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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썩!
도시 외곽, 칠국연합소속 섬간 수송선.
타르늄 외장금속에 둘러쌓인, 말 그대로 딱 <배>의 역할만 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유조선 형태의 배가 은빛 바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지상을 오갈수는 없지만 바다 위에서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수준.
그런 배의 가장 높은 곳, 함교실.
"그대는 마슬룬에서 왔다고 했지?"
"아? 아 네! 마누트 여러분들은 일단 이동한뒤 저랑 같이 저희 나라로 가실거에요. 다른 가문 여러분들은 각자 선택한 나라로 가시게 될거구요."
창밖 도시 저너머, 붉은 기운이 뿜어져나오고 있는 한가운데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일곱가문의 가주중 한명이 묻자 그들을 데려온 소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질문한 고르그가 그런 소녀를 영 못미덥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배 아래 타고있을 자신의 딸보다도 어려보이는 아이.
하지만 못믿을수도 없다.
이 소녀가 자신들을 데리고 오며 걸리적거리던 기계병기들을 맨손으로 으깨버리는걸 눈앞에서 잘 보았으니까.
귀여운 외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살벌한 행위를, 더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와 함께.
"..."
쿠쿵...
쿠쿠쿵...
고개를 돌린 고르그는 도시 한가운데를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들이 살아온, 애증이 뒤섞인 공간.
이제는 온연한 죽음의 대지가 되어가는지 점차 하늘에서 몰려드는 검은 태풍과 대지에서 뿜어져나오는 적색기운들에 휩싸여간다.
그리고 동시에 더더욱 강렬해지는 섬 주변의 자연재해장벽.
기운이 강렬하게 부딪칠수록 섬주변의 풍랑도 거칠게 휘몰아친다!
콰르르르릉!
"어엇..."
몰아치는 은빛 격랑, 흔들려 출렁이는 배에서 균형을 잡는 이들을 보던 고르그가 마슬룬에서 왔다는 소녀를 보며 물었다.
"이대로라면 역시 출발은 무리겠지?"
"네 맞아요. 이 배는 그정도 출력은 아니니까요. 가운데 봉인이 풀리고 장벽이 밀려나면서 깨지면 그때 나갈수 있을거에요."
그런 소녀의 말에 잠시 턱을 매만지던 고르그가 다시 조용히 물었다.
"저들의 배는 어떤가? 저 배도 이 폭풍을 나갈수 없나?"
이에 잠시 고민하던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배는 나갈수 있어요. 우리 배와는 다르거든요."
그런 소녀의 말에 주변 가주들이 순간 멈칫하며 소녀와 고르그를 바라보았고.
고르그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마냥 알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지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
'만약... 봉인의 해제가 실패한다면 우린 모두 죽는다.'
고르그가 냉혹한 눈으로 저택쪽을 바라보았다.
만약 만의 하나, 무슨 일이 생겨 구덩이의 원형철문이 열리게 된다면?
그리고 배에서 내린 이들이 아래 있는 <제물>들을 모조리 구해간다면?
봉인의 해제는 실패.
바쳐질 피는 모자랄 것이고 아래에서 올라올 존재는 온전히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꼼짝없이 죽는다.
저 배는 유유히 생존자들을 태우고 탈출하겠지만 자신들은 이 깨지지 않은 폭풍의 장벽 속에서 꼼짝없이 갇혀 서쪽에서 밀려들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맞이해야만 할테니.
지금 이렇게 다 일이 이뤄진 것마냥 여유부릴 때가 아니라는 뜻.
이에 서로 눈빛을 교환한 일곱 가주들이 무언가 결심을 내리고 입을 열려던 그때.
"아이 참. 잠깐만요. 이쪽으로 오세요."
"?"
갑자기 창가에 선 자신들을 안으로 쭉쭉 잡아당기는 소녀의 행동에 가주들이 당황하면서도 끌려왔다.
소녀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이유가 없으니.
그리고 그렇게 안쪽으로 가주들을 몰아넣은 소녀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뾰로통하게 꾸짖었다.
"저기. 이제 나올래? 따라오는거 다 알고 있었다고. 내가 끝까지 모른척해주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면 어떻게 해."
이에 뒤에서 보던 가주들이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도시 한가운데가 보이는 창밖은 현재 건물로 치면 10층높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순간.
터어어어어엉!
"!!!!!!!!"
열린 창문으로 뛰어들어 선실 안에 들어온 무언가에 놀란 이들이 주춤 물러섰다.
등장한 이는 열일곱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
길쭉길쭉하게 쭉 뻗은 갸냘픈 팔다리가 인상적인 소녀가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가주를 셌다.
"하나... 둘... 셋... 일곱. 일곱 맞다."
"..."
"나. 크란. 너희. 다 잡... 잡..."
"잡아간다고?"
"그래. 맞다! 잡아간다. 잡아오라고 했다! 혹시 몰라서!"
어눌하게 말하다 손바닥을 짝짝 치며 좋아하는 소녀의 모습에 가주들이 서로를 바라보다 길게 콧김을 내뿜었다.
말도 제대로 못배운 녀석이 갑자기 등장해서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하지만...
"여러분. 일단 내려가주실래요? 말로 해보겠지만 안되면 여러분들까지 지킬 자신은 없어서요."
"...?"
선실입구를 등진채 가로막는 소녀의 말에 가주들이 멈칫했다.
**
중앙저택.
콰콰콰콰쾅...
카티와 무인, 기륜.
싸우던 그들의 입장에선 왼쪽에 위치하던 저택이 돌진한 배에 통째로 으깨어져 뭉개져나간다!
거대한 배와 커다란 저택이 충돌해 박살나는건 마치 재난영화속에서나 볼법한 장면.
그런 거대한 충돌의 옆.
이가 나간 거태도와 기갑창을 들고 상대와 대치중이던 카티가 기륜을 향해 툭던지듯 물었다 .
"저택이 박살났군. 신경안쓰이나보지?"
"그닥. 괜찮소이다. 보니까 그 치도 죽은것같진 않고."
후우우웅...
어느새 하늘높이 떠올라 서서히 내려앉고 있는 검은 점, 정장사내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듯 말하는 기륜의 모습에 카티가 숨을 후 내쉬었다.
좀 도발하듯 흔들어보려고 했는데 도통 틈이 없다.
금성철벽.
내외가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빈틈이 없는 상태.
생각같아서는 청홍쌍갑의 기능을 쓰고 싶지만 그럴수도 없다.
그걸 쓰려고 밸런스를 무너트리는순간 바로 저멀리 보이는 창끝이 사라지듯 나타나 자신의 머리통을 꿰뚫을테니까.
'가주 녀석들이 인질로 잡혀오면 좀 흔들리려나. 크란 그녀석에게 일단 부탁해놓긴 했는데.'
<좋은 아빠는 아니니까.>
아까전, 아린의 말을 떠올리며 카티가 쓰게 웃었다.
그 말대로.
좋은 아빠는 아니다.
더 나아가 좋은 어른도 아닌것같았다.
이제 갓 말배운, 정신연령은 그야말로 어린아이같은 녀석에게 그런 부탁을 하다니.
하지만 이내 카티의 눈이 가라앉았다.
말그대로 자신은 좋은 아빠, 좋은 어른은 아니지만.
좋은 대장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해내야만 했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가주들은 확실하게 판도를 우위로 이끌수있는 핵심인질들.
촤아아악...
"그렇게 여유부려도돼? 배가 다시 제속도를 찾은거보니 배에 탄 세명이 제 몫을 못한것같은데. 이대로라면 저택이 다 박살날걸. 그리고 아까 말안해서 그렇지 너희 배쪽으로도 내가 히든카드를 한장 보내놨다고."
빈틈을 보이듯 거태도와 기갑창을 내린 카티가 도발하듯 내뱉자 기륜이 어깨를 으쓱했다.
"죽지만 않으면 그만인거지. 쉽사리 죽을 작자들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 배쪽으로 따라붙던 친구라면 이미 알고 있소. 아까 저택위에서 보고 있었으니."
"... 농담이지?"
저택에서 그들 배까지가 몇키로미터였는데 암행하며 따라붙은 크란을 보았단 말인가.
그것도 누가 따라붙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카티의 말을 무시한 기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배로 간 친구라면 실패할 거요. 하필이면 그런 아인종을 보내서."
"...?"
"마슬룬의 신자들은 인류에게만 자비롭거든."
이해할수 없는 말을 하는 기륜을 바라보던 카티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자세를 다잡았다.
혹시나 빈틈을 보일까했는데 도무지 말을 하면서도 빈틈이 없다.
이대로 시간끌기보단 승부를 봐야할 때.
그때.
후욱...
다짜고짜 창을 거둬버리는 상대의 모습에 카티의 눈썹이 치솟아올랐다.
이어 나온 한마디.
"뭐하는거지?"
"물러서주겠다는거지. 저택을 부수건 말건 마음대로 하란 뜻이오."
"...?"
이해할수 없는 말.
그렇기에 겨눈 거태도를 풀지 않는 카티의 모습을 보며 기륜이 한숨을 푹 쉬었다.
"솔직히 무리하지 마시오. 당신은... 끝났잖소. 당신은 나를 이길수 없다는걸 알텐데."
"..."
"이미 성장이 멈춘 상대보다 더 흥미가 안가는 상대는 없지. 심지어 지금 나보다도 약하다면 더더욱."
하지만 그런 말에도 자세를 풀지 않는 카티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인 기륜이 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래. 사실대로 말하지. 나도 이제 도망가야한단 말이오."
"...?"
"인정하지. 당신들은 잘해냈어. 하지만 너무 잘해낸게 문제야."
콰콰콰콰쾅...!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연이어 질주해 저택들을 으깨버리는 거대한 배를 보며 기륜이 바라보았다.
무식하지만 저게 의식을 방해하는 법이 맞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제 모든게 끝장이다.
지금쯤 자신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가주들이 <스위치>를 누르기로 마음먹었을테니까.
원래 인간은 스스로가 위험할때 가장 잔혹해지는 법.
쿠구구구...
기륜이 저 멀리, 해안가에서 출렁이고 있는 그들의 배를 바라보았다.
**
칠국연합 배, 내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죽어어어어어어어!
"허억... 허억. 대체 왜 저런단 말이오! 눈이 돌아가서!"
허겁지겁 선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대피한 일곱가주중 한명이 위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란한 소음에 탄식을 토했다.
처음에는 별일없었다.
상대는 예민한 고양이같았지만 마슬룬에서 온 소녀는 그녀를 어떻게든 달래어 내려보내려고 했으니까.
아니, 처음 봤을때부터 소녀는 살생을 굉장히 꺼려했었으니 의아할것도 없는 상황.
호위로서 영 껄끄러웠던것도 그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를 인류애니 뭐니 하며 달래려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갑자기 눈이 돌아가 상대를 공격하기 시작한건 그직후.
"..."
"... 후우. 다들 정상이 없군."
제법 위쪽에서 벗어난 곳으로 도망쳐 한숨돌리는 이들속, 고르그는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갑자기 소녀가 폭주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
잠시후.
'설마 그건가? 샛노란 동공이 드러났을 때부터?'
기이하기 그지없는, 마치 인간보다는 파충류의 그것과 가까웠던 눈동자.
잠시 그때를 떠올리던 고르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게 그게 아니기에.
쿠쿵...
쿠쿠쿠쿵...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는 위층을 흘긋 바라보던 고르그는 주변, 여섯 가문의 가주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될거같습니다. <2단계>를 발동시킵시다."
"... ...."
"그건 너무 좀..."
고르그의 말에 모두가 껄끄럽다는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2단계는 너무한다는 의미.
그런 이들을 향해 고르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배에 우리 식솔들이 모두 타고있소. 여유부릴때가 아닙니다. 다들 스위치 꺼내요."
그러며 주머니에서 꺼낸 고르그의 손에는 작은 목걸이 하나가 들려있었다.
특징이라면 한가운데 특이하게 생긴 영롱한 보석이 박혀있었다는것.
그런 고르그의 행동에.
"..."
"....."
잠시 고민하던 나머지 여섯가문의 가주들이 이내 가라앉은 눈으로 각자의 목, 혹은 주머니에서 작은 목걸이나 열쇠들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