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85화 (85/221)
  • 85

    강태석이 지금쯤 오시리스와 달라붙어있을 거대한 고철선을 떠올렸다.

    쿠구구구구구...

    무인도시처리분쇄기.

    여기에 나노병기들로부터 살아남을수있는 타르늄장갑을 덕지덕지 두르고 마개조를 통해 기계벌레들의 코어를 갈아삼키며 에너지를 얻는 엔진을 탑재했다.

    마치 고래가 플랑크톤만을 집어삼키고도 그 거대한 몸집을 유지할수 있듯.

    거기에 기계벌레들로 이루어진 금속의 바다는 너무나 밀도가 높기에 저렇게 땅 위에서만 돌아다닐수 있는 거대한 기계조차 떠다닐수 있는것.

    이에 들키면 안된다는 범죄자들 특유의 심리와 집단지성이 반영된 특유의 고성능 은엄폐기능.

    소리도 줄이고 전파도 반사하며 외장은 주변바다와 비슷한 은빛으로 칠해버린 거대한 금속의 배가 스스로의 기능에 충실하게 부수고 삼킬 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도시가 박살난 이곳은 고철선에게 있어 제 1 목적지.

    거기에 이런 짙은 안개.

    어찌보면 충돌은 예정되어있었던 것.

    그리고 지금부터 중요한건 하나다.

    들어갈것인지, 말것인지.

    헤집질것인지, 기다릴것인지.

    "대충 결정난것같군요. 각 쉘터과 개인들의 각자 재량과 판단에 맡기는걸로."

    강태석이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간 회의실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만약 저게 부르탄의 정예 고철선이었다면 기어들어가는건 그냥 자살행위에 가깝다.

    하지만 부르탄이 휩쓸릴당시 탈출한 수많은 고철선들중 그런 정예선이 된것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런 정예고철선들은 이렇게 목적없이 떠다니지도 않는다.

    강자의 탑승과 적확한 명령체계에 따라 정치적, 자원적 이득을 위해 핵심지역들을 돌아다니며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

    무엇보다 저게 지금 정예고철선이었다면 당장 어마어마한 공격이 날아들었을 터.

    마개조된 무기에 검기를 사용할 정도의 무력을 지닌 1급 범죄자들이 튀어나와 오시리스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즉 눈앞의 고철선은 그정도 수준은 아니라는것.

    카스티가 말한대로 내분이나 표류등이 휩쓸고 지나갔을 확률이 크며.

    그렇다면 충분히 한번 위험을 감수해볼만은 하다.

    '그렇다고 해도 다들 적극적이네.'

    눈빛을 빛내는 쉘터장들을 보던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돌렸다.

    이제 할말 끝났으니 해산.

    자신도 준비를 해야한다.

    자신 역시 <들어간다>는 선택지를 골랐으니까.

    잠시후.

    우당탕...

    터엉!

    요란하게 자리에서 벗어난 이들이 빠르게 회의실을 벗어나 각 쉘터, 혹은 자신들의 소속지로 향했다.

    **

    터덩.

    터더덩.

    흥분에 휩싸여 거칠게 자신의 쉘터로 향하는 더그를 향해 옆, 네일이 걱정스럽다는듯 물었다.

    "괜찮을까요? 들어가도?"

    금발여인을 통해 고철선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은 들었다.

    칠국연합 소속, 부르탄의 것.

    듣자하니 일단 도전해볼만한 하지만 안심하기엔 그들이 보였던, 하늘을 뒤덮었던 미사일폭풍의 위엄이.

    그리고 더나아가 그들 국가가 가지고 있던 악명이 떠오른다.

    저 배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하지만 그런 네일을 향해 더그가 혀를 찼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가 아니라 안들어가면 큰일이다. 다른 쉘터놈들 반응 못봤어?"

    "..."

    "앞서나가는것보다 중요한게 안미끄러지는거야. 그리고 네 아버지는 그런거에 뛰어났지. 지금은 들어가야해."

    더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사실 자신이라고 저 수상쩍은 배 안으로 들어가는게 마냥 내키는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망설일때가 아니다.

    이 광대하고 드넓은 세상, 도시안에서 알을 깨고 나온 자신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지하다는걸 깨달았으니.

    힘, 무기도 중요하지만 아는게 너무 없다.

    안에 가서 닥치는대로 조사하고 들고나와야한다.

    부르탄은 온갖 비밀과 요사스러운 것들이 그득했던 곳.

    제대로만 된다면 앞으로의 방향성을 잡을수 있을터.

    운이 좋다면 남들이 가지지 못한 비밀스런 <한수>를 챙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 너도 정신차려. 만약 우리 쉘터에서 벽을 넘는다면 그건 너라고 생각하니까."

    "...?!"

    텅텅텅텅!

    자자 다들 일어나서 모여! 이제부터 바쁘니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복도벽을 두들기며 쉘터민들을 불러모으는 더그의 등을 네일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콰지지지지직...

    콰직!

    쿠우우웅!

    갑판위.

    거구의 크탄이 마주한 철벽에 힘을 주자 우지직 소리가 나며 은빛으로 칠해져있던 두께 5cm, 가로세로 5m의 외장이 뜯겨져나왔다.

    그렇게 외장을 뜯어내고 거대한 칼로 벽을 썰어내며 몇번을 더 칼질하고 나서야 드러난, 안쪽으로 길게 뻗은 복도.

    후우웅...

    폭 3m, 높이 3m.

    딱 사람들이 왔다갔다할수 있게 만들어진 어둑한 복도 저너머에서 음산한 바람과 비릿한 피냄새가 풍겨나왔다.

    누가 봐도 한바탕 난리가 지나간 흔적.

    심지어 오랜기간 사람이 없었던지 풍겨나오는 바람속에서는 곰팡내마저 나는듯 했다.

    "좋아 좋아. 보물만 딱 들어있으면 좋겠군. 사람은 없이."

    박수를 쫙쫙 치며 사람들을 이끌고 그 앞에 선 더그의 말에 주변이들이 애매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했다.

    생존자 입장에서 생존자가 없기를 기도하기도 뭐했지만 사실 더그의 말에 그들 모두의 입장을 대변하고는 있었으니.

    이 거대한 금속상자는 커다란 관짝이자 커다란 보물상자인게 가장 이상적이다.

    잠시후.

    저벅.

    저벅저벅.

    더그네에 이어 줄을 서있던 각 쉘터의 정예들이 차례대로, 조심스럽게 열린 복도의 안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힘의 순서에 따라, 강한 쉘터들이 우선적으로.

    카티와 페리트란, 그리고 군파츠들의 쉘터도 마찬가지.

    "칼은 오랜만인데. 그나저나 따로 움직인다고? 같이 안가고?"

    키이잉...

    고철선은 거대하지만 내부통로가 넓지는 않다.

    거태도와 기갑창을 내려놓고 청홍쌍갑 위로 에너지소드를 움켜쥔 카티가 들어가기전 강태석을 바라보았다.

    페리트란은 배 내부의 질서유지를 위해 안쪽에.

    아린은 혹시 모를 무력도발에 대응하기 위해 센티널을 타고 배 갑판에.

    실질적으로 들어가 각 쉘터를 이끄는건 카티와 자율기동모드로 바꾼 바디슈트를 끌고 들어가는 군파츠정도.

    거기에 들어가 흩어져 움직일거라고 생각하니 전력하나가 아쉽다.

    하지만 그런 카티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이 고철선은 정말, 정말로 거대하다.

    높이 150m에 폭 400m.

    길이는 더욱 어마어마해 거진 1km.

    선박으로 쳐도 이는 숫제 고래수준.

    그리고 이제부터 자신들은 기계벌레들의 코어를 삼키며 너른 은빛대양을 돌아다니는, 이 육중한 고래로부터 최대한 많은것을 얻어내야한다.

    최대 여덟시간동안, 배 구석구석으로 흩어져서 말이다.

    길게 체류하려면 질질 끌수야 있겠지만 앞서 움직이는 <델타>같은 녀석들이 휩쓸고 간 폐허의 망망대해를 물자가 떨어질때까지 항해하고 싶지 않다면 자신들도 빠르게 움직여야할터.

    “조금 있다 갑판에서 뵙지요.”

    잠시후.

    쿠르르릉...

    사람들을 이끌고 배 안으로 향하는 카티와 군파츠들을 본 강태석은 숨을 고른후 금속철벽에 손을 박아넣으며 콰득콰득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

    육체의 명확한 한계.

    빠르게 움직일수 있어도 총알보다 빠르게 움직일수는 없고.

    아무리 힘이 강해졌어도 건물을 맨몸으로 들어올리는건 불가능하다.

    금속을 맨손가락으로 후벼파는것 역시 마찬가지.

    벽을 넘기전이라면 엄두도 낼수 없던 재주.

    하지만 벽을 넘은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키이이잉...

    손가락에 휘감긴 희미한 청색 기운, 검기를 보던 강태석이 그대로 금속외벽에 손끝을 박아넣으며 성큼성큼 고철선 위를 향했다.

    바다에 잠긴 배의 갑판에서 고철선 꼭대기까지의 높이, 대략 120m.

    건물로 치면 거진 30층도 훌쩍 넘는 높이.

    군파츠조차 맨몸으로는 매끄러운 금속의 외벽을 타고 이정도 높이를 오를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혼자 이 루트를 타고 오르는 것이기도 하고.

    이윽고.

    터엉...

    "후우."

    후우우우웅...

    정상에 오른 강태석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뒤쪽, 바다는 온통 안개에 휩싸여 여전히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앞쪽은 나름 잘 보였다.

    마찬가지로 은빛으로 칠해진 외장.

    색은 통일되었지만 덧붙여진 금속판들 크기가 제각기 다른탓에 마치 거대한 배 위에 컨테이너가 그득그득 들어찬것처럼 보였다.

    이또한 나름 장관.

    이제부터는 들어갈 곳을 찾아야한다.

    하지만 그이전에 해야할것.

    전직.

    지금까지야 어영부영 미뤄왔지만 이제는 아니다.

    뭔가 수상쩍은 곳에 들어갈땐 언제나 할수있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전직했으면 여유있었을것을 전직안했다고 고생하거나 치명상을 입는다면 이보다 더 억울할게 없다.

    "좋아. 일단 절부터 올리고."

    강태석이 허리춤을 매만져 과일, 배 하나를 꺼냈다.

    영양캡슐이나 보급식량에 비하면 보기힘든, 매우매우 귀한 물건.

    잠시후.

    후우웅...

    바다쪽을 향해 배를 올려둔 강태석이 넙죽 고개를 숙이며 바다의 신을 향해 대박을 기원했다.

    **

    고철선, 내부.

    쿠르르릉...

    "우욱... 그 여자 말이 맞았군."

    갈림길, 다른 쉘터들과 흩어져 가장 많은것이 있을것같은 방향으로 수하들을 이끌고 온 더그가 복도를 보며 역겹다는듯 손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불꺼진 실내.

    더그가 겨눈 레일건의 웨폰라이트 불빛에 따라 어두컴컴한 복도 내부의 광경이 비춘다.

    드러난건 시체, 시체, 시체, 시체.

    그야말로 썩어문드러진지 한참이나 된 시체와 피칠갑된 벽면이 그들의 시야를 그득 메웠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도 보는순간 눈살을 찌푸릴 정도.

    그때.

    저벅.

    "비교가 안되겠지요. 도시 하나를 이 좁다란 배에 우겨넣은 느낌이었을테니."

    그런 이들의 앞, 네일이 저벅 걸어가 벽면을 살피며 말했다.

    부르탄의 <포용정책>.

    잡아들이기도 귀찮은 하급 범죄자들.

    돈없고 생산력도 없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부르탄은 자신들 나라에서 나지 않는 필수자원의 거래를 트는 대가로 각국가 상층부들이 곤란해하던 이 모든 이들을 받아들였고.

    백국이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국가들을 상대로 연방통합 이전부터도 꾸준히 이런 거래를 해온결과 유례없는 인구수와 빈민도를 자랑하는 나라로 거듭났다.

    그리고 재앙시절, 그 많던 이들이 모조리 가리지않고 건조된 고철선들에 앞다투어 올라탔고.

    자신들로 치면 도시가 무너지며 죽어갔던 수십만들이 이런 배 하나하나에 올라타며 탈출하는데 성공한 것.

    어찌보면 일단은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고 할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은듯하다.

    거대한 공동묘지같았던 자신들 도시를 배의 형태로 바꿔놓으면 딱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으니.

    하지만 지금 그런 감상보다 더 중요한 것.

    '과연... <인간>들끼리만 싸우다가 이렇게 된걸까?'

    벽면.

    깊게 파인 수상쩍은 <무언가>의 발톱자국을 네일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매만졌다.

    **

    다시 고철선, 정상부.

    "후우. 좋아. 가자."

    <전직가능목록>

    >기계포식자

    >전마강갑지주.

    >여의지주.

    >배의 주인.

    >칠채영창지주.

    >벨페른의 후계.

    >블루블러디.

    >망국의주인.

    >번개관의 주인.

    한껏 기원을 끝마치고 상태창을 연 강태석이 마치 랜덤박스를 열듯 두근두근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