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콰드드득!
칼로 문을 통조림따듯 뜯어내고 들어온 강태석이 안에 모인 사내와 수십명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눈빛이 형형하고 무장이 잘된 것이 싸울수 있는 이들이다.
하긴 그러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겠지만.
"벌써 포기하면 곤란해."
"너 뭐하는 놈이야. 여기가 우리 구역인거 몰라?"
순식간에 겨눠지는 수십개의 총구, 그 앞에 서서 외치는 사내의 말에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도살당할 처지에 그런것까지 걱정하고있네. 네가 우리구역 1등급 한우라 이거야?"
"..."
"지금 줄어드는 속도를 봐. 이제 52층 생존자도 얼마 안남았어. 너희 생각에 이번에 내려온 놈이 생존자를 남겨둘거같아? 저게 지금 그럴 마음이 있는 놈의 속도야?"
<현재 생존자수... 387!>
<현재 생존자수... 384!>
스피커 너머, 그야말로 맹렬하게 줄어드는 숫자에 사내를 비롯한 이들이 주먹을 꽈득 쥐었다.
그렇다.
상황은 최악.
이번에 내려온놈은 재수없게도 <신기록 달성>을 목적으로 하는 타입이다.
누가 제일 빠른 시간 내에 가장 많은 생존자를 죽였는지!
고양이가 쥐 가지고 놀듯 천천히 즐기는 타입은 많은 이들이 살아남기라도 하지, 저런 타입은 시간이 아깝다는듯 보이는족족 무자비하게 살해하기에 30분은 커녕 15분도 채 안되 모두가 몰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이들을 향해 강태석이 덤덤하게 말했다.
"혁명이고 뭐고. 뒤에 찾아올 놈이고 뭐고. 일단 저 한놈한테 다 죽기 싫으면 싸워야해."
"..."
"그리고 사실 내게 계획도 있어. 뒤에 찾아올 놈들까지 해결할 계획 말이야."
"뭐라고?"
사람들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지금 눈앞의 녀석이 맨칼로 철문을 쪼갤 재주가 있는 녀석인건 알겠다.
하지만 수백명의 올림포스 주민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다니?
그런 이들을 향해 강태석이 칼을 휘휘 돌리며 말했다.
"일단 내려올 놈부터 상대하자고. 시간없어. 다 죽을거야?"
"... 나갑시다."
강태석의 말과 사내의 말.
이 둘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이를 악물고 손에 무기를 든채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
비상구, 계단.
철퍽...
철퍼덕.
"2분 30초. 시작이 영 안좋은데."
52층에서 51층.
전신 갑옷에 피칠갑을 한채 철벅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던 사내가 불만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2분 30초.
일곱개 층중 하나를 정리하는데 걸린 시간.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이나 있다는걸 감안하면 충분히 여유로운 페이스지만 지금 자신이 신기록에 도전중이라는게 중요하다.
본디 인간이란 항상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며 살아야하는 법.
이런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도전의식을 가지다니.
과연 자신이라는 생각에 대견함이 들면서도 더욱더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의 기록, 15분 18초를 갱신하려면 말이다.
콰아아아아앙!
51층으로 들어가는 철문을 콰앙 걷어차버린 사내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터엉 뛰어들어 주변을 살폈다.
이 창의성없는 놈들은 으레 이런 진입골목에 우르르 몰려 기다리다가 화망을 퍼붓고는 했으니 말이다.
그런게 자신의 나노갑옷에는 먹히지 않는다는것도 모르고.
하지만...
"없네?"
갑옷 사이로 굵직한 음성을 토해낸 사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텅빈 계단 앞, 로비.
사방으로 뻗은 복도는 휑하다 못해 을시년스럽기까지 할 정도.
"설마 이 쥐새끼들이 도망다니는거야?"
사내가 갑주의 투구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안그래도 시간 모자라죽겠는데 무슨 헛짓거리란 말인가.
쾅쾅!
"우아아악! 이놈들 어딨어! 당장 말해줘!"
<현재 가장 가까운 생존자들의 위치는...>
발악하듯 로비를 쿵쿵 내리찍는 사내의 위로 스피커에서 낭랑한 기계음이 흘러나오던 그때.
샤샤샥.
철문뒤에 붙어있던 아주 작은 기계거미 한마리가 스르륵 기어 흥분한 사내의 기계갑옷 틈새에 찰싹 붙었다.
**
48층.
'이게 되네.'
손에 들린 칼, 리벨리온을 안테나삼아 기계거미를 조종하던 강태석이 되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그래도 전력적 열세인 상황.
상대는 자신의 위치를 빤히 아는데 자신들은 모른다면 더 불리해진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뿌려둬봤는데 달라붙는것도 모르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싸움경험은 없어서. 어린아이 수준이다."
"그 어린애가 육체는 헐크에 손에 미니건도 들었다는게 문제겠지."
옆에 서있던 사내가 강태석의 말에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이미 사방은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로 난리법석.
흩어져라!
빨리 다른 집단 녀석들도 모아와! 내려오기전에!
노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사방에서 내달리며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꽈드드득!
끼이익!
안에 있는 가구와 철문들은 모조리 떼어내어 쌓고 쌓아 겹겹이 두터운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복도와 복도, 각을 맞추어 화망을 형성하고 엄폐물 뒤에 숨는다.
너무나 익숙한 태도.
그런 이들을 보며 강태석이 숨을 골랐다.
사내를 비롯해 이곳에 모인 이들의 레벨은 대략 3에서 9 사이.
높은 이들이 제법 있기에 레벨은 대충 비벼볼만 하지만 애초에 무장차이가 너무 난다.
레벨이 같다고 한번 붙어볼만하다는건 체중이 같다고 총든 사람 이길수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
애초에 녀석이 둘둘 두르고 온 군용나노갑옷은 레벨로 치면 15가 훌쩍 넘는 병기이다.
'전투강갑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느정도 정면으로 맞서볼만했을텐데.'
그런 강태석을 향해 뒤의 대장사내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네녀석이 제대로 싸울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아. 발목이나 잡지마라. 우리는 준비해둔 수가 있으니까."
"수?"
"그래. 이것만 제대로 먹히면 아무리 녀석이라도..."
순간.
"온다."
쿵!
쿵쿵!
쿵쿵쿵쿵쿵!
마치 공포영화에서 괴물이 달려오는듯한 소름끼치는 소리.
순식간에 51층부터 50, 49, 48층의 층계를 울리는 육중한 소리가 비상계단쪽에서 울려퍼짐과 동시에.
콰아아아앙!
"... 쏴라!"
콰르르르르르르르륵!
철문을 말 그대로 짓이겨버리며 뛰쳐나온 무언가를 향해 사내의 신호와 함께 일제사격이 가해졌다.
비상구 로비, 세방향의 복도에서 가해진 수십정 화기에서의 사격.
바닥의 대리석은 물론, 튕겨나온 철문마저 너덜너덜해져 갈려나갈 정도의 탄알들이 쏟아부어졌지만...
터어어엉!
우아아아아악!
"괴물같은 새끼!"
그대로 땅을 박차고 복도 한켠으로 뛰어들어 앞에 선 대장급 인원들을 후려패기 시작하는 갑옷병기의 위용에 대장 사내가 이를 꽈득 악물었다.
단순무식한 동작.
피하지도 않고 달려들어 후려친다.
하지만 그 속도, 그 힘, 그 내구도때문에 저 단순한 행위가 피할수 없는 재앙이 되어 강림한다.
"빨리! <창>!"
이에 옆에 서있던, 아까전 사내를 말렸던 노인이 마른 근육에 터질듯 힘을 주며 무언가를 들어올려 건넸다.
사내의 굵직한 팔뚝과 커다란 손아귀 안에 건네진 건 말 그대로 <창>.
그것도 아주 거대한.
사실 창보다는 생김새가 그예전, 기사들이 마창시합을 겨루던 시합용 랜스에 가깝다.
길이 4m.
1m 길이, 오리알보다 굵은 손잡이 위로 육중하고 길게 마름모꼴 나선형으로 뻗은 3m의 차징파트.
이게 자신들이 준비한 비장의 한수.
그 비굴한 생존과 사냥, 배급속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대가이자 보상.
<드래곤 슬레이어>.
어떤 <무언가>를 본따 만들었다는 A급 살상병기.
이름은 다소 거창하지만 위력만큼은 진짜다.
"후우... 우아아아아아악!"
전신 근육에 힘을 준 사내가 발끝부터 시작하여 온몸을 뒤틀며 손끝까지 힘을 전달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키이이이이이잉!
철커덕!
철컥!
거대한 4m짜리 쇳덩이가 기묘한 분리음을 내며 맹렬하게 복도너머, 파괴를 자행하고 있는 핏빛 갑옷을 향해 날아들었다.
**
콰아아아앙....
<뭐지?>
뒤통수로 날아드는 파공음에 처음 올림포스의 사내의 머리속에 든 생각.
하지만 사내의 느린 의식보다 약진된 육체가, 자동화된 갑옷이 먼저 반응했다.
자동으로 휘도는 상반신과 내뻗어지는 굳건한 두 손.
순간.
콰가가가가가가각!
"...!!!!"
손아귀에서 회전하며 맹렬한 파공음과 함께 자신을 뒤로 밀어내려하는 육중한 쇳덩어리에 사내의 투구안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이거 본적이 있다.
서로 휘두르며 싸우라고 예전 배급으로 기분좋게 하사했는데 이걸 자신에게?
하지만 사내가 성질을 버럭 내기도 전.
키릭...
키리리릭...
사내의 손아귀에 잡힌 창두부분에서 불길한 분리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커헉...
허어어억!
주변, 복도에서 허둥지둥 벗어나던 이들이 피를 토하며 튕겨나갈 정도의 대폭발이 터져나왔다.
어찌나 그 폭발이 강렬했는지 주변 멀쩡하던 레지던스들의 철문이 폭압에 우그러지며 방안으로 처박히고 사방 대리석들이 조각나 흩어질 지경.
후우우욱...
사방을 메우는 자욱한 먼지속.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있던 사내와 노인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너머, 파괴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예전 여인도 몰래 구하고 개조해놓았던 A급 병기로 치명상을 입혔었다.
계산대로라면 사내 역시 치명상을 입었어야한다!
하지만...
"쿨럭... 크흐... 으하하하! 이 개미새끼같은 것들이! 이따위 것들로 나를 어찌할수 있을거같아? 내가 입고온건 한층더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란 말이다!"
화아아악!
흙먼지속에서 우렁찬 광소를 내뱉으며 굳건하게 걸어나오는 상대의 모습에 사내와 노인이 그대로 절망했다.
**
후욱.
흙먼지를 뚫고 나온 사내가 시간을 대충 짐작하고는 이를 갈았다.
남은 시간이 제법 있지만 이제 이 개미새끼들이 도망치기 시작하면 신기록은 이미 그른 상황.
그 대가로 남은 시간, 녀석들에게 철저한 고통을 선사하기로 한 사내가 분노를 묵직하게 담아 쿵쿵 복도사이를 걸었다.
우선은 발치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놈들부터.
처억.
다시 복도가 교차하는 로비지점, 자신이 철문을 박차고 나온곳까지 걸어나온 사내가 자욱한 흙먼지속에 널부러져있는 녀석 하나를 향해 발을 치켜들었다.
으으 신음소리를 내는걸보니 살아있는듯한데 잘되었다.
철저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잘근잘근 밟아으깨어 남은 녀석들에게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죽게될지 알려주리라.
순간.
퍼어어어어어어억!
"....!!!!!!!!!!!!"
갑자기 몸을 뻗어 자신을 걷어찬 녀석의 발차기에 붕뜬 사내가 갑옷째 자신이 나왔던 비상계단쪽으로 튕겨져나갔다.
**
퍼어어억!
발끝에 걸리는 묵직한 감각.
부상자인척 누워있다가 단번에 상대를 걷어차 튕겨낸 강태석이 자세를 다잡았다.
그런 강태석을 향해 터져나오는 고성.
"이 새끼아아아!"
"..."
터어어엉!
날아가 계단벽에 부딪치는 와중에도 소리를 내지르는 상대의 모습에 강태석이 숨을 고르고는 곧바로 내달렸다.
기회는 단 한번.
저 무식한 갑옷은 지금 이 격리된 사냥터 안의 어떤 화력으로도 유효한 타격을 줄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치지지직...
<약식 EMP. 발동준비완료.>
<발동시 걸려있던 모든 EMP-쉴드타입이 해제됩니다.>
<발동하시겠습니까?>
이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강태석의 몸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퍼져나간 푸른 전류의 물결이 그대로 갑옷사내를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