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 말에 강태석이 빤히 군파츠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너 설마 대책없어?"
"무슨 소리야. 대책 있잖아."
"?"
그런 군파츠를 향해 강태석이 손가락을 들어 차례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자신.
그 앞에 선 군파츠.
그리고 그 뒤로 우르르 모인 쉘터 무장병들.
차례대로 이를 가리킨 강태석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뭐 날로 먹으려고 그랬어? 여차하면 싸워야할거 아냐. 다 굶어죽기 싫으면. 게임 보상받으려고 내려왔어?"
"..."
이에 갸름하게 눈을 뜨고 강태석을 바라보던 군파츠가 이내 툭하고 입을 열었다.
"야."
"?"
"너 우리 쉘터로 올 생각 없냐? 잘해줄게."
쿠르르르릉!
서서히 시동걸고 전파방해장치를 키며 어둠속으로 향할 준비를 하던 트럭과 무장병들 옆.
그 속에서 멀뚱히 서있던 강태석이 고개를 돌려 군파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들에게 오라고?
그런 강태석의 눈길에 군파츠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짠돌이같은 페리트란이랑 일하느니 우리랑 같이 하는게 낫지. 여자, 술, 일급병기. 말만 해. 너정도라면 특급대우라고."
이에 강태석이 대답안하고 빤히 바라보자 군파츠가 눈을 감고는 푸욱 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이 새끼야. 그냥 말해봤다. 너정도라면 페리트란 쉘터 내에서도 특급 대우겠지. 이쁜이들도 많더만. 꺼져 그냥."
쿠르르르르릉!
가자!
서서히 어둠속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한 덤프트럭들과 무장병들 무리.
손을 휘휘 내저은 군스트는 그대로 그들과 함께 섞여 앞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있던 강태석은...
"말해나보지. 잘 듣고 있었는데."
'아깝게시리.'
입맛을 다시던 강태석이 발을 떼어 앞으로 향했다.
사실 싸울수있을만한 상황은 아니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마력과 체력도 30% 정도만 회복된 상태.
하지만 어찌 되었건 움직여야한다.
위가 아린담당이라면 아래는 자신.
자신이 멀쩡해보여야 주변 녀석들도 허튼짓을 할수 없을테니까.
잠시후.
쿠르르르릉!
전파방해장치를 킨 무리들이 사슬과 덤프트럭을 이끈채 3km에 달하는 긴 터널을 서서히 나아갔다.
**
와아...
어마어마하군.
이게 다 물자라고?
튜브의 끝.
아니, 튜브가 끝이라고 보일 정도로 <벽>처럼 전면을 그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반원형의 표면을 보며 아래 선 이들이 감탄성을 토했다.
자신들이 끌고 온 덤프트럭만 해도 과장 좀 보태서 집채만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육중하고 거대하다.
한데 그런 덤프트럭 수십대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일 정도로 눈 앞에 자리잡은 물체, <캡슐>의 위용은 엄청났다.
"어지간한 유조선도 가져다 못대겠군. 이런걸 연방 시절에는 시속 1,000km로 쏘아 보냈단 말이야?"
퉁퉁.
양옆, 이제는 작동을 정지한 두툼한 자기부상레일을 발로 건드리던 군파츠가 눈앞의 벽을 보며 감탄성을 토했다.
흰빛의 금속표면으로 둘러쌓인, 어찌보면 알약처럼 생긴 이 커다란 동체 안이 모조리 물자로 가득 차있단다.
이미 나아갔던 선발대들이 확인한 사실.
이정도라면 정말 당분간은 한시름 놓다 못해 파티를 열어도 될 정도.
"으흐. 으하하하. 너희 정말 제법이잖아. 핵융합엔진도 모자라 이런것까지 꿍쳐놓고 있었다니."
탕탕!
기분이 좋아진 군파츠가 옆에 선 강태석의 어깨를 팡팡 치며 호쾌하게 웃었다.
어찌 기분이 안좋겠는가!
이정도면 핵융합엔진때보다도 더욱 즐겁다.
핵융합엔진으로 보장받은 안전이 2단계 욕구라면 먹고 마실것에 대한건 그보다 더 근원적인 1단계 욕구.
공업단지에 들어와 어느정도 발뻗고 자게된 이후로도 떨어져가는 물자에 숨이 답답했는데 눈앞의 벌크캡슐을 보니 이마저도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건 군파츠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와아... 이게 대체 어느정도야.
으하하!
철컥!
철커덕!
부르르르릉!
가져온 도르래의 두터운 쇠고리를 캡슐의 앞에 걸고 덤프트럭을 연결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걸 가져다가 지하에다가 두면 마치 방바닥 아래에 돈을 쌓아둔 느낌이 들것 같았기에.
그리고 그 고양감은 곧바로 그들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당겨!
부르르릉!
쿠르르르르르르릉!
수십대의 덤프트럭들이 시동을 걸자 요란한 엔진음이 터져나오며 레일 위에 내려앉아있는 캡슐을 당기기 시작했고.
콰르르륵!
콰르르륵!
그렇게 울려퍼진 시동음에 어둠너머 도르래들마저 작동하며 사람 몸통만큼 두꺼운 사슬을 팽팽하게 되감아댔다.
이윽고.
쿠르르르르릉...
"좋아. 움직인다."
서서히, 하지만 착실하게 가속을 붙여가며 움직이기 시작한 캡슐을 보며 군파츠가 허벅지를 탁 쳤다.
느려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움직이고 있는 동체가 워낙 거대하기에 생긴 현상.
대략 시속 20-25km 정도.
별일 없다면 10분 내에 3km를 주파할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던 그순간.
끼리리리릭...
끼리리릭...
튜브 전체.
철그럭거리는 쇠사슬소리와도, 캡슐아래의 비상용바퀴에 의한 마찰음과도 조금 다른 느낌의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퍼졌다.
육중한 쇳소리들에 비하면 워낙 작아 눈치채기도 힘들 수준의 소음.
하지만 이 소리가 들린 순간.
휘익.
강태석도, 군파츠도, 아래있던 모든 이들도 예외없이 고개를 획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캡슐 위, 튜브와 캡슐 사이의 아주 조그마한 틈새.
틈이 대략 3m 정도는 될까.
캡슐과 튜브의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도 좁은 틈새로 수십개의 눈을 가진 무언가가 빼꼼히 눈을 내밀고 아래를 끼릭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좁은 틈새에 어울리는 자그마한 덩치.
크기는 고작 2m 정도 될까.
수십개의 눈을 달고있는 커다란 머리, 그뒤로 여덟개의 다리를 달고있는 타원형 동체, 굴을 파기에 적합해보이는 여러개의 드릴촉수들.
그들이 보았던 센티널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고 약해보이는 외양.
하지만 이를 본 순간 아래 모여있던 수백명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센티널을 보았던 때, 그 이상으로.
이윽고.
"우아아... 아아아..."
"옵저버... <옵저버>다!!!!!!"
터져나온 사람들의 괴성을 반주삼듯.
키리리리릭...
키리리리리릭...
키이이이이잉!
이리저리 눈을 휘돌리는 옵저버 주변.
캡슐 틈새와 진공튜브 벽면 사방에서 불쾌하고 기괴한 수천개의 소음들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전쟁에서는 모든것이 맞물린다.
막으려는 자가 있으면 뚫으려는 자가 있고.
도망치려는 자가 있으면 쫓아가려는 자가 있고.
숨으려는 자가 있으면 기어이 보고 말려는 자가 있다.
그렇게 맞물리고 맞물리는 접점.
인류의 수많은 이들을 숨기고 구원했던 전파방해장치에도 대척점이 나타났다.
옵저버.
훨씬 더 강화된 센서와 다양한 감지기기들로 무장한 탐지전문기계.
직접적인 공격력은 없는 이 녀석의 기능은 하나다.
생체펄스로 감춰진 인류의 기척을 <직접> 카메라로 확인하고.
하나하나 죽일 대상을 지정해 주변의 기계들에게 전달하는 것.
비록 주변 기계들은 여전히 전파방해장치 속에서 사람들을 감지할수 없다지만...
투타타타타타타!
터엉!
콰드드드득!
"끄윽... 끄아아아아아악!"
어느새 지옥같은 소음으로 뒤덮인 튜브속.
벽면을 두더지처럼 뚫고 땅에서 튀어나와 발목을 물어뜯은 스캐럽의 공격에 한 사내가 괴성을 내지르며 손의 에너지소드를 휘둘렀다.
이미 사방팔방이 덮쳐오는 기계군대 투성이!
쩌어어억!
"크흑..."
휘둘러진 칼은 순식간에 스캐럽을 두동강냈지만 사내는 절망섞인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지상으로 올라와 푸른 기계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각양각색의 기계병기들을.
키잉...
키이이잉...
사방에서 비치는 수십개의 푸른 구슬에 사내의 전신이 내비춰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녀석들이 직접 자신을 보고있는게 아니다.
자신을 보고있는건 저 위에서 사방팔방 눈을 휘돌리고 있는 <옵저버>.
키이이잉...
서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계병기들에 사내가 저도모르게 눈을 감을뻔한 그때.
콰드드드드득!
콰드드득!
번개처럼 뛰어든 두 물체가 허공에 길쭉하게 검고 흰 선을 그려내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기계를 박살냈다.
그리고 들려오는 우렁찬 고함성.
"이 등신이! 뭐하고 있어! 다리 망가졌으면 트럭지켜! 타서 칼 휘두르라고!"
검은 선을 그려내며 폭풍처럼 등장한 군파츠의 외침에 침을 꿀꺽 삼킨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절뚝이며 저 멀리, 장수풍뎅이마냥 이 난리속에서도 우르릉 기어나가고 있는 트럭들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그런 옆.
치이잉...
군파츠의 옆에서 조용히 칼, 리벨리온을 내려놓은 강태석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투가 시작한지 3분.
이곳에 모인 이들도 모두 나름 정예였기에 수백대를 훌쩍 넘는 기계병기들이 모조리 고철이 되어 바닥에 나뒹군채 이동하는 덤프트럭과 캡슐에 깔려 우그러들고 있었다.
하지만 나타나는 놈들의 숫자가 그야말로 끝도 없다.
마치 사탕에 달려드는 개미떼마냥, 벌집에서 쏟아져나오는 벌마냥.
천장, 바닥, 벽면.
가리지않고 끊임없이 비집으며 쏟아져나오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호러 그자체.
심지어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안했다.
콰두두두두두....
"으아아아악! <비틀>이다!"
땅을 헤집고 올라오며 덤프트럭을 들썩들썩 뒤엎어 던져버리는, 크기 6m의 커다란 은빛 기계에 주변이들이 다급한 음성을 토했다.
비틀.
레벨 9짜리 기갑병종.
움직임은 느리지만 단단한데다 자신보다 덩치큰건 모조리 물어뜯으려고 해서 가만히 놔두면 중장비고 트럭이고 쉘터고 모조리 박살이 난다.
저게 나타난다는건 이제 슬슬 고레벨 기계병기들도 몰려온다는 소리!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콰지지지직!
번개처럼 나타난 둘이 비틀을 후려쳤다!
강태석은 정수리 위 틈새에 정확히 리벨리온을, 군파츠는 그런 리벨리온의 솟은 손잡이를 향해 강렬한 내려찍기를.
콰드드드득!
순식간에 나타나 마치 대못을 박은것처럼 비틀의 대가리를 땅에 박아버린 강태석과 군파츠가 내려앉아 주변을 살폈다.
이어지는 군파츠의 거친 숨결섞인 한마디.
"후우. 야. 적마인. 지금 네가 준비한 <우리>라는 대처방안 가지고는 조금 힘들거같거든? 빨리 변신하는게 어때. 네가 고담시 배트맨인건 감춰줄테니까 말이야."
주변을 둘러본 군파츠의 정확한 판단이었다.
현재 전진한 거리 1.2km, 남은 거리 1.8km.
아직 사망자는 별로 없지만 부상자들은 상당히 쌓인 상태에 무엇보다 공격이 점점 더 거세진다.
온기간보다 더 많은 거리를, 더 부족한 병력으로 더 많고 강한 상대들을 뚫고 가야하는 상황!
이대로 가면 캡슐을 밀어넣기도 전에 다 죽게 생겼다.
'그걸 써야하나?'
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는 군파츠의 옆, 이를 듣던 강태석이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마가 낀 느낌이다.
재수도 없지 어떻게 옵저버가 딱 이렇게.
아니,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기계병기 놈들은 어쩌면 커다랗고 달콤한 사탕과도 같을 이 캡슐을 위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인류라는 개미들이 꼬여들면 그즉시 통째로 짓밟아 죽여버리기 위해 말이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한다는것.
"야 너 설마 그거 변신..."
"조용해봐. 이제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니."
군파츠를 지나친 강태석이 바닥에 떨어진, 주인잃은 무기들을 텅텅 차올려 몸에 매달기 시작했다.
에너지소드, 전격창, 태도.
심지어 망가진 스캐럽까지.
순식간에 온몸에 주렁주렁 무기들을 매단 강태석이 심호흡을 한뒤 짧게 말했다.
"엄호 부탁한다."
이를 마지막으로.
터어어어어어엉!
땅바닥을 박찬 강태석이 벽면을 따라 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저 위쪽, 관조하듯 모든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옵저버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