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다시는 그런 짓 안 하겠다고 나랑 약속해.”
“…약속할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쭈뼛대며 시선을 피하자 해로운이 내 뺨을 조심스레 잡고서 말했다.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줘요, 길마님.”
“약속할게! 한다니까?!”
가까워진 간격에 해로운의 손을 뿌리치고선 펄쩍 뛰었다. 해로운이 웃음을 터트렸고, 나는 부끄러움에 씩씩거렸다.
“…두 분, 설마 사귀는 거예요?”
유대공의 멍한 물음에 해로운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네?”
“아직은 아니라고. 곧 사귈 거야.”
“누구 맘대로!”
해로운의 어깨를 찰싹, 소리 나도록 때렸다. 해로운이 너무하다면서 우는소리를 냈지만 무시다.
이 와중에 유대공은 입가를 가리며 경악했다.
“사내 연애 금지라고 했으면서! 길마님, 거짓말쟁이……!!”
“아니야! 아니라고!!”
“지금은 아니지.”
“해로운, 안 닥쳐?!”
망할 법사님께서 닥치지 않겠다는 듯이 방긋 웃는다.
저 얄미운 얼굴을 한 대 때려주려는데, 해로운이 난데없이 나를 꼭 끌어안고선 총을 들었다.
탕―!
총성이 가시기 무섭게 들려오는 것은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저 망할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 이를 드러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이마 정중앙이 꿰뚫린 사자가 보였다.
“…….”
바짝 얼어붙어 있는 대공님도 보였다.
“대공님?”
조심스레 대공님을 부르자, 대공님께서 숨을 격하게 들이켜 마시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법사님, 미쳤어요?! 맞을 뻔했잖아요!!”
“쏘리.”
“쏘리가 아니라고요!”
나는 해로운의 품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자에게 다가갔다.
“길마님, 위험해.”
해로운이 위험하다면서 말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사자가 몸을 일으키는 게 더 빨랐다.
―크르릉……!
“와우.”
이마 정중앙이 뚫렸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지?
“길마님!!”
유대공과 해로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둘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주고는 곧장 검을 휘둘렀다.
사자의 고운 갈기가 몇 가닥 휘날린다. 허공에 검붉은 피가 흩뿌려지는가 싶더니, 사자는 비명 한번 못 내지르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내 모습에 유대공이 한숨을 내쉬었고, 해로운이 앓는 목소리를 내었다.
“길마님! 제발, 좀……!”
“언제는 나보고 일해달라더니?”
“이렇게까지 일해줄 필요는 없단 말이야.”
해로운이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나를 안으려고 한다. 그 손길을 가볍게 피한 뒤 나타난 메시지를 살폈다.
[의뢰인, ‘12가지 과업을 이룩한 자’가 A급 성물, ‘네메아의 사자 가죽’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좌, ‘12가지 과업을 이룩한 자’가 당신께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오랜만에 받는 성좌님의 인사가 참으로 반갑다.
나는 받은 보상을 길드의 창고에 보내고는 유대공에게 물었다.
“대공님, 그런데 다른 애들은 어디 가고 너 혼자만 이러고 있어?”
내 말에 대공님께서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른다.
“원래 법사님이랑 같이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유대공이 해로운을 보며 씩씩거린다. 해로운은 그에 어깨를 으쓱여 줄 뿐이었다. 보아하니 해로운 법사님께서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유대공을 버렸나 보다.
“해로운, 내가 돌아온 건 어떻게 안 거야?”
“그러게, 어떻게 알고 내가 하운이에게 갔을까?”
“…….”
능글맞게 묻는 목소리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해로운이 키득거리며 웃고는 말한다.
“그보다 길마님, 다른 애들은 어디 있냐고 물었지?”
고개를 끄덕이자 해로운이 손가락을 들었다.
“먼저 우리 드슬님은 저기서 드래곤들 때려잡고 있고.”
콰과광, 하늘에서 연신 굉음이 울리고 있다. 그 소리를 뚫고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아빠!!”
하림이가 유대공의 품에 꼭 안겨서 내게 손을 뻗는다. 해로운이 그 손을 아래로 내리게 만들고는 말했다.
“하림이는 여기 있지.”
“로운이 미워!!”
하림이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린다. 해로운이 그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령사님은…….”
화르륵―!
뒤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하늘로 솟구치는 불기둥이 보였다.
해로운이 웃음을 터트린다.
“정령사님은 저기서 불장난인가 보죠? 벌레 퇴치하고 계신다는 것에 로운이 전 재산을 걸죠!”
해로운의 전 재산은 지켜질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보이지 않는 다른 길드원들의 행방을 물었다.
“용사님이랑 마왕님은? 그리고 이 사고를 친 최강은 또 어디서 뭐 하고 있어?”
“나는 여기 있단다.”
용사님께서 건물을 베며 나타나셨다. 용사님의 등 뒤로 폭삭, 무너지는 건물에 절로 황망해진다.
“…용사님, 그렇게 건물을 부수면 어떻게 해?”
“해로운이 어련히 알아서 복구하겠지.”
“법사는 그럴 생각 없는데요?”
용사님께서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해로운을 노려본다. 그 시선에 해로운은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그 순간, 붉은 하늘을 뒤덮는 검은 마법진이 벼락을 내리쳤다.
―끼에에엑!!
―키아악!!
하늘을 뒤덮고 있던 몬스터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해로운이 펼쳐준 마법이 아니었다면, 진작 몬스터에 깔려버렸을 거다.
“아오, 저 망할 새끼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은 건 이시온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벼락을 피해 아래로 내려온 이시온이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린다.
그런 이시온을 향해 누군가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짐에게 고마워하지 못할망정, 그런 소리를 지껄이다니.”
기다란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눈앞에 멈춰선 남자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마왕님.”
“…….”
우마훈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나를 보기만 하는 시선에 나는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 * *
“아임 패배자.”
최강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몬스터의 사체 위에서 대(大)자로 누워있는 중이었다.
그 주위를 센터의 헌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해요?”
“일단,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지 않나?”
“누가 인사하러 갈 건데요?”
몬스터의 사체로 이뤄진 산.
그 광경을 만든 것이 정상에 누워있는 최강이었다.
헌터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산을 올라 최강의 곁에 섰다.
“최강 군.”
부르는 목소리에 최강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 그러니까…….”
“지한결이라고 합니다. 뵌 적이 없나 보군요.”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없네요. 암 쏘 쏘리.”
힘없이 주절거리는 목소리에 지한결이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물었다.
“다른 분들께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싶은데요…….”
가는 순간, 한 대씩 맞을 것 같아서 그럴 수가 없다.
‘길짱님도 돌아왔는데.’
최강이 서러움에 코를 훌쩍였다.
메시지로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해로운이 먼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불멸자(길드장)| : 도하운이 먼저 인사할 때까지, 아무도 메시지 보내지 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먹을 귀환의 길드원들이 아니었으나, 해로운은 경고했다.
|불멸자(길드장)| : 로운이가 9서클 대마법사인 거 모두 잊었나 보죠ㅠ? 로운이 슬프죠ㅠ
나타난 메시지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더랬다. 최강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두 눈을 데굴 굴렸다.
“그보다 아저씨, 저희 형아들이랑 누나들 알아요?”
아저씨라니. 해로운 씨에게는 잘도 ‘사형’이라니, ‘형아’라니 그러면서.
섭섭한 마음은 잠시뿐이었다.
‘누나들이라고 하는 걸 보니.’
돌아왔나 보다.
지한결이 잔잔히 웃음이 지을 때였다. 최강 앞으로 반가운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Pr. 신살자(길드장)| : 최강, 너 이 새끼 어디 있어?
“길짱님!!”
최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지한결에게 물었다.
“지한결이라고 했죠? 우리 형아들이랑 누나들 아시는 것 같은데 안부 전해드릴까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한결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어서 가보세요.”
“네! 아저씨, 바이!!”
곧장 시야에서 사라지는 최강의 모습에 지한결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 팀원들이 다가와 묻는다.
“지 팀장님, 저 아이는 도대체 누굽니까? 저렇게 강하다니.”
“예전에 길드 있었지 않아요? ‘귀환’이라고, 그쪽 소속인 거 같은데…….”
“그거 도시 괴담 아니야?”
“아니야, 저번에 기자 회견도 했었어.”
수군거리는 헌터들 사이에서 유독 조용한 사람이 있었다.
연예인의 신분을 버리고, 완전히 헌터로 돌아선 도빈이었다. 도빈이 물끄러미 지한결을 쳐다본다.
그 시선이 마치, 괜찮으냐고 묻는 것 같아서 지한결은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주었다.
그러고는 모여있는 모두에게 말했다.
“자, 다들 일이나 하러 갑시다.”
* * *
게이트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
“네놈이 뭔데 짐을 막느냐.”
“마왕님을 막은 게 아니라 하운이를 막은 건데?”
그런데 우리 길드원님들께서는 속 편하게 저 지랄을 떨고 있다.
해로운과 우마훈이 다투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두 팔 벌려 우마훈을 안으려던 나를, 해로운이 막았기 때문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둘 다 지랄하지 말고 이 상황이나 해결해 봐. 게이트 아직 안 닫혔잖아.”
“이 상황을 만든 녀석이 해결해야 하지 않겠니? 가령.”
“길짱님!!”
“최강이라거나.”
용사님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웬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두 눈을 비비고 보니 강아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최강, 너 이 새끼.”
그것도 우리 길드의 막내, 무림 제일 고수님이셨다.
나는 곧장 주먹을 쥐어 최강의 앙증맞은 머리통에 꿀밤을 먹여주었다.
따악,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를 보니 최강 새끼의 머릿속에는 든 게 아무것도 없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해! 길짱님, 너무해!! 다짜고짜 이렇게 때리는 게 어디 있어요?! 내가 길짱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최강은 머리를 부여잡고 징징거렸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다는 새끼가 이 사고를 쳐놔?”
최강이 입을 일자로 다물더니 이내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저 수험생이라고요!! 의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한정적인데……!”
“그 한정적인 시간을, 관악산에 올라가 낮잠 자는데 보내지 않았습니까.”
최강의 말을 끊은 건 강하수였다. 강하수가 초췌한 얼굴로 내게 인사한다.
“오랜만입니다, 길드장님.”
그 인사에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령사님, 어깨에 거미.”
“오, 이프리트시여!!”
휘몰아치는 바람에 용사님께서 얼굴을 찌푸리신다.
나는 해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모두의 얼굴을 하나씩 두 눈에 담았다.
유대공과 우마훈, 강하수와 강인한. 이시온과 최강.
그리고 해로운.
우리 길드원들, 모두의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