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강태석이 지금 천막에 이렇게 누워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정말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간신히 복구한 전투강갑을 3단계까지 끌어다쓴것도 모자라 혈교의 금지된 비술인 <혈루마공>까지 사용했다.
자신의 수준이 모자라 중간에 해제되어 살았던 것이지 제대로 쓰면 사용자의 목숨을 대가로 전장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수있는 비기.
당연하지만 살았다고 하여 멀쩡한건 아니었다.
바닥까지 고갈된 체력, 만신창이 육체.
예전에는 설계도때문에 급해서 상태가 안좋아도 움직여야했지만, 그리고 움직일수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로 당분간 못움직인다.
그래도 이제 배는 계획대로 지하에서 착실히 만들어져갈거라는게 다행이라면 다행.
'그래서 오랜만에 푹 누워쉬려고 했는데.'
모포를 덮은채 누워있던 강태석이 옆 침대에 쪼르륵 앉아있는 네 여인을 바라보았다.
좀 쉬려고 했는데 왜 여기와서 죽치고 있는단 말인가.
하지만 강태석은 한다면 하는 남자.
할말은 한다.
"정중하게 말할게. 다들 나가줄래?"
"꺼져달란거네."
"... 아니. 그정도는 아니고."
아너스빌의 퉁명스런 대답에 입을 다문 강태석이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왜 여기 다들 모여있는거야."
"음..."
"으음..."
"큼."
카릉....
아린과 달리안, 그리고 크란과 아너스빌.
각자가 고민하는것이 이유가 다른듯하다.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던 이들중 아린이 먼저 강태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나는 밖이 너무 시끄러워서?"
"?"
"여기가 조용하더라고."
이해할수 없는 말에 강태석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
바깥, 페리트란 구역 심부.
무기관리창고 및 임시훈련구역.
키이이잉...
터어어엉...
"아린 빼고는 제대로 다룰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서는건 그나마 되지만... 조준은 어림도 없습니다. 팔을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요. 우욱... "
터엉...
금속대지 위, 기동을 멈춘 센티널에서 내려 구역질을 하는 사내의 모습에 페리트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혹시 쓸수있는 사람 있으면 연습해봐. 같이 쓸수있으면 좋을텐데.>
아린이 이걸 가져와 마지막에 건넨 말과 마지막에 보여준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여덟개의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것도 모자라 끝에 달린 금속촉수를 움직여 화기를 하나하나 다른 목표로 겨누는 신기까지.
물론 아직 모든 금속촉수를 다룰수 있는것도 아니고 손으로 직접 다룰때만큼의 명중률이 나오는것도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 걷는것조차 머리가 터져하려하는걸 생각하면 비할바가 아니다.
심지어 다룬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는걸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
"아린에게만 부담지울순 없지. 대충 다룰수있는 연습이라도 해봐."
"후우.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부탁하지."
영 자신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내를 향해 페리트란이 말했다.
대충만이라도 다룰수있으면 된다.
저 병기가 한면에 쏟아부을 수 있는 화력의 양을 생각하면 그렇게 정교할 필요조차 없으니.
구스트 때처럼 그냥 얼추 방향만 잡고 쏴버리면 모조리 갈려나갈 터.
팔다리를 제대로 움직일수만 있어도 압도적인 전력이 되어줄것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골치아프군. 사람이 모이니까 바람잘날이 없어."
퍼억...
이 새끼가 진짜!
이 심부까지도 들려오는 고성과 난투음에 페리트란이 이마를 집었다.
**
<바깥 구경좀 할래? 안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 누워있는다고 빨리 낫는것도 아니고. 나는 잠깐 어디 다녀오게.>
아린의 제안.
맞는 말이다.
결국 마력과 체력의 고갈은 시간이 해결해주는법.
강태석은 이를 받아들여 천막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뒤, 새끼오리처럼 종종 따라붙은 넷을 데리고.
아린은 그렇다쳐도 다른 셋은 따라붙은걸 보니...
"너희. 놀아줄 사람이 없구나."
"..."
"..."
아아?
농담삼아 건넸는데 침묵이 감돈다.
되려 민망해진 강태석이 정곡을 찔린듯 말을 안하는 달리안과 아너스빌, 그리고 뭐가 뭔지 마냥 천진난만하게 따라붙고있는 크란을 바라보았다.
하긴 강태석 자신을 포함, 아린을 제외하고 넷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외부인이라는 것.
페리트란과 아린이 자신의 얼굴을 봐서, 그리고 위험해보이지 않아 들인 것이지 다른 쉘터민들은 여전히 껄끄럽게 여길것이다.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테고 말이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덤덤하게 넘겨버린 강태석이 떵떵거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공업단지 사이를 걸었다.
쭉쭉 올라가는 조립식 건물들.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이미 제 3공업단지는 제법 도시처럼 변해가는 중이었다.
애초에 넓은 대지였는데다 도시의 구석구석을 위해 준비되어있던 자재들도 넘쳐났고 자동화 건설장비들도 많았다.
거기에 단번에 우르르 몰려든 사람, 물자들까지.
물론 대부분의 쉘터가 서로를 경계하여 널찍하게 거리를 두고 자리잡았지만 이번에 들어온 피난민들은 보호와 관리의 편의를 위해 이렇게 중앙부분에 조립식 건축물들을 모아짓고 이곳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보던 강태석은 몇가지 생각을 더 하고 있었고.
'시간이 맞을까?'
강태석이 지금쯤 열심히 건조되고 있을 배를 떠올렸다.
필요한 시간, 대략 1주일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 자신들이 선곳이 문제.
멸망해가는 도시, 모여든 군중들로 격동하는 공업단지.
1주는 무슨 일이 생기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다.
사실 1주 사이에 배의 작업이 안들키길 바라는것도 지나치게 희망적인 관측.
덧대어진 철판벽들이야 예전, 도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생존자들의 발버둥 정도로 취급될테니 어색할건 없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금 더 당길수 있으면 좋을텐데. 일정을."
저벅.
어느덧 웅성이는 사람들속, 조립식건물사이 시장처럼 만들어진 거리를 걸으며 중얼거리던 강태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기계장비들을 다루는건 직업, 테크니컬의 영역.
그리고 테크니컬은 기계사냥꾼이나 화기전문가보다 훨씬 더 희소하다.
세상이 개판이니만큼 죽기 싫으면 칼들고 기계와, 총들고 사람과 싸워야한다지만 기계를 다루는건 아니니 말이다.
정비나 수리정도야 생존자들도 하겠지만 기계 자체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테크니컬은 그보다 한단계 위의 영역.
사실 도시에 수천명에 가까운 생존자이 모여들었다지만 강태석은 기대 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키이이잉...
키이잉...
"어어? 아가씨 그거 어떻게 한거야?"
"... 대단하네. 어떻게 한거지?"
뒤쪽에서 들려온 어떤 사내와 아너스빌의 경탄사.
이에 고개돌린 강태석이 가판에 올려져있는 기계장난감의 손을 붙잡고있는 달리안을 바라보았다.
키이이잉...
키이잉...
조잡스럽게 만들어져있는, 그렇기에 조잡스럽게 움직여야할 크기 30cm 정도의 기계장치 장난감인형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자유분방하게, 유려한 몸짓으로.
이를 가판에 올려놓은 장난감 로봇의 주인마저 감탄할 정도.
"이거 사줄까?"
아아!
기계인형의 작은 손을 붙잡고있던 달리안과 좋아하던 크란을 지켜보던 강태석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
배 건조구역, 지하.
키이이이잉...
한 보행중장비에 달리안이 손을 올린채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키이이이이...
키이이잉...
키이이이이이잉...
"무슨??"
"천천히... 천천히 좀! 따라가기 힘들어!"
주변, 작업중이던 수십대의 보행중장비 위에 따라가고 있던 이들이 비명성을 내질렀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회전하며 제멋대로 움직이는 팔들.
거미처럼 벽면을 타고올라 진행되는 작업.
사람이 그저 자신의 두손을 움직이듯 다루던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게 수십대에서 동시에.
이를 옆에서 보고있던, 보행중장비를 달리안에게 빌려준 여인이 입을 벌린채 중얼거렸다.
"정말 <기계>답게 움직이네..."
이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원래 기계는 기계답게 움직여야한다.
360도 돌아가는 관절과 압도적인 파워, 나노초 단위로 반응하는 회로를 가진 기계들이 <인간>답게 움직이여봤자 그야말로 자원낭비, 시간낭비.
그리고 실제로도 예전, 연방의 모든 장비들은 그런 방식으로 움직였지만 지금 현시대에 작동하는, 보행중장비를 비롯한 모든 기계장비들은 모조리 인간이 탑승해야만 작동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왜?
기계병기들의 침공.
이어진 <마더>의 침식에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기계들은 모조리 그 통제권을 빼앗겼으니까.
믿기 힘든 효율로 작동하던 연방과 센트라의 반자동 기계군들은 믿기 힘든 효율을 보이며 인간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게 현재 모든 기계장비들이 <인간>이 탑승해야만 작동하게 뒤바뀐 이유.
팔다리를 잘라내는듯한 비효율 극치의 금제지만 이게 없으면 그야말로 재앙이 일어나기에.
그리고 <테크니컬>들은 그예전, 기계들의 봉인된 원래 성능을 그대로 끌어낼수 있는 인간.
사실 말이 테크니컬이지 거의 초능력자에 가깝다.
그게 주변에 있는 이들이 기겁하는 이유.
자신들이 설계도와 반자동 메뉴얼에 따라 조정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로 작업이 진행된다.
키이이잉...
"우린 그냥 장비에 꽃는 열쇠정도겠는데."
수십대의 드로이드들에 의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작업을 보며 여인이 자조섞인 표정으로 웃었다.
말 그대로.
달리안이라는 여인이 손을 댄 순간부터 작업은 그냥 그녀 혼자서 다 해내고 있었다.
보행중장비 콕핏에 앉아있는 자신들은 그저 인간탑승작동제한을 위한 열쇠 정도에 불과할뿐.
하지만 이내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은게 좋은거지. 안그래? 작업 빨라지면 좋지."
"맞습니다. 그리고 열쇠가 제일 중요하니까."
"... 넌 위로에 정말 재능없구나. 그냥 내 기분은 알아서 잘 챙길게. 마음은 고마워."
"..."
혀를 차는 여인의 말에 입을 다문 강태석은 이내 달리안을 보며 말했다.
"할만해?"
"그럼요. 제가 할일이 생겨서 기쁘네요."
이마에 송골송골 땀을 흘리면서도 웃으며 대답하는 달리안의 모습에 강태석이 숨을 내쉬었다.
말마따나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선택받았다고 해도 수십대의 기계를 모두 다뤄 작업하는건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건 크게 한숨돌린것도 사실.
<현재 작업시간... 계산중.>
<58시간... 48시간 39초... 50시간 30초...>
미친듯이 변동하고 있는 숫자.
정확한 숫자가 나오지 않는것은 이 모든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달리안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강태석의 어깨를 옆에 서있던 여인이 툭 쳤다.
"이 친구는 우리가 알아서 잘 챙길테니까 가서 볼일봐. 힘들어보이면 쉬게 할테니까."
"..."
"뭐해 어서. 우리가 뭐 이친구만 고생시킬줄 알았어? 이친구 쉬는 동안은 우리가 열일 할 거라고. 감히 우리 일을 하루아침에 몽땅 뺏어가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야. 노동법 무서운줄 모르고 말이야."
씨익 웃는 여인의 말에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마주웃었다.
**
저벅.
지하통로로 나온 강태석은 생각했다.
몸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움직일 수야 있다.
그리고 작업속도가 빨라지니 덩달아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쉬는건 자신의 적성에 영 들어맞는건 아니었으니까.
아니, 사실 쉬는건 좋아하긴 하지만 뭔가 마음이 찝찝한 상태로 쉬는걸 좋아하진 않는다.
"... 배만 완성되면 시설의 호화로움을 한껏 즐겨주마."
하지만 일단은 할일 먼저.
귀족을 위한 배, 오시리스의 완성된 미래를 떠올리며 중얼거린 강태석이 손에 들린 리벨리온을 빙글 휘저으며 지하수로를 걸었다.
무엇을 해야할까?
강태석이 생각을 집중하려던 순간.
저벅.
"크하. 어딜 그리 열심히 다녀오시나."
"으하하하."
수로에서 걸어나오는 십수명의 무장사내의 등장에 강태석의 입꼬리가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