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우우우웅!
강태석이 꽉 들어차다못해 터질거같이 비좁이 찬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보았다.
무장병 사내를 비롯한 열명의 군인, 혹은 쉘터인.
남녀 혼성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터질것같이 단련된 전신의 근육.
무협계가 무공을 익혀 강해지고.
환상계가 기공과 마력을 쌓아 성장하고.
자신같은 사용자는 레벨을 올려 강해지듯.
이곳, 멸망해가는 세계 ADAA-1314의 주민들은 <나노머신> 및 <기계화>, <육체개조>를 통해 강해진다.
뭐가 되었건 공통점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육체는 강건해지고 무력이 쌓인다는것.
하지만 아린이라는 여인, 아니 소녀는 다르다.
고작 열일곱정도 되었을까.
낭창낭창한 적발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아직 순수함이 풍겨오는 싱그러운 미소.
이대로 잘 자란다면 누구나 사랑에 빠질법한 미녀가 되겠지만, 아니 지금도 누구나 매력을 느낄 사랑스러움이 있었지만 전투와는 천만년정도 거리가 있다.
그런 강태석의 의문을 해소해주겠다는듯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젓는 무장병 사내의 한숨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린. 본인이 없는동안 딸이 이런 임무에 나간걸 알면 대장이 날 죽일거다."
"지원자 받아서 가는건데 뭐가 문제야. 아빠랑 상관없는 얘기야."
"아니 그래도..."
투닥거리는 둘을 강태석이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니까 이곳 대장의 딸인 모양.
정말로 아무 능력이 없다면 이제부터 자신은 저 소녀를 신경써서 지켜야한다.
외부인이 주도한 미션에 따라나갔다가 딸이 죽어돌아왔다면 자신은 이 쉘터를 도망치는게 나을테니까.
하지만...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으려나?'
그러는 사이 어느덧 지상.
쿠르르르릉!
지상에 도착한 무장병사내는 열리는 엘리베이터 밖, 폐허더미 너머로 보이는 황무지 도시를 보며 배낭옆, 손목쪽으로 나와있는 조작기버튼을 눌렀다.
키이이이잉!
작은 기계음.
동시에 무장병 사내가 강태석을 보며 말했다.
"이게 얼마 남지 않은 방해전파장치중 하나다. 이거 하나로 쓸수 있는 시간은 15시간 정도지. 제법 넉넉하지만 걸어가야하니 여유있지는 않아."
사내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도로 확인한 무기고와 이곳은 제법 거리가 있다.
차를 타고가면 금방이지만 그건 다른 쉘터의 사람들에게 나 여기있소 라고 광고하는 꼴.
가기전에, 혹은 미션을 마치고 나와 습격당하고 싶지 않다면 조심해야한다.
무너져가는 세계, 주의해야할 것은 괴물만이 아니니까.
생각을 정리한 강태석이 사내를 향해 말했다.
"알았으니까 너무 보채지말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다."
"... 어떻게든 잘 해내는게 좋을거다. 죽게되면 그전에 그 원흉인 너를 살려두고 싶은 거 같지 않거든."
철컥.
위협적으로 총기를 철컥거리는 사내의 모습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후.
후우우우우우우웅...
황량한 바람을 피해 넝마를 뒤집어쓴 이들이 모두 한복판을 피해 폐허더미, 그 가장자리들을 따라 조심해서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
쿠르르르릉!
쿠르릉!
걷는 와중에도 대지가 가끔씩 우르릉거리며 진동한다.
마치 땅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지나가는듯.
그 속에서 강태석과 함께 걷던 여군인이 불쾌하다는듯 침을 퉤 뱉었다.
"갈수록 심해지네. 지진이."
"진짜 신병기라도 지하에 투하한거 아냐?"
"하하. 모르지. 아니면 땅 전체가 뒤집어지고 있는걸수도."
"크흐. 그건 너무 간거아냐? 인간이 다죽어가는거지 지구는 생채기도 안날거라고."
걷는 와중에 서로 농을 주고받는 이들의 말에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농담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쯤 저멀리, 혹은 아주 깊은 곳에서 고레벨 기계병기들은 착실하게 멘틀을 헤집어놓고 있으니까.
이 여진들은 그것들의 여파.
물론 지금쯤 고위층이나 도시의 지배계급 몇몇은 눈치챘겠지만 이런 외곽지역의 시민들이 알수는 없는 노릇이며.
굳이 강태석이 말해주는 것도 좋지않다.
이제 곧있으면 모두 담궈진다는걸 말해봤자 집단패닉과 광기밖에 더오겠는가.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지.'
키이이이잉!
어제 레벨업으로 얻은 소량의 마력을 내부로 돌리며 강태석이 숨을 골랐다.
자신은 오랜시간 게임을 하며 정말 많은 세계를 돌았고 많은 경험을 했다.
리얼한 가상현실에 워낙 오래 몸담으니 나중에는 뭐가 현실이고 뭐가 가짜였는지 헷갈렸을 정도.
그리고 지금 사용하는 것도 그 와중에 배웠다.
무량기공.
한줌의 마력으로도 오감을 청명하게 하고 전신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어주는 녀석.
이를 궁극까지 익힌 선인, 산산자는 예전 업데이트에서 지옥문이 열렸을때 대공중 하나와 산화하는데 성공했을 정도다.
대공급들은 대륙을 한손아귀로 쥐어 터트릴 정도의 괴물이었는데 말이다.
자신은 그정도는 아니지만 지금으로도 사방을 예리하게 살피는것정도는 가능.
순간.
"... 젠장."
화악!
"어? 이새끼가!"
갑자기 확 자신을 밀치는 강태석의 손길에 앞장서걷던 무장병사내가 반사적으로 손을 휘두르던 그때.
타아앙!
퍼어어어어억!
"!!!!!!!!!!!"
"제기랄 흩어져! 엄폐해라!"
자신을 스쳐지나 기둥에 처박힌 총알에 무장병 사내를 비롯한 군인들이 이를 갈며 사방, 폐허 사이로 흩어지려고 했다.
조심해서 움직였는데도 저격이라니?
하지만 그런 이들을 보며 강태석이 내뻗었던 손을 꾸득 쥐었다.
완전히 막은게 아니다.
이미 상대는 목적을 이뤘다.
치치칙....
"이런 썅... 다들 모여! 모여라!"
뻥 뚫린 배낭, 거기서 터져나오는 스파크와 기계음.
키이이이이잉!
동시에 저 멀리서 질주해 달려오기 시작하는 소리들에 무장병 사내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
**
키이이이잉!
콰드드드드드드드!
"이런 제기라아아아알 진짜!"
폐허 사이사이.
무너진 빌딩의 1층과 필로티들 사이를 질주하던 무장병사내와 군인들이 쌍욕을 내뱉었다.
무기고까지 남은 거리 800m.
강화된 신체는 100m를 7초에 주파할수 있게 해주지만 그 1분이면 전원 갈려나가기에 딱좋은 시간이다.
저격에건, 달려드는 스캐럽에건 뭐건간에!
순간.
콰드드드득!
"어헉...!"
기둥을 관통해 날아드는 기계덩어리에 달리던 군인중 하나가 교전수칙마저 잊고 눈을 질끈 감았다.
땅에서 솟구쳐나온 스캐럽이 50cm 두께의 콘크리트 기둥마저 박살내며 그대로 얼굴로 날아든것!
키르르르륵!
맹렬하게 회전하는 톱니바퀴들이 사내의 얼굴을 갈아버리려던 그때.
쩌어어어어어어억!
강태석의 손 끝에서 휘둘러진 태도가 정확하게 날아드는 스캐럽을 두덩이로 쪼갈랐다.
부드럽게,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유려하게.
"... 너 뭐야? 방금 어떻게 한거야?"
"칼이 좋잖아."
<스캐럽(LV. 1)(TYPE-N)이 작동을 정지했습니다.>
<소정의 경험치를 확보했습니다. 육체가 강화됩니다.>
<현재 LV1(25.71%). 소정의 마력이 활성화됩니다.>
타타타타타탁.
뛰는 강태석의 말에 군인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이 좋다고?
평범한 보급용 태도는 <기계병기에게 피해를 주는건 가능하다> 정도지 <스치는건 뭐든 박살낸다>는 아니다.
하물며 강렬한 운동에너지를 품고 날아드는 녀석이라면 더더욱!
한데 그걸 두동강내버리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내달리던 강태석이 미친듯이 주변을 훑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한 눈에봐도 주변것들과 차별화된 거대한 폐허더미.
어찌나 큰 건물이 무너진건지 폐허더미가 마치 작은 언덕과도 같아보인다.
저게 무너진 무기고의 입구.
저기까지만 들어간다면 일단 안심이다!
순간.
섬뜩.
퍼어어어어억!
데굴데굴.
"... 후욱."
"망할 새끼가!"
타타타타탕!
총알을 피해 구르다시피 바닥을 내뒹군 강태석이 저멀리, 저격이 날아든 방향을 향해 총알을 내갈기며 달리는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대충 날아온 각도를 보고 갈기는 모양.
상대는 위치가 들켜도 전혀 상관없다는듯 이동조차 하지않은채 총알을 쏘갈기고 있었다.
날아드는 사격에 대비해 이미 엄페를 단단히 해놓고 총구만 내민채 쏘고있을터.
기계화가 많이 진행되었다면 한두방 정도는 맞아도 계속 저격을 갈길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타타타탕!
퍼어억!
"커헉...!"
스캐럽을 피해 달리다 다리에 스쳐 나뒹군 군인을 본 강태석이 칼을 꽉쥐고는 내달려 쓰러진 상대를 들쳐엎었다.
어느정도 강화된 육체에 무량기공, 강화피복.
사람 하나 들고 입구까지 뛸수는 있는 수준.
이에 그치지않고 강태석이 상대가 쓰러지며 놓친 화기를 발로 텅 차 들어올리며 오른손에 쥐었다.
왼손에는 칼, 오른손에는 총.
순간.
"너 이새끼! 그거 안내려놔!"
총을 쥐자마자 저 멀리 내달리던 무장병 사내가 버럭 소리질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키이이이이잉!
들쳐업은 군인의 무게.
사방에서 달려드는 스캐럽들의 불쾌한 소음.
칼자루와 방아쇠를 쥔 왼손과 어깨에 개인화기를 견착한 오른손.
이 모든 것들의 감각을 느끼며 강태석이 가늠쇠에 눈을 대고 저멀리를 바라보았다.
사격이 날아온 방향.
높은 빌딩, 폐허사이에 잔뜩 가려진 좁은 틈사이.
반짝이는 어딘가를 향해서.
마치 천천히 흘러가는것같은 기묘한 느낌의 시간속, 강태석이 방아쇠를 당기려하자 어깨에 메어진 군인이 설마하는 표정으로 강태석을 바라본 순간.
"아 역시 안되겠다."
"..."
타아아아앙!
키이이이잉!
후다다다다닥!
총구를 틀어 대충 옆에서 내달리는 스캐럽을 향해 쏴갈기고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하는 강태석을 보며 군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아 역시 안되네.'
타타타탁!
쩌어어어억!
<스캐럽(LV. 1)(TYPE-N)이 작동을 정지했습니다.>
<소정의 경험치를 확보했습니다. 육체가 강화됩니다.>
<현재 LV1(77.71%). 소정의 마력이 활성화됩니다.>
내달리는 스캐럽을 쪼개버린 강태석이 급박한 와중에도 입맛을 다셨다.
예전 기분 내보려고 했는데.
레벨이 낮아 상대모습은 커녕 너무 멀어 어디 숨었는지도 제대로 안보인다.
유도장비도 없는 보급용 개인화기로는 어림도 없는 노릇.
'어쩔수없지.'
딸칵.
군인을 엎고 달리던 강태석이 왼손, 배낭과 연결된 조작기에 손을 가져다댔다.
세개밖에 없는 급속고양제.
몇분간 회복속도와 전투컨디션을 급격히 향상시킨다.
아깝긴 하지만 무량기공이고 나발이고 저격에 스치기라도 하면 끝장.
하지만 이걸 빨고 달리면 <어떻게든> 저 입구 안까지는 들어갈수 있다.
강태석이 숨을 고르고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타아아아아아아아아앙!
"됐다! 처리했어! 달려!"
"?"
'진짜로?'
뒤쪽.
어딘가로 총을 쏴갈긴후 크게 소리치는 아린의 함성에 강태석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
잠시후.
쿠르르르르르릉!
"후욱... 후우."
"하아. 염병."
콰드드득!
폐허 한쪽.
쿠르릉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 문.
자신의 배낭을 물어뜯은채 정지한 스캐럽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패대기친 한명과 그옆의 숨고르던 군인들이 닫힌 문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
당장은 차단효과가 있는 금속문 덕분에 산거같지만 산게 아니다.
이 안쪽은 바깥보다 더욱 살벌한 곳이니까.
그리고 강태석은 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무기고 진입>
<추천생존레벨 15>
<현재 사용자의 레벨에 지극히 위험합니다. 탈출을 추천합니다.>
'그럴수야 없지.'
강태석이 창을 휘휘 지워버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은 방해기 외에도 이 깊은곳에 잠든 무언가가 필요하다.
전쟁의 유산, <전투강갑>이.
<레벨 2(1.44%) 달성을 축하합니다.>
쿠르르릉!
강태석이 고개를 돌려 창너머, 진동이 울리는 폐허너머, 어둠속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