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청량한 푸른빛 파문이 강태석을 중심으로 터져나온순간.
퍼어어어어엉!
터어엉!
처박힌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강태석을 후려치려던 상대가 그자리에서 움찔 멈춰섰다.
하지만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일뿐.
"크하하하! 뭐하는거냐! 그따위 잔재주가 먹힐거같아?"
촤르르르륵!
잠깐 그 형체가 흔들렸을뿐, 순식간에 제자리를 잡아가는 갑옷을 보며 강태석이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스킬도 결국 사용자의 역량이 중요한것.
아무리 상성이 좋아도 레벨 5짜리 자신이 쓴 스킬이 레벨 10짜리, 15짜리 시술과 병기를 무력화시키는건 불가능하다.
자신의 EMP가 먹히는건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뿐.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한숨 자라."
"??"
이에 사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그때.
퍼어어어어억!
창밖에서 쏘아진 은빛 섬광이 그대로 출렁이며 메꿔지던 갑옷의 아주 미약한 빈틈사이, 사내의 경추 부분을 강타했다.
**
세피로트 타워밖, 1층.
"대체 뭐랑 싸우고 있는거야."
키이잉...
탄환은 쏘아보냈던 은빛원반을 회수한 아린이 헛숨을 토했다.
잽싸게 들어가서 데이터만 확보하고 나올줄 알았더니 저런 괴물같은거랑 싸우고 있다니.
대인살상용 탄환으로 정확히 경추부분을 타격하긴 했지만 죽지도 않았을터.
'하긴. 기절만 시켜놓으면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자신이 지금 좀 급하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이잉...
"아우 바빠."
풀려버린 EMP 쉴드.
이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익숙한 스캐럽의 질주음에 아린이 혀를 차며 몸을 피할 준비를 했다.
**
"커헉... 쿠웨에에엑..."
촤르르르르륵...
계단에 우뚝 선 강태석이 녹아내리듯 땅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전신갑옷속, 입으로 은빛물질을 꿀렁거리며 토해내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금발에 호방한 외모, 건장한 체격, 관리받은듯한 전신.
"안에 이런 빌어먹을 놈이 있었군. 그나저나 왜 이렇게 된거지?"
"경추부분에 타격을 받아서 그래. 그러면 자동으로 모두 풀리게 되어있어."
터벅 걸어와 혐오스런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보는 리더 사내의 말에 강태석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경추 7번부위아래, 중추신경계는 모든 나노갑옷과 나노생체강화시술을 통제하는 곳.
이곳에 커다란 타격을 받으면 나노머신의 폭주에 의한 사용자 상해를 우려하여 즉각 외부의 나노머신 결집이 해제되고 체내의 나노머신도 토해내게 되있다.
이제 상대는 완전한 무장해제상태.
그리고 그런 상대와 그 앞에 덤덤히 선 강태석을 옆의 리더 사내가 믿기 힘들다는듯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로 성공하다니.'
애초에 이 거대한 문명시스템의 잔재에 의해 보호를 받는 올림포스의 인물들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들이었다.
자신도 위를 뒤집어야한다고 했지만 그건 아래가 지옥이어서 그랬을뿐, 정말로 가능성이 높아보여 시도했던건 아니었고.
죽여야한다고 소리쳤지만 실제로 상대를 죽일수 있던것도, 죽여도 되는것도 아니었다.
한데 그걸 타워에 처음 들어온것처럼 보이는 외부인이 단번에 성공하다니.
하지만 이내 사내는 자신이 감탄하고 있을때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지금 모든 상황이 끝난게 아니다.
되려 이제 시작일뿐.
그런 리더사내의 생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발아래 쓰러져있던 금발 사내가 구역질을 하면서도 분노서린 눈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커헉... 허어억... 이 버러지들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거같아? 크흐흐. 벌써 1년전을 잊었나보지?"
"... 카트란. 네가 정말로 고맙지만 지금 네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나는 널 한대 치고싶을지도 몰라."
한없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상대의 협박에 리더 사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 말대로.
어설프게 건드린거라면 자신들 400명 죽고 끝날게 수천명이 죽는 사태로 번질수도 있다.
이는 자신이 원했던, 타워의 모든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돌려받게되는것과 전혀 반대되는 케이스.
그럴거면 차라리 자신들만 죽고 끝났던게 오히려 나을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리더사내와 금발사내의 사이, 서있던 강태석이 묵묵히 금발사내를 풀썩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에 들쳐메었다.
상대의 얼굴을 앞으로 한채, 그 목에 칼을 드리우며.
"150층. 엘리베이터 작동시켜."
"감히! 감히이이이이!"
"네 말대로 어차피 죽을거면 지금 널 죽여도 변하는건 아무 변함이 없지. 그렇게 되고싶어? 우리랑 같이 개죽음당하는 결말로?"
"..."
스르릉.
자신의 목젖을 타고 겨눠진 시퍼런 칼날에 금발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그제서야 어느정도 상황이 파악되었기에.
자신의 목에 겨눠진 칼날.
저 너머, 피투성이가 된채 광기서린 분노의 눈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수십명의 사람들.
그들의 손에 들린 각종형태의 흉흉한 무기들.
자신을 보호해주던 재력도, 지위도, 갑옷도, 신체도 없이 온전히 그것들에 노출되어있다.
이는 사내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없었던 생소한 경험.
잠시후.
추욱.
"... 가자. 원하는대로 할테니 죽이지만 말아다오."
기운이 빠진채 축 늘어지며 대답하는 사내를 본 강태석이 성큼 엘리베이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올림포스.
<... 가자. 원하는대로 할테니 죽이지만 말아다오.>
"저저... 저 병신."
"설마했는데 저런 놈들한테 당해?"
위에서 차를 마시며 지켜보고있던 이들이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가진것도 없이 변변찮은 무지랭이 놈들한테 당해?
이건 뭐 함선을 끌고가서 원주민들 나룻배들한테 나포당한 꼴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아래놈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우습게 보겠는가.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건 멸시와 분노, 어이없음.
하지만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겁에 질린건 아니었다.
단순히 자신들의 권위에 흠집을 낸 아래 벌레들과 동료였던 머저리 하나에 열받았을 뿐, 그들의 절대적인 우위가 흔들릴 일이 없다는 사실은 여전히 자명했으니까.
오히려 지금 당황하거나 겁에 질려야하는건 아래의 녀석들.
"내버려두면 하늘높은줄 모르고 꾸역꾸역 위로 기어오르려 하겠지요. 1년전 <그놈>처럼 사람들을 모아서. "
"..."
"다들 내려갑시다. 깔끔히 정리해야지요."
깔끔히.
1년전, 세간에는 완벽했다고 전해지는 징벌, 그날의 유일한 오점.
그날 감히 죄를 범한 모든 놈들을 죽이고 그 가족들까지 본보기로 짓이겼지만... 한놈을 놓치고 말았다.
작년 모든 사태를 주도해 벌였고.
그것도 모자라 모두가 학살당하는 사이 유유히 타워를 빠져나간 녀석.
정체도 모르고 그날의 인원은 모두 죽었기에 이제 녀석을 잡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오늘 이 사건을 벌인 놈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하리라.
그런 누군가의 말에
끼이익.
끼익.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돔의 가운데, 세피로트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입구로 향했다.
**
키이이이이잉...
<149F... 150F...>
띠이이잉!
치이이이익...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이 안에서 내렸다.
강태석.
그리고 금발 사내.
머뭇거리는 금발사내와 달리 앞장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강태석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지던스, 사무실, 명품샵등이 들어차있던 아래의 층과는 다르다.
반경 500m, 원형의 기둥형태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높이 10m 날것의 텅빈 원형공간.
넓게 펼쳐진 회색의 바닥위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
키리리링...
키리링...
150층 정중앙, 위와 아래에서 뻗어나온 수십줄기 케이블과 전선들에 의해 한개의 원형 기계덩어리가 허공에 붕 뜬채 지탱되고 있었다.
케이블 주변, 주기적으로 반짝이는 빛.
이에 반응하듯 명멸하는, 복잡하게 얽힌 기계덩어리들.
마치 기계로 된 뇌가 전선이라는 혈관에 뒤얽혀 허공에 붕 떠있는듯하다.
그리고 이를 본 강태석은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았다.
중앙에 떠있는 저 거대한 기계가 이 세피로트 타워를 총괄하는 브레인, 메인 컴퓨터.
동시에 기업, 칸델의 연구자료등을 담아놓은 데이터베이스.
저벅.
발걸음을 옮기는 강태석의 뒤, 졸졸 따라오던 금발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듣기로는 예전에 칸델의 핵심시설구역이라고 들었는데 아무것도 없고."
금방이라도 터질것같던 생존자들이 없어지자 어느정도 여유를 찾은 것인지 다시 고개를 세운 사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불만스러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도시가 함락되고 갇히게된 뒤 가장 먼저 한것이 이 세피로트 타워 전체를 뒤지는 것.
혹시 모를 탈출의 방도, 혹은 정보를 찾아 온 타워 전체를 헤집었다.
하지만 소득은 전무.
쇼핑샵에는 줘도 안줄 양산형 명품따위만 있었고.
중간층, 기업용 사무실들에는 쓸데없는 문서와 정보들만이 있었으며.
그들이 가장 기대하던 최상층, 이곳 150층에는 보다시피 텅빈 공간만 있을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컴퓨터로 보이는 가운데 기계도 락이 걸려 핵심권한에는 접근도 할수 없었고 말이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그나마 가지고있던 권한은 물론, 올림포스의 유지기능과 플랜트의 생산기능까지 정지될수 있으니 결국 방치.
그리고 어찌보면 이 타워에서 가장 높은 151층에는...
"크흐. 너도 온김에 한번 내려다보고 가지 그래. 전망대엔 <아래>를 보는 유리창이랑 <위>를 보는 유리창이 두개 다 있거든."
사내가 먼발치, 세피로트 타워의 메인컴퓨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강태석을 보며 웃었다.
말 그대로 .
151층은 전망대.
그곳엔 특이하게도 두 종류의 유리창이 있다.
사방 원형의 공간을 수평으로 둘러싼, 도시 <아래>를 내려다볼수 있는 유리창벽.
그리고 한가운데, <위>로 뚫려있어 올림포스의 경치를 어느정도 볼수있는 직경 20m가량, 원형의 유리천장.
웃기게도 전망대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창은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그게 사실 아래녀석들을 위한 <관광용 창>이 아닌, 자신들 올림포스 주민들을 위한 <관람용 창>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웃겼지. 아래 녀석들이 바글바글거리면서 위를 올려다보는게 마치 연못의 붕어같아서.'
히죽 웃은 금발 사내가 어느새 자신감을 되찾은 눈으로 저 멀리, 이제는 제법 멀찍이 떨어진 강태석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녀석과 자신은 타고난 수준이 다르고 격이 다르다.
잠깐 위기에 몰려 녀석에게 짓눌리긴 했지만 결국 더 우월한건 자신.
그렇기에 최후의 승자도 자신이다.
띠이이이잉!
상황의 역전을 알리는듯한 청명한 알림음.
그와 동시에.
철커덕...
철컥...
"으핫. 으히힛."
열리는 엘리베이터문 너머, 요란하게 들려오는 수십개 갑옷들의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금발 사내가 저도 모르게 웃었다.
**
띠딕...
띠디디딕...
세피로트 타워의 메인컴퓨터에 USB를 꽂은채 자료를 내료받던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자, 카트란이 건네준 마스터코드는 이곳에서도 어느정도 먹힌다.
덕분에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중.
그때.
"버릇이 없구나. 무단침입한 주제에 원래 주인이 왔으면 뒤를 돌아봐야지."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에 강태석이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