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9화 (19/221)
  • 19화

    "..."

    "아니 아저씨 양심 무엇. 어떻게 꽃다운 분이랑 본인을 비교해."

    "나도 스물여섯인데."

    투닥거리는 둘을 보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던 여인, 아너스빌은 꽃답다는 말에 얼굴의 커다란 상처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자신이 대체 왜 이꼴이 되었는지.

    1년전, 대화를 하면 잘 풀어나갈수 있을거라며 올림포스 주민들의 비웃음을 무시하고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심했을때?

    그건 괜찮았다.

    자신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고 플랜트의 물자를 잘 분배한다면 탑 전체와 올림포스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상생할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모든게 틀어진건 그다음.

    대화를 위해 내려간 자신의 앞에 한 <사내>와 일련의 무리들.

    그들은 아무말도 없이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을 하듯.

    자신을 짐승취급하며.

    사방에서 화기를 쏴갈기고 몰아붙이며.

    손에 든 기묘한 병기와 창들로 자신을 후려치며.

    그때의 공포.

    그때의 상처.

    잊혀지지 않는 기억.

    지금도 두가지는 모두 자신의 몸에 깊게 남아있다.

    평생 훈련이라곤 받아본적도 없는, 그리고 받을일도 없어야했던 자신이 지난 1년간 몸을 단련하고 강해지려 한것도 그것때문.

    남들은 힘들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쉬웠던 탓에 기분전환도 되고 감정도 어느정도 치유되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잘못된 거였을까?'

    저벅.

    상처를 아로만지던 손을 내린 아너스빌이 긴 숨을 내뱉었다.

    자신의 생각은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의 달달한 이상이었을까?

    자신의 동료들이 복수를 빙자해 아래를 쓸어버린건 정당했는가?

    정작 그 모든 일을 벌이고 탈출한 사내는 지금 어디있지?

    올림포스가 무너진 지금, 동료들을 남겨놓고 자신만 용서받아 빠져나와도 괜찮았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아너스빌이 옆을 바라보았다.

    굵은 선의 이목구비에 커다란 체형.

    카트란.

    어느날 나타나 단번에 세피로트 타워에 존재하던 천국과 지옥을 무너트린 자.

    '혹시 이 남자는 답을 알까?'

    입술을 달싹거리던 아너스빌이 이내 결심하고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던 그때.

    "혹시 사연얘기하면서 이런저런 말할거면 난 안들을거다. 내가 대답해줄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조용히 가자."

    "..."

    이에 아너스빌이 눈을 감았다.

    방금전의 대답으로 한가지는 알게 되었기에.

    자신은 이 사내와 친해질일은 없을거라는 것을.

    '개**.'

    빠그덕.

    저도 모르게 발에 힘을 준 아너스빌이 속으로 오만가지 욕(1년전 사건이후 할줄알게 된)을 내뱉으며 걸었다.

    **

    후우우웅..

    폐허 사이를 걷던 강태석이 어느덧 가까워진, 두개의 탑처럼 높게 선 쌍둥이빌딩 폐허를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왔다는 뜻.

    왼쪽의 아린을 흘금 살핀 강태석이 오른쪽의 여인, 아너스빌을 향해 말했다.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이랑 잘 섞여지내면 될거야. 큰 문제 일으키지 않는다면 문제될건 없을거고."

    여인의 과거같은건 딱히 꺼내 문제삼지 않겠다는 의미.

    여인이 어떤 사연을 지녔건, 어떤 일에 휘말렸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건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당장 각자의 몫을 하며 살아남는 것.

    여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지금은 그게 서로에게 좋으며.

    그리고 아까전 여인의 실력으로 보니 그정도는 충분해보였다.

    '아까 그녀가 쓴건 <귀족> 의 혈계투술이었다.'

    혈계투술.

    개개인의 혈통과 재능, 특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기예.

    애초에 평범함을 상정하지 않았기에 귀족이 아니라면 익힐수조차 없다.

    그걸 본순간 강태석은 왜 1년전의 참상이 일어났는지 어렴풋이 짐작할수 있었다.

    올림포스의 생존자들이 아래의 생존자들을 말살시킨 건 스스로들의 권위가 침범당해서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오히려 반대.

    공포.

    ... 훗날 <귀족>들이 자신들 혈족에게 난 상처의 책임을 물어올까봐.

    그것도 재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

    "뭐지. 왜 그런 눈으로."

    "아냐."

    씁쓸한 눈으로 여인, 아너스빌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되었건 어떠리.

    어쨋건 중요한건 하나.

    일은 마무리되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라는것.

    하지만...

    "배를 만들 준비는 다 됐는데... 항구가 영 시끄러워보이네."

    쿠르르릉...

    폐허의 도시속.

    손의 USB를 바라보던 강태석이 땅에서 작게 느껴지는 진동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

    제 3 공업단지.

    폐허 3층.

    뻥뚫린 난간에 선 페리트란은 믿기 힘들정도로 변해가는 공업단지의 전경을 보며 벅찬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보행중장비들이 쿵쿵 걸어다니며 금속으로 강력한 방어쉘터와 거주공간을 설치한다.

    특대사이즈 전파방해장비가 작동하며 공업단지 전체를 뒤덮고 그 테두리로 무인터렛들이 웅웅거리고 회전하며 사람을 경계한다.

    무기고 안쪽에 먼지쌓아가며 처박아두긴 했었지만 평소엔 작동을 꿈도 꿀수 없었던 물건들.

    왜?

    간단하다.

    저런걸 작동시킬 정도의 연료와 에너지 여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하에서 건져올려낸 꿈의 물건때문.

    콰르르르릉...

    "대단하다. 진짜 대단한 물건이야."

    난간아래, 아래로 쭉쭉 내리뻗은 공업단지 깊숙한곳.

    기계플랫폼 위에 작동되어 은은한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는 직경 3m, 핵융합엔진을 보며 페리트란이 감탄성을 토했다.

    현재 지상의 수많은 장비들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음에도 저 빛의 은은함에는 변함이 없다.

    빛나는 섬광도, 요란한 진동도 없이 품격있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그 말은?

    지금 해내고있는 일정도쯤은 이 위대한 머신에게 있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거다.

    사람으로 치면 숨쉬듯 평온하게 해낼수있는 수준.

    그렇다면 이녀석이 전력을 발휘하게 되면 어떤것들이 가능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빨리 그 친구가 돌아왔으면 좋겠군."

    페리트란이 떠난 카트란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줄이야.

    단 며칠만에 지하에서 숨어살던 자신들을 끄집어내 지상에 자리잡게 만들어주었다.

    또 돌아온다면 무엇을 보여줄지가 이제 궁금해질 지경.

    하지만 페리트란의 표정이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호사다마.

    좋은 일만 있는건 아니었기에.

    갑자기 생겨난 풍족함.

    이는 수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이어진 결말.

    대이주.

    멸망속의 안전한곳을 찾아 절박하게 헤메던 모두에게 엔진이 불러온 번영이 마치 등대처럼 온도시를 비췄다.

    쿠르르르릉!

    쿠르릉!

    "... 제기랄."

    난간 위에 서있던 페리트란이 공업단지 너머, 폐허의 황무지를 바라보며 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도시 사방, 평소에는 보일 일도 없던 장갑차와 트럭들이 쿠릉쿠릉 소리를 내며 모여든다.

    위에 물자와 무기, 사람들을 가득가득 실은채로.

    그야말로 모든 <쉘터>들이 몰려들고있다.

    자신들의 총력을 실은채!

    실로 감당하기 힘든 숫자.

    "후우."

    투타타타...

    투타...

    방어경계쪽, 지금도 간헐적인 충돌을 의미하듯 울려퍼지는 총성을 듣던 페리트란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는 뒤 폐허 외곽을 향했다.

    **

    쿠르르르릉...

    쿠르르릉...

    "이게 뭔일이래."

    쌍둥이 폐허빌딩 7층.

    사방에서 들려오는 진동을 피해 위로 올라온 셋, 그중 아린이 도시 아래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말 그대로 난장판.

    몰려드는 수많은 장갑차와 트럭과 사람들.

    마치 난민마냥 도시 전체에서 공업단지를 향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수 없는일.

    그런 아린의 옆에 선 강태석이 아래를 보며 긴 숨을 내뱉었다.

    예상했던 일.

    애시당초 자신들이 우르르 이곳 공업단지로 몰려왔을 때부터 모두의 시선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제정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일이니까.

    거기에 구해진 핵융합엔진.

    문명의 작은 씨앗이 될수있을 정도로 강력한 물건.

    도시의 장비들은 모두 연료나 에너지 부족으로 사용할수 없었을뿐, 박살났던건 아니다.

    거기에 부족한 한가지 퍼즐이 딱 메워진 것이다.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녀석으로.

    '하지만... 생각보다 엄청 움직임이 빠르네. 배가 어느정도 완성될 때까지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강태석이 모여드는 이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모여드는 이들이 <아이고 우리도 모닥불 좀 같이 쐽시다. 이쁘게 봐서 한켠만 내주십쇼.> 이러고 웃으며 오는게 아니다.

    그럴거면 사절단을 보냈겠지.

    물자와 인력, 무장의 총동원.

    말 그대로 전력을 싸들고 짓쳐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물러날 곳이 없다고.

    네 안방이건 뭐건간에 다같이 죽기 싫으면 같이 좀 쓰자고.

    이제 도의적인건 집어치우고 공업단지의 모든 자재는 자신들 마음대로 쓸수가 없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올테니.

    이런 상황에서 지상에 대놓고 배를 만든다?

    와우.

    완성되고 나서는 둘째치고 완성이 가능할까 의문이다.

    잠시후.

    '배는 지하에 몰래 만들어야겠군.'

    <현재 퀘스트-아티팩트 : 방주 진행상황>

    >조건 1. 핵융합엔진 확보>성공... B등급.

    >조건 2. 설계도안 확보>성공... 등급확인 필요.

    >조건 3. 타르늄합금 확보>진행중... 54.7%.

    >조건 4. 최고 3.31 ver 이상 보행중장비 확보>49대확보... 추가확보 진행정지상태.

    >조건 5. 인력 확보>현재 42명... 추가확보 진행중...

    <조건 1, 2, 3, 4, 5가 부분적으로 충족되어 방주의 건설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단, 현재 방주를 건설하기 위한 환경이 지극히 불안정합니다.>

    <확보되었던 조건들이 강탈당하거나 부숴질수 있습니다. 유의하십시오.>

    눈앞에 떠오르는 창들에 강태석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

    제 3공업단지.

    가로세로 한 변만 해도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역.

    그 넓은 구역, 가장자리와 구석구석에 트럭과 장갑차들이 자리를 잡은채 전력으로 진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물자도, 연료도, 인력도 총동원.

    그야말로 공업단지 전체가 각 쉘터들의 집결지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

    당연하지만 그 속에서 마찰이 없을수가 없다.

    투타타타...

    퍼어어어어억!

    "꺼어억..."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대들어."

    퉤.

    총알을 모조리 튕겨낸뒤 덤벼들던 사내의 배를 걷어찬 거구의 사이보그 사내가 침을 퉤 뱉은뒤 자신의 전신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끼이익...

    끼리릭...

    예전 도시가 무너지기 직전 받았던 불법시술.

    전신 육체가 크게 강화되고 크롬틸 도금으로 어지간한 사격따위는 모조리 무시할수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수 있었던, 그리고 쉘터의 우두머리를 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가장 큰 문제는 이 육체를 운용하기 위한 연료였지만... 이제는 원없이 날뛸수 있을것처럼 보였다.

    히익...

    철푸덕.

    "야. 어떨거같아?"

    쓰러진 사내의 옆, 패닉에 빠진 여자를 어깨에 납치하듯 걸쳐맨 사이보그 사내의 뜻모를 질문에 옆에 서있던 사내가 웃었다.

    "뭐 페리트란 그놈이라고 별수 있겠습니까. 다죽기 싫으면 같이써야지."

    "크흐 그렇지? 샛님이던 자식이 많이 커가지고."

    사내의 말에 사이보그 사내가 기분좋게 마주웃던 그때.

    끼리릭…

    "아 오늘 무슨 날인가."

    "?"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삼대일은 좀힘든데."

    끼이익...

    저 멀리.

    수다를 떨다말고 폐허 사이를 지나 어딘가로 향하는 1남 2녀를 보며 사이보그사내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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