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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94화 (9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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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튜브, 기록된 구멍쪽으로 향하던 이들의 앞에 나타난건 수많은 섬들이었다.

    쿠르르릉...

    정확히 말하면 검은 장벽 앞, 은빛의 바다를 메운 몇개의 도시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둥둥 떠다니는 몇대의 고철선들.

    마치 버뮤다 삼각지대속, 배들의 묘지에 들어온듯한 느낌을 준다.

    거리가 제법 멀었음에도 선명히 보이는 잔해들의 압도적 크기들 때문에 더욱 그럤고.

    안그래도 황량한데 마치 유령선에 유령도시들이 튜브 아래를 그득 메운 모양새.

    "그래도... 잘못 찾아온건 아닌거같은데?"

    교차하는 도시의 섬과 섬들 사이,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보며 군파츠가 중얼거렸다.

    높이는 짐작이 안가지만 저 커다란 튜브에 비해서도 유의미해보이는 크기의 구멍이 튜브 하단부, 은빛바다와 접하는 경계면에 뚫려있었다.

    아마 기록속, 고철선의 피난민들이 들어간 곳이 저곳일터.

    그리고 그 옆 갑판에서 마찬가지의 광경을 보던 강태석이 군파츠를 향해 말했다.

    "다들 내려서 잠깐 주변 뒤져보고 가지."

    "저 배랑 도시들을?"

    이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황량한 것이 뭔가 있을것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보아하니 중앙플랜트등이 있을것같은 섬사이즈들도 두셋쯤 보이는데 남은 물자들을 획득할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득.

    저번 고철선에서 무기는 풍족히 얻었지만 먹을 것등의 식료품은 그랬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만테오에서도 보급을 얻지 못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찾아봐야한다.

    무엇보다...

    "익숙해져보기도 해야지."

    키잉...

    어어?

    아래, 엑소슈트를 착용한채 기우뚱거리며 갑판을 배회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강태석의 모습에 군파츠가 콧김을 푸 내쉬었다.

    **

    부우우웅...

    각자의 배정된 엑소슈트를 입고 신호탄 등의 물자를 챙긴 각 쉘터들이 오시리스의 상륙에 따라 각 섬, 각 배들에 내렸다.

    구멍 근처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섬들의 개수는 다섯에 고철선의 개수, 일곱.

    멸망 전이라면 수백만, 충분한 죽음의 시기가 지난 후에도 생존자가 수만은 족히 넘었을 정도의 상당한 볼륨이다.

    자연스레 엑소-슈트로 무장한 이들도 어느정도 긴장하며 내린 상황.

    하지만...

    쿠르르르릉...

    "여긴 무너진것같은데. 아저씨? 사람도 없고."

    키이이이잉...

    쿵...

    쿠우웅...

    엑소슈트에 탄채, 양어깨에 두정의 유물을 둥둥 띄우고 서있던 아린의 말에 땅의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지금 선곳은 도시의 중앙.

    원래대로라면 중앙플랜트가 있어야할곳.

    하지만 도시 중앙, 우뚝 서있어야할 중앙플랜트는 처참하게 무너져 폐허가 된지 오래여보였다.

    도시 카툰에서 보았던, 제법 웅장한 그 모양새에 비하면 안타까워보일 지경.

    마치 망해가는 인류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것같아 뒤쪽, 보는 쉘터민들의 기분을 더욱 가라앉게 만들었다.

    "들어가보지. 혹시 모르니."

    그러며 EMP가 내장된 전마강갑의 어둠을 얇게, 마치 조금 짙은 그림자처럼 두른 강태석이 앞장서자 뒤따른 아린과 백수십의 쉘터민들이 쿵쿵 엑소슈트를 이끌며 안으로 들어왔다.

    전투가 없을시 풀충전된 엑소슈트의 활동시간은 기본 185시간.

    어찌보면 상당히 여유롭고 핵융합엔진이 있는한 반영구적으로 충전이 가능하니 모자라지 않아보이지만 저 시간은 격렬한 기동을 하거나 레일건의 에너지를 마구잡이로 써대면 미친듯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극한의 전투상황을 가정할때의 활동시간은 45분.

    거기에 오시리스 크기의 제약도 있고 다른 탄약과 물자들은 어찌보면 엑소슈트보다 더 중요한 물건이었기에 1인당 챙겨실을수 있었던 엑소슈트는 두개정도.

    즉 전투는 당연하지만 최대한 피하는게 좋다.

    키이잉...

    각자가 등에 실은 전파방해장치를 최대출력으로 작동시킨 이들은 어느정도 안으로 진입하고 주변에 위험이 없어보이는걸 확인한 뒤 3인 1조로 나뉘어 본격적인 수색을 시작했다.

    결코 거리를 멀리 띄우지 않고.

    빈틈없이, 서로가 서로의 기습을 방지해주는 동선으로 움직이며 여차하면 신호탄을 쏘아올려 지원을 받을수 있게.

    그리고 강태석은 아린과 함께 둘이 움직였다.

    벽을 넘은 둘이 함께 움직이는건 낭비같긴 하지만 현재 배의 가장 귀중한 전력중 하나인 아린이 혼자 돌아다니다 어처구니없이 당하면 그건 더 치명적이니까.

    기술담당인 달리안이나 전술적 화력활용이 가능한 아린은 어찌보면 흔한 근접전투담당인 자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재원.

    근접전투담당인 강태석이 화기전문가에게 상성상 취약하듯 원거리담당인 아린도 근접에서의 기습에는 어이없이 당할수도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호위를 해야한다.

    터엉...

    터어어엉...

    중앙플랜트, 무너진 상부를 지나 좀더 깊은 곳의 물자보관섹터로 들어온 아린은 두가지를 깨달을수 있었다.

    첫번째, 이곳은 생각보다 사람이 훨씬 많이 살아남았었다는 것.

    오면서 보이는 여러가지 부설물들이나 사람의 흔적.

    황량해보이는 지금의 모습과 다르게 이들 도시는 아마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생존자 숫자를 자랑했을 것이다.

    오면서 보인 섹터의 구분이나 거주용 구조물들의 숫자를 세어 역산하면 못해도 2-3만정도.

    자신들이 살던 도시가 수천, 많아도 1만 이하였던 걸로 추정되면 이 도시는 대단히 방어를 잘해낸 것이다.

    아니면 원래 살던 이들이 많았을수도 있고.

    그리고 두번째.

    "... 여기도 텅텅 비었어."

    터어어어엉!

    발길질을 하고 문을 박살내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안쪽으로 두정의 디스트로이어를 겨눈 아린이 안쪽, 텅텅 비어버린 광대한 물자창고를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창고들 안에는 내용물은 다 먹어버린 텅빈 박스들만이 잔뜩 쌓여있을 뿐.

    모두 텅 비어있었다.

    즉 이 도시는 중앙플랜트의 물자를 모두 써버린 셈.

    그런 아린의 옆에 서있던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플랜트가 물자를 생산해내는 마법의 기관은 아니니까."

    퍼어엉!

    퍼어어어엉!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조사를 끝내고 귀환한다는 황색 신호탄의 폭발음들을 들으며 강태석이 중얼거렸다.

    다른 곳도 대충 다 비슷한 상황이라는 의미.

    즉 이곳은 플랜트 전체가 텅 비었다.

    이유는 명확.

    말 그대로 중앙플랜트가 물자를 생산해내는 마법의 기관은 아니니까.

    단지 도시의 수십만 인원이 사용할만한 물자와 재료들을 저장, 보관, 변형하는 역할을 겸하며.

    그 비축되었던 양이 살아남은 수백, 혹은 수천정도의 생존자가 쓰기에는 제법 충분하게 많았을 뿐.

    하지만 결국 한계는 온다.

    생존자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거나.

    서로의 내전이나 불의의 사건등으로 인해 잔해에 깔리고 불타 못쓰게 되는 물자들이 생긴다거나.

    혹은 물자보다 더 중요한 지열발전시스템등이 격렬한 지각활동에 의해 망가져 냉동등이 안되고 내용물이 변질되었다거나.

    그경우 결국 답은 하나뿐인거다.

    그대로 섬에 갇혀 모조리 굶어죽거나.

    아니면 물자가 있을만한 곳으로 들어가거나.

    이들의 선택은... 후자.

    쿠르르릉...

    바깥으로 걸어나온 강태석이 저 멀리,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튜브의 검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마치 괴물이 베어문 것처럼 뜯겨나가 안쪽, 지저분한 층계와 전선들을 드러내고 있는 높이 300m 가량의 구멍.

    넓이는 조금 더 넓어 400m 가량.

    겉면 금속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그 단면의 안쪽을 구석구석 메우고 있다.

    마치 불꺼진 폐허, 그 깊은 곳을 보는듯한 느낌.

    "아마 저기로 갔겠지."

    "이 섬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거야?"

    "흘러든 걸거다. 고철선은 몰라도 섬이라면."

    강태석이 이곳, 검은 장벽과 운하에 대한 설정을 떠올렸다.

    이 은빛 나노머신의 바다는 아주 미세하게지만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흐른다.

    동서남북, 전후좌우 그 흐름이 끊임없이 바뀌긴 하지만 장기간의 시간을 준다면 결국에는 좀더 북쪽으로 가게되는 것.

    그중에서도 구멍이 나있는 곳으로는 마치 물이 빠지듯 좀더 그 흐름이 집중된다.

    운하도 그렇고, 이곳도 그렇고.

    이 도시들은 아마 이 근방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들이었을 터.

    그런 도시들이 천천히 은빛 바다의 조류에 휩쓸리고 휩쓸리다가 이곳에 도착해 모이고 고여든 것.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결국 비슷한 결과를 맞이해 늦든, 빠르든 저 안으로 들어갔을 거고.

    피시시시시식!

    저 멀리, 자신들이 들어왔던 중앙플랜트 입구쪽에서 붉은 신호탄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되었으니 이제 돌아가자는 뜻.

    그런 신호탄에.

    쿠우웅...

    쿠우웅...

    강태석과 아린이 구석구석 나타나는 엑소슈트들과 합류해 다시 출발했던 지점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다시 배, 오시리스.

    갑판에 모여든 이들중 더그가 푸 숨을 내쉬었다.

    "내가 갔던 고철선은 다 비어있더군. 엄청나게 싸워덌던 흔적도 있고."

    "우리가 갔던 도시도 그랬습니다. 굶어죽은 시체들도 엄청 많더군요. 애초에 중앙플랜트가 없던 소도시다보니. 그래도 몇몇 이들이 저 안으로 향한 흔적은 발견했습니다만."

    흩어진 각 쉘터장과 조사팀들이 앞다투어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다.

    각양각색의 상황, 각양각색의 배와 도시들.

    어떤 곳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있었고.

    어떤 곳은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고 노력해보려했던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통점은 두가지.

    빼앗겼건, 모두 먹어치웠건, 못쓰게되었건.

    그들의 창고들은 모조리 텅텅 비어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모든 물자를 써버린 이들의 흔적은 저 안쪽, 커다란 구멍으로 향했다는 것.

    끼이이이익...

    끼이이이이이익...

    "진짜 엄청 크네 저거. 입구가."

    반쯤 망가지고 녹슨 두개의 고철선이 걸려 삐그덕거리고 있는 거대한 입구를 장벽, 300m쯤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며 군파츠가 중얼거렸다.

    높이 150m의 고철선보다도 훨씬 높게 뚫린 구멍.

    그리고 그 사이는 빼곡한 층층의 구조로 그득 차있었다.

    마치 수백겹으로 된 거대한 금속케이크를 뭔가 한입 베어문 느낌.

    그리고 그 내용물은 모두 어두컴컴한 무언가로 그득 들어차있다.

    꿀꺽...

    누군가 삼킨 침소리가 크게 울려퍼질때 한 팀장이 분위기를 전환하려는듯 손을 들었다.

    "저기... 그런데 우리가 갔던 소도시는 절반쯤 날아가있었습니다. 그건 조사 안해도 될까요? 뭐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는데."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섬은 섬.

    고철선보다 훨씬 커다란 크기.

    그런 게 절반이 날아가있다니 신경안쓰일리 없는 법.

    하지만 그런 누군가의 질문에 강태석이 덤덤히 대답했다.

    "그건 신경 안써도 됩니다. 저기 서쪽의 <운하> 쪽으로 흘러들어갔다가 공격받아 그렇게 된걸테니. 아마 그 충격으로 다시 이곳으로 흘러들어와 걸린 거겠지요."

    "... ...."

    강태석은 걱정하지 말라는 느낌으로 한 말이었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얼굴을 일그러트릴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냥 그쪽으로 흘러갔다고 도시를 절반이 쪼개질 정도로 공격을 퍼붓는다고?

    거기로 가면 자신들도 똑같은 꼴이 된다는 것 아닌가.

    아니, 그 이전에 저 거대한 땅덩이를 절반으로 쪼개버릴 화력이라는게 대체 어느정도인지 상상조차 잘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설명으로 인해 더 명확해진것.

    자신들은 더더욱 네번째, 운하가 아닌 마지막, 눈앞의 선택지를 고를수밖에 없다는 것.

    쿠르르르릉...

    어두컴컴한 구멍안을 사람들이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던 그때 더그가 다시 손을 들고 질문했다.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

    "하시지요."

    "저걸 어떻게 뚫고 지나가지? 텅빈 구조가 아닌데. 생각보다 엄청 빽빽하잖아."

    무슨 텅빈 튜브 타고 들어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슉 나오면 되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안쪽은 말그대로 금속의 층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상태.

    당연히 이 커다란 배가 기어들어가기엔 어림도 없는 상황.

    그런 더그의 질문에.

    “크흠. 흠.”

    강태석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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