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69화 (69/221)

69

콰르르릉...

지상.

콰콰콰쾅!

이제는 다시 닫혀버린 구덩이 위에 서있던 정장사내가 섬의 외곽, 상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하늘에서 몰려온 번개구름이 본격적으로 도시를 삼키며 사악한 기운과 빗방울들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에 뒤덮인 것같은 도시.

이 도시 전체가 서쪽에서 밀려드는 사악한 존재의 영향권에 들어섰다는 의미.

하지만 아래, 바닥을 뒤덮은 문자들의 색이 진해지고 뿜어져나오는 흉험한 기운이 강해질수록 좀더 다른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먹물과 핏물이 부딪치듯.

몰려든 검은 구름과 도시 중심에서 뿜어져나온 적색 기운이 부딪치며 힘겨루기를 벌인다.

단순한 기운과 기운의 충돌인데도 주변 대기의 변화를 불러올 정도.

콰르르르르르릉!

검은 기운과 적색 기운이 충돌하는 섬 주변을 따라 거대한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들이 더욱 강렬해지고 은빛 나노머신의 바다가 출렁인다.

섬은 마치 태풍의 눈마냥 좀더 고요해졌지만 섬을 둘러싼 외벽은 더욱 더 격렬한 변화에 휩싸인것.

대자연과 뒤틀린 마력들이 만들어낸 원형의 장벽.

이제는 그 누구도 이 섬을 들어올수도, 나갈수도 없다!

그런 정장 사내를 향해 아타나엘이 걱정스럽다는 눈초리로 물었다.

"우리가 이 섬을 나갈수 있는건가요?"

"걱정 마십시오. 이건 오히려 좋은 징조니까."

정장 사내가 보란듯 뒤쪽, 여유롭게 서서 주변을 관망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인재들을 가리켰다.

솔직히 지금 벌어지는 현상들은 인외의 것들.

서쪽의 무언가가 완전히 다가와도, 아래의 무언가가 완전히 기어나와도 자신들은 죽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이 이렇게 여유부릴수 있는 이유.

봉인이 완전히 풀리게되면 이 장벽은 되려 약해질 것이기 때문.

아래 존재가 완전히 풀려나면 당장은 그 존재의 영향력이 강해지며 사방, 검은 기운을 몰아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장벽은 풀리고 빠져나갈수 있는 길이 열릴터.

물론 여전히 거칠긴 하겠지만 그정도면 자신들이 가져온 대형수송선이 떠나기엔 충분한 수준이다.

"아래가 다 끝나면 그때 나갈겁니다. 그전까지 여유롭게 계시지요. 미리 떠난 군대와 가솔들은 먼저 배에 탑승하고있을테니."

...아악!

...죽여!

두터운 철판아래, 아스라히 들려오는 비명성들.

이 소리가 잦아들면 그때가 그들도 떠날 시간.

이에 아타나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쿠궁...

쿠쿠쿠궁...!

"?"

남쪽, 번개구름장벽 너머로 들려오는 뭔가 다른 느낌의 소리에 아타나엘의 시선이 해안선으로 향했다.

**

도시, 남쪽.

콰르르르릉...

섬으로 치면 해안선에 해당하는 부분.

은빛의 나노머신 바다가 도시를 코앞까지 집어삼킨 경계까지 도달한 소녀가 절망어린 눈으로 온 도시를 감싼 폭풍을 바라보았다.

콰르르르릉!

콰릉!

붉고 검은 기류들이 부딪치며 은빛 바다에 격랑을 일으킨다.

번개구름과 폭풍이 휘몰아치며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회색빛의 거대한 먼지구름벽을 허공에 만들어낸다.

마치 토네이도가 온 도시를 감싸고 있는것같은 모양새.

이곳으로 혼자 오기는 했다만 뭘 어쩐단 말인가.

치직...

"야! 노예야! 들려! 노예야! 뭐 어쩌런 거야!"

소녀가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기계를 통해 버럭버럭 소리쳐보았지만 응답이 없다.

폭탄목걸이와 세트인 무전기.

노예에게 원거리에서 명령을 내리고 응답받는 용도이지만 지금은 묵묵부답일뿐.

콰르르릉...!

휘몰아치는 번개구름, 마모되어가는 도시를 소녀가 검게 죽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희망이 무너진듯하다.

도시 한가운데, 안전지대에서는 소름끼치는 기운이 시시각각 더 강하게 뿜어져나오고 해안선은 자연이 만든 장벽으로 가로막혔다.

언젠가는 포인트를 모아 섬을 떠날수있을거라 생각했거늘 마지막, 두눈앞을 그득 메운 것이 이런 절망적인 광경이라니.

"하하. 그래. 말도 안돼. 옆 섬으로 갈수있다는것도 다 거짓말이었겠지. 이걸 인간이 어떻게 건넌다고."

거력이 휘몰아치는 자연재해.

인간은 그속에서 너무나 미약하기만 하다.

털썩 주저앉은 소녀가 멍하니 해안선과 폭풍을 바라보던 그때.

쿠쿵...

쿠쿠쿠쿠쿵....

"...?"

갑자기 검은 구름장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수상쩍은 소리에 소녀의 눈이 꿈뻑였다.

천둥번개소리같지만 무언가 다르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귀청이 떨어질것같은 소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무언가.

그 소리는 지금 휘몰아치는 천둥번개소리들에 의하면 너무나 작고 미약했지만... 서서히 그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었다.

도시를 휘감은 폭풍의 장막을 뚫고.

점점 더, 착실히 가까워지며!

쿠르르르르릉...

쿠구구구궁!

어느새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천둥번개소리와 그 너머의 육중한 굉음이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해진 그순간.

쿠구구구구구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아... 아아아..."

해안선에 앉아있던 소녀가 작게 신음성을 터트렸다.

절대 뚫을수없을것같던 폭풍이 거칠게 흩어진다.

그 속에서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은빛 철벽이 구름을 가르며 그 위압감을 뽐낸다.

그리고 떠오르는, 자신을 향해 건네졌던 사내의 마지막 한마디.

<기다려라. 온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왔다... 왔어."

길이 450m, 55만 7000톤.

대자연을 홀홀단신으로 가르며 도시로 들이닥친 거대한 배의 선두를 보며 소녀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

안전지대, 저택 앞.

쿠르르르르릉...!

"뭔...?!"

모여있던 일곱 국가의 인재들이 남쪽바다의 태풍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눈에 봐도 <대륙간 항해용>으로 설계된 고등급의 배.

은빛의 유려한 동체, 이를 감싼 은은한 푸른 빛이 이를 증명한다.

저건 자신들 국가에서도 운용하지 못하는 것들.

대체 저게 왜 이런 촌동네에 갑자기 나타났단 말인가!

"설마... <혁명단> 놈들?"

"말도 안돼. 여기는 활동권역 밖인데?"

"그렇다면 누가... <연방>은 아닐것 아닙니까."

모인 일곱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하늘 위에 하늘 있다고.

자신들 나라가 먹어주기는 하지만 저 멀리, 아직도 활동을 하고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연방>이나 그런 연방과 맞서싸우는 <혁명단>과는 여전히 부담스러운 상대다.

그 아래, <귀족>들이나 <핵심도시>들 역시 어려운건 마찬가지고.

한데 그런 녀석들의 유산으로 보이는 것들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조요오오오오옹!"

콰아아아앙!

강하게 발을 구른 일월국 청년의 말에 소란떨던 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고.

그런 이들을 향해 청년이 이죽였다.

"잘봐라. 표식이 없잖아."

"..."

그 말에 가늘게 눈을 뜬 여섯 남녀가 배를 청년의 시선을 따라 배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만만한 곳에서는 <쓸데없는 학살>을 피하기위해 알아서 기라고 대문짝만하게 표식을 걸고 다니는 녀석들의 상징이 없다.

연방이라면 특유의 일곱마리 환수모양.

혁명단이라면 검게 물든 흑룡의 상.

귀족가라면 대문짝만하게 걸어놓는, 그리고 죽기 싫으면 반드시 외워둬야하는 각 가문들의 문양.

하지만 배의 그 어디에도 그런 표식들이 없다.

이어 청년이 룬의 정장사내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너희. 뭐 관측한거 있었어? 저런게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확실히... 그런 적은 없었지요. 연락온것도 없고."

정장사내가 중얼거렸다.

자신들, 천공국의 정보력은 독보제일.

<하늘>에서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을 온전히 피하는건 연방이나 혁명단이라고 해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저렇게 커다란 덩어리라면 더더욱!

고민에 빠진 이들을 향해 청년이 덤덤히 말했다.

"호들갑떨거 없어. 변하는건 없다. 자리를 지켜. 우리는 일만 마치고 떠나면 그만이다."

이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도 그렇다.

마치 난파선처럼 태풍을 피해 잠시 이곳에 도착한건지 어떻게 아는가.

아니, 사실 저 배와 이 도시의 어울리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그게 더 가능성이 높다.

자신들과 굳이 충돌하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먼저 건드릴 필요는 없는 법.

쿠르르릉...

쿠릉...

점점 더 강해지는 천둥번개속, 자리에 선 이들이 고개를 돌려 뒤, 점점 더 커다란 진동과 흉험한 기운을 토해내고 있는 원형의 강철덮개를 바라보았다.

**

쩌어어어어억!

<... 방주, 오시리스가 통제영역에 들어왔습니다. 일부 권한을 이양받습니다.>

<... 방주, 오시리스가 통제영역에 들어왔습니다. 일부 권한을 이양받습니다.>

금빛 칼을 휘둘러 달려드는 짐승, 쿤츠를 쪼개버린 강태석이 눈앞에 떠오르는 창을 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희망의 끈이.

안에서는 절대로 벗어날수 없는 상황.

하지만 밖에서 도와준다면 이야기는 다른 법.

후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희망찬 소식과 함께 칼을 휘두르는 강태석의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칼날에 머금어진 마력들이 숫제 사나운 바람마냥 터져나오며 사방팔방에서 달려드는 짐승들을 쪼갠다!

물론 상황은 여전히 절대불리.

크아아아악...

크헉...

어느새 많은 이들이 줄어들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구석으로 몰렸다.

반면 그 자리를 메운 쿤츠들의 숫자는 줄어든 기미가 없다.

거기에 아래의 녀석은 지금도 착실히 올라오는중!

콰아아앙아아아아앙!

대체 이 원통형의 탑이 어디까지 깊이 파진건지 짐작조차 안가지만 다가오는 녀석의 기세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거리를 생각하면 대략 지하 30-40층까지 박살내고 올라온 느낌.

촤르르륵...

그 옆,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미친듯이 칼을 휘두르던 아니타가 강태석의 표정을 보고는 설마하며 물었다.

"후욱... 뭐야.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기대도 안한, 농에 가까운 한마디.

이미 아니타의 칼을 움직이고 있는건 희망이 아닌 관성이었기에.

그런 아니타를 향해.

"있지. 이제 불러보려고."

치직...

짧게 대답한 강태석이 자신의 목을 둘러싼 폭탄목걸이에 손을 가져다대며 중얼거렸다.

**

쿠르르르릉...

"... ...."

소녀가 자신의 코앞까지 밀고들어오는 거대한 배를 보며 희망에 그득찬 표정을 지었다.

태풍을 뚫고 나타난 거선.

누가 봐도 범상치 않다.

거기다가...

터어어어어엉!

터엉!

터어어어어어엉!

갑판 위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한 수십, 수백명의 남녀들을 본 소녀의 얼굴이 한층더 밝아졌다.

전신을 휘감은 강렬한 기도.

굳건하게 다물린 입술, 단단한 표정.

<오면 통신을 켜라. 남쪽에서 기다리면 알게될거니까.>

"맞다. 맞아."

정신을 차린 소녀가 호다닥 앞에 선 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뭔가를 아는듯했던 노예의 말.

갑자기 나타난 이들.

누가 봐도 이들은 자신의 노예를 구하러 온 이들이다!

'대박. 대박대박. 설마 내 노예가 얘들 대장이었던거 아냐? 그러면 내가 이녀석들 대장?'

"저기! 저기! 여기야! 여기!

소녀가 후다닥 달려가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아악! 진짜! 카트라아아아안! 이 망할 놈의 새끼가아아아아아! 이딴 곳으로 우릴 불러?!"

앞에 선 , 바닥을 발로 짓밟아 박살낸 장신 미녀의 쩌렁쩌렁한 포효에 소녀가 움찔하며 멈춰섰다.

**

일단 살고보자.

나좀 살려줘라.

…아좀 같이살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