물건.

    이에 수신호담당들이 조용히 엑소슈트의 손을 치켜올리자.

    쿵...

    쿠우웅...

    발에 최대한 천가지들을 덧댄 엑소슈트들이 천천히 발소리를 줄인채 우주선과도 같은 구조 사이로 그 육중한 행렬들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가야할 거리, 45km.

    천천히, 조용히 가도 서너시간이면 도착할 거리.

    정상기동시간이 185시간이니 충분하다못해 넘치지만 격전을 벌이며 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전투기동시간 45분.

    피해도 피해거니와 엑소슈트들의 충전이 바닥나면 실려있던 물자도 모조리 버리고 맨몸으로 길을 헤쳐나가야하는 상황.

    그러니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게 좋다.

    <이대로만 쭉 가면 좋겠는데.>

    천천히 숨죽이며 걷는 군파츠의 말에 강태석이 눈을 감았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고철선의 단편적인 기록을 봐도 그렇고.

    그토록 많은 이들이 들어갔음에도 고요하기 없는 이곳의 상황만 봐도 그렇고.

    너무 희망적인 예측을 하면 실망도 커지는법.

    정찰을 보낸 이유는 닥쳐올 모든 위협을 미리 피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육중한 행렬이 그렇게 기민하게 피해다니는것도 불가능하고.

    정찰을 보낸 이유는 그것보다...

    "..."

    강태석이 침묵을 지키던 그때.

    깜빡.

    깜빡깜빡깜빡.

    저 멀리, 동쪽에서 터져나온 다급한 레이저불빛과 함께.

    키아아아아아아악!

    "... 왜 아닌가 했다. 간다."

    강태석.

    현재 직군, 요격조.

    군파츠에게 짧은 말을 남긴 강태석이 깊숙히 숨을 들이킨후 어둠을 휘감고 저 멀리, 괴성이 터져나온 곳으로 땅을 박찼다.

    **

    저 멀리.

    궤도엘리베이터, 진입구 서쪽 64km.

    칠국연합관리소속, <운하>.

    쿠르르르릉...

    거대한 무언가가 뚫고 지나간듯한 흔적이 궤도엘리베이터 한가운데를 정확히 가로지르고 있었다.

    강태석들이 들어온 입구와는 다르게 내부의 층층들마저 깔끔하게 관통한 지름 150m, 원형의 구멍.

    그렇게 궤도엘리베이터를 꿰뚫은 내부 구멍에는 은빛 나노벌레들이 들어차 직경 2km에 달하는 운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 주변 거주구로는 운하를 관리하는 칠국연합들의 관리인원들이 적당히 자리를 잡으며 지내고 있었다.

    어찌나 깔끔한 높이로 깔끔하게 구멍이 뚫렸는지 그야말로 배가 지나다니기에는 이상적인 형태.

    그 중간, 1.4km 지점.

    ..!!!

    캬아아아아악....

    "허허. 오랜만에 시끄럽네."

    촤아아악!

    거주구 상부, 서쪽을 바라보며 앉아 은빛 바닷물이 흘러들어 고인 저수지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한 청년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아득한 괴성을 들으며 흥얼거렸다.

    하긴 뭐 신기한 일도 아니다.

    저 동쪽, 궤도엘리베이터의 하단부가 투닥거리고 시끄러웠던 거야 항상 있었던 일이니까.

    청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드리운 낚싯대에 집중하려던 그때.

    저벅.

    "어르신."

    "어 왔어?"

    "네."

    그러며 걸어온 한 제복여인의 뒤로는 그야말로 산더미같은 물자들이 쌓여있었다.

    먹을것과 마실것이 정갈하게 포장된 수십개의 컨테이너는 물론.

    이렇게 변해버린 세상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과일에 양주들이 그득 들어있는 냉동컨테이너박스.

    거기에 더욱 구하기 힘든 온갖 고풍스런 장서들까지.

    예전, 일곱가문이 부리던 사치는 사치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정도의 물건들이 그득했지만 제복여인은 세상이 무너진듯 죄송스런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청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계속 남아서 모셔야하는데."

    그런 여인의 말에 청년이 피식 웃었다.

    "됐다. 너희도 난리났을텐데. 이제 돌아가서 각자 할일들 해야지. 이미 다른 나라들은 다 출발했다며?"

    다른 나라라 함은 여인의 국가, 일월을 제외한 다른 여섯 국가를 일컫는 이야기.

    청년의 말에 입술을 꼭 깨물던 여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라도..."

    "됐다. 신경쓰여. 난 혼자가 편하다."

    그러며 멍하니 서쪽, 저머너 튜브를 바라보던 청년이 손을 휘저었다.

    "이제 가봐. 그동안 수고했어."

    "... 알겠습니다 어르신. 사태가 종료되면 꼭 다시와 찾아뵙겠습니다."

    절을 하다시피 고개를 꾸벅 숙인 제복여인이 몸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후.

    다들 출발한다!

    네!

    우렁찬 여인의 함성, 그리고 대답하는 함성과 함께.

    쿠르르르릉...

    콰르르르르르르릉!

    운하 안, 여인을 기다리며 머물고 있던 백수십척의 함대들이 육중한 굉음을 토해내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

    다시 동쪽.

    진입구 근방.

    투콰콰콰콰콰콰콰콱!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우와아아악! 진짜!"

    빗발치는 탄환속.

    온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성 속에서 몸을 숙이고 내달리던 더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예전 자신들이 고철선에서 싸웠던 괴물들과 비슷한 외양.

    하지만 다른게 있다면 스케일과 사이즈.

    주변에서 숨어있다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는 이것들은 훨씬 더 단단하고 훨씬 더 거대하며 훨씬 더 숫자도 많다.

    마치 작은 배에서 자란 군락과는 비교도 할수없는 규모를 보여주겠다는듯!

    아니, 사실 그보다 더 심각한게 더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건 사방으로 쏟아지는 포화들.

    투콰콰콰콰콰콱...

    콰콰콰콰콱!

    튜브외벽의 타르늄 재구조화 금속보다는 훨씬 더 약한 층간구조금속들.

    하지만 그래도 금속은 금속일텐데 빗발치는 탄자에 무슨 종잇장 찢겨나가듯 바닥이고 구조물이고 가리지않고 구멍이 숭숭 뚫린다.

    레일건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력.

    저기에 걸리면?

    이 얇은 은폐장 슈트하나로는 버티지도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그나마 저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조준선을 조금 위로 후려갈기고 있어서 안맞고 있지만 그나마도 좀더 괴물들이 접근하면 끝장이다.

    가까워진만큼 조준선들도 아래로 내려올테니!

    아니나다를까.

    콰콰콰콱!

    콰콰콱!

    "우아아아아악!"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탄착군에 더그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도망간다고 해도 저게 자신을 스쳐지나며 찢어발겨버리는 속도가 더 빠르다!

    더그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린 그순간.

    투콰콰콰쾅!

    후욱!

    "...?!"

    무언가 퉁겨나가는 소리.

    동시에 자신의 몸이 훅 들려 어딘가로 끌어당겨지는 느낌.

    잠시후.

    후우우우욱…

    전신,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감각에 눈을 뜬 더그가 이내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며 눈꺼풀을 뻐끔거렸다.

    보이는건 아까전과 달리 텅 비어보이는 층계.

    더불어 익숙하면서도 아주 밉상인 얼굴.

    쿠콰콰콰...

    "아래로 빠져나가면 되잖아. 아래로. 아까 말한거 못들었어?"

    여러 층으로 구성된 콜로니구조.

    그리고 지금 더그와 자신이 선건 방금전 층의 아래.

    바닥, 위층과 아래층 사이를 연결하는 길쭉한 비상통로로 더그를 당겨 뛰어내린 강태석이 얼얼한 손을 매만지며 후후 입김을 내불었다.

    단 두발.

    더그를 구해내기 위해 단 두발 쳐냈는데도 손이 얼얼하고 손끝을 감싼 푸른 빛이 촛불마냥 일렁거린다.

    '역시. 최대한 전장에 서는건 피하는게.'

    손을 우득 푼 강태석이 고개를 들어 위, 천둥번개가 울려퍼지고 있는 층계를 바라보았다.

    위는 여전히 격전중.

    "돌아가. 본진으로."

    "너는 어쩌려고?"

    일대일이면 그냥 편하게 말한다.

    썩 이쁜 녀석도 아니니.

    더그의 말에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일해야지. 요격."

    목표는 이 무리를 움직이고 있을 여왕개체의 포획 혹은 사살.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것같다.

    하지만...

    '뭔가 더 있다.'

    찰박.

    챠르르르륵.

    너르게 펼쳐진 아래층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발아래, 살짝 들어찬 은빛 기계벌레들의 물결을 짓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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