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영광의 검을 쥔 손이 떨린다.
검을 휘두르려던 손은 허공에서 멈췄고, 다리는 여러 개의 고리로 이뤄진 사슬에 매어졌다.
“윽……!”
나를 몇 번이나 죽게 했던, 그 사슬이다.
글로리아가 본인의 힘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었다던 것. 그 사슬이 지금 내가 가진 성녀의 힘을 억누르고 있다.
“성하……! 성하!!”
남자가 싱긋, 웃음을 짓더니 내게 다가온다. 이내 뺨에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당신 때문에 글로리아 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아십니까?”
분노에 찬 잔잔한 목소리.
나는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관심 없어.”
“…너무하시는군요.”
성하가 손수건을 받아 제 뺨에 묻은 것을 닦아낸다.
“성하님.”
“괜찮습니다.”
성하가 가까이 다가온 신관을 물리고는, 잔잔히 미소를 짓고서 내게 손을 뻗는다.
뺨을 내리치든, 머리를 붙잡든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이 성하를 쳐다봤다.
성하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당신께 그 힘을 주신 분이 누군데, 감히……!”
성하가 분에 찬 목소리를 다스리고는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주제에 맞지 않는 과분한 힘을 얻었다는 것에 영광으로 아셔야지, 감히 배신했습니까.”
배신.
절로 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비웃음을 가득 그려주며 물었다.
“내가 네 속셈을 몰랐을 줄 아나 봐, 성하?”
성하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나를 본다.
그 시선에 나는 험상궂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말을 이었다.
“내 힘을 맘껏 이용한 뒤에 글로리아에게 산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거잖아, 성하.”
성하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는가 싶더니, 그가 표정을 갈무리하고선 말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거든요.”
그러니 필요했을 뿐이라며, 성하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이 말입니다.”
한때는 신전에서 쥐 죽은 듯이 살며 목숨을 부지하고자 했었다.
단테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마몬과 라헬과도 잘 어울리면서.
몇 번이나 그들에게 죽어, 회귀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겨우 중앙 신전의 신관들과 마음을 터놓고 지낼 무렵, 성하는 나를 신단 위에 올렸다.
마약과도 같은 것에 절여져서, 나는 성하가 치켜드는 검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이 모든 일은 글로리아 님을 위해서입니다, 성녀님.”
잔잔하게 들려오던 말.
그것을 끝으로 나는 심장이 도려내졌다.
이번에도 같을 것이다.
성하는 나를 산 채로 끌고 갈 것이고, 제단에 올려 심장을 도려내겠지.
글로리아를 위해서라는, 우습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나는 한껏 비웃음을 지으며 눈앞의 남자를 조롱했다.
“성하, 글로리아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남자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에 입꼬리를 올리며, 허공에 멈춘 영광의 검을 억지로 휘둘렀다.
온몸을 묶고 있던 사슬이 검을 쥔 손을 으스러뜨렸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성녀님……!”
내 검을 피한, 성하를 죽여야 한다.
“성하님을 지켜라!!”
“성녀를 죽여!!”
그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 역시 죽여야만 했다. 나에게 들이밀어지는 검을 성하가 막는다.
“성녀에게서 검을 거두세요! 지금 당장……!”
떠들어대는 입을, 검을 휘둘러 베어버렸다. 흩뿌려지는 피에 곳곳에서 비명을 들린다.
“크흡… 으, 으으……!”
후두둑, 턱을 타고 떨어지는 핏물이 보인다. 성하는 제 입가를 급히 가리고는 나를 노려봤다.
분하다는 듯이 나를 보는 눈이 기껍다.
나는 웃음을 지어주며 말했다.
“성녀의 힘은 사용하지 못해도… 검은 쥘 수 있거든.”
나는 그대로 영광의 검을 치켜들어 이를 휘둘렀다.
손에 이어 팔이 으스러졌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꺄아아악!!”
눈앞의 남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성녀가……! 성하님을!!”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성기사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파고드는 검을 가까스로 피하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검을 쥐고 있는 손에 감각이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고통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성녀를 죽여라!!”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드는 이들을 베어 넘겼다.
흩뿌려지는 피를 밟고서, 성하를 치료하고자 달라붙어 있는 신관들에게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으… 으아악!!”
도망치는 놈을 죽이고, 달려드는 놈을 죽였다.
바닥에 붉게 웅덩이가 고일 때까지, 나는 몇 번이나 글로리아의 종들을 죽였다.
* * *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뺨에 닿는다. 해로운은 힘겹게 두 눈을 뜨고선 가느다란 숨을 내뱉었다.
“…도하운.”
도하운은 제 몸에 묶인 사슬을 풀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 몸을 해치는 중이었다.
끝이 세워진 검이 고리를 부수고자 움직인다. 하지만 검은 사슬의 연결 고리가 아닌, 여린 살갗을 찌르고 말았다.
“제발, 좀……!”
도하운이 살갗을 찌른 검을 다시 들었다. 그것을 막은 건 해로운이었다.
“하지 마.”
“…해로운?”
붙잡힌 손에서 영광의 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고인 웅덩이에 빠진 검이 붉게 적셔진다.
도하운은 멍하니 해로운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그에게 물었다.
“정신이 들어? 괜찮아?”
물은 것도 잠시, 도하운이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아니다,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상처가 벌어질 거라면서, 도하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해로운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없다. 아무도 없다. 있는 건 숨이 끊어진 시체뿐이었다.
도하운이 입술을 짓씹었다. 붉게 맺히는 핏방울에 해로운이 손을 든다.
“하운아.”
“말하지 말라고!!”
도하운이 소리를 지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해로운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화낸 거 아니야…….”
검에 찔린 부분을 중심으로, 독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타는 듯한 갈증, 계속해서 올라오는 핏물. 해로운은 쿨럭거리며 이를 토해내고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죽이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도하운 곁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러나 의문을 표할 상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해로운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어깨를 떨며 울먹이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그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 거다.
‘보이지 않게 됐을 뿐.’
처음, 도하운과 마주쳤을 때 해로운은 도망쳤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건 도하운의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이었다.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모든 봉인이 풀려, 그대로 모습을 감춘 건가 싶었다. 도하운은, 가지고 있던 칭호에 걸맞은 모습을 자주 보여줬으니까.
‘이게 이렇게 되네.’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지금 웃음이 나와?”
“웃음이 나오네…….”
고운 얼굴을 계속 두 눈에 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해로운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자꾸만 감기는 시야를 억지로 다잡았다.
【불멸자(봉인)】
제게 붙여진 것 중 하나.
저 힘을 사용하면 상처 따윈 금방 나을 거다. 죽어가던 몸도 제 기능을 회복할 거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너는, 나를 따라 죽을까.
드는 생각에 해로운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감당할 수 없는 서글픔이 밀려온다. 끅, 끅. 해로운은 힘겹게 버거운 감정을 내뱉으며 도하운의 뺨을 조심스레 쥐었다.
“도하운.”
* * *
“죽지 마.”
들린 말에 숨이 막힌다. 나는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것을 억지로 내쉬며 말했다.
“안 죽어.”
뺨에 닿아있는 남자의 손을 꼭 끌어 잡고서 속삭였다.
“아니, 못 죽어.”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해로운의 입은 다물어져 있는데도.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그와 이마를 맞대고는 두 눈에 차오른 것을 뚝뚝, 떨어뜨렸다.
“너랑 같이 살 거야, 살 거니까. 그러니까, 제발…….”
살아달라고,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해로운에게서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숨소리가 없다.
다정스레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없다.
쿵, 심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지?”
상실감이 밀려온다. 절망감이 그 위를 덮친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 그것들을 섞어버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뺨에 몇 번이나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싫어, 네가 없으면 싫어.”
그렇게 눈을 뜨지 않으면, 나는 죽어버릴 거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남자에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그리 잠을 자라고 악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죽지 마.’
그 말이 족쇄가 되어, 터져 나오려는 말들을 억지로 삼키게 하였다. 밀려 올라오는 슬픔에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차오르는 눈물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뚝, 뚝 뺨을 타고 떨어진 것이 잠든 얼굴 위에 닿았다. 그러나 감긴 두 눈은 떠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냐고, 왜 우는 것이냐며 물어야 할 사람이 계속 잠들어 있다.
인정해야 한다.
“해로운… 제발…….”
나의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이 시간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잠든 얼굴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속삭였다.
“괜찮아.”
로브를 벗어 그가 춥지 않게 덮어주고는 웃음을 지었다.
“다시 만날 수 있어.”
언젠가 네가 건 족쇄를 풀고서.
“너를 찾으러 갈게.”
다시 만날 때는 먼저 인사를 할 거다. 그다음에 한 대 힘껏 때려버려야지.
그리고…….
단 한 번도 내뱉지 못한 말을 건네며, 나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할 거다.
도하운.
너만이 불러줬던, 나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