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하늘에 노을이 깔릴 때쯤, 해로운은 잠든 아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람다!!”
아이의 어머니는 울면서 아이에게 뛰어갔다. 곧장 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다친 곳은 없어요.”
해로운의 말에 여인이 허리를 연신 굽히며 울먹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인이 건네는 감사 인사가 듣기 거북하다. 받아서는 안 될 인사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불편한 속을 가라앉히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아이를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네? 네, 물론이죠! 물론이에요!!”
나는 잠든 아이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얹은 뒤, 성녀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엄마…….”
“람다? 람다!!”
아이의 어머니가 깨어난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서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 역시 제 어머니의 품을 파고들며 엉엉 운다.
나는 두 사람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게 나있는 길을 가리켰다.
“이 길을 쭉 따라 나가면 갈림길이 하나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세요.”
“아…….”
아이의 어머니는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했다.
중앙 신전의 신관들을 도륙한 뒤 마왕군에 붙었다는 성녀.
이를 알 리가 없는 아이가 여기 머물면 안 되냐고 묻는다.
“무섭단 말이에요. 나는 성녀님이 아닌데…….”
나는 잔잔히 미소를 그리고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해로운이 아이의 머리칼에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아이의 주위로 붉은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아이의 검은 머리칼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아이의 두 눈 역시 마찬가지.
해로운이 놀란 아이에게 눈웃음을 지어주며 말했다.
“이러면 성녀님이라고 오해받지 않을 거야, 람다.”
“제 이름을 아세요?!”
“나는 모르는 게 없거든.”
해로운이 아이의 코끝을 살짝 누르며 장난을 건다. 아이는 배시시 웃으면서 해로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해로운이 그런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는 말했다.
“해가 져도 숲은 밝을 겁니다. 들짐승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그렇지?”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로운의 말을 대신 이었다.
“숲을 빠져나가면 갈림길이 하나 나올 거예요. 그곳에서 오른쪽 길을 쭉 따라가세요.”
나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주머니 하나를 억지로 쥐여주고는 말했다.
“제일 처음 만나는 마을에서, 당신과 당신의 아이를 받아줄 겁니다.”
아이의 어머니에게 쥐여준 주머니에는 1년은 거뜬히 살아갈 수 있는 돈이 들어있었다.
여인은 받아 든 주머니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는지, 내게 연신 허리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인은 몇 번이나 인사를 한 뒤에야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 모녀를 돕고, 갈 곳을 정해준 것이 어떤 나비 효과를 불러올지 모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떤 후환도 없게, 당장에라도 저 모녀를…….
“후회해?”
허리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해로운이 귓가에 소곤거리며 묻는다.
“아님, 걱정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해로운은 내 뺨에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모르는 일이지.”
“내가 그렇게 만들게.”
나지막하게 건네는 말에, 작게 웃음을 흘렸다.
꽤나 믿음직스러워서 말이다.
* * *
해로운 다음으로, 아니. 이시온 다음으로 꼴 보기 싫은 녀석이 나타났다.
지한결.
마신에게 몸이 먹혔을 때, 도하운을 공격했던 놈.
우마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지한결은 그 얼굴을 무시하고서, 우마훈의 옆에 앉아있는 강하수에게 양해를 구했다.
“마훈 씨와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잠깐 자리를 피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마훈 군과… 이야기를요?”
강하수가 당신 지금 제정신이냐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지한결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귀환의 길드장님께 긴히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요.”
그 말에 강하수가 표정을 굳혔다. 우마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외적으로 ‘귀환’의 길드장인 도하운은 나빠진 건강으로 외국에 요양을 간 것으로 되어있었다.
이 사실을 알린 건, 길드 하운.
사람들은 드래곤도 때려잡은 사람이 도대체 어디가 얼마나 아프면 그리 요양을 가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하운은 입을 다물었다. 귀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길드, 귀환의 멤버는 도하운을 포함해 해로운과 우마훈, 단 셋만이 대중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도하운이 실종됐고, 그에 따라 ‘길드장’이 바뀐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귀환자들뿐이었다.
“…네놈.”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한결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에 우마훈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강하수에게 말했다.
“저 망할 놈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겠느니라.”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을 것도 없지.”
그 말에 강하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비켜줬다. 강하수가 자리를 뜨기 무섭게 우마훈이 물었다.
“그래서, 짐이 길드장인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추측한 것뿐입니다.”
“추측?”
“네.”
지한결이 눈웃음을 짓는다. 꼴을 보아하니 그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을 것 같다.
우마훈이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할 이야기란 것이 무엇이냐. 본론만 말하고 썩 꺼지거라.”
우마훈의 말에 지한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협회 쪽에서 그쪽 길드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짐이 알 바는 아니니라.”
“도하운 씨께서 돌아오시면 꽤 곤란해할 텐데요.”
거론되는 이름에 우마훈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한결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지만, 우마훈은 그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뒤집으러 간다만.”
“아니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디를 뒤집으러 간다는 건지, 지한결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우마훈을 말린 지한결이 한숨을 푹 내쉰다. 우마훈은 자신을 말린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오기를 한 게 맞는 걸까.’
지한결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걸음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말했다.
“도하운 씨도, 그리고 해로운 씨도 제게 말한 것이 있습니다.”
우마훈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거만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 고갯짓에 지한결이 말을 잇는다.
“당신들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뭐 그런 말이었죠.”
“귀찮게 하고 있지 않으냐.”
“이제 귀찮게 안 할 겁니다.”
우마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한결은 잔잔히 미소를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협회도, 당신들 뒤를 캐고 있는 사람들도.”
조용히, 당신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겠다면서 지한결은 말했다.
그에 우마훈이 심드렁한 얼굴을 보인다.
“우리끼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러게요.”
지한결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 제가 편하려고 말하는 겁니다.”
세계의 대리자니, 수호자니. 그런 거창한 칭호 덕에 활용할 수 있는 스킬은 많았다.
단지, 활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한결이 지친 낯에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도하운 씨께서 돌아오시면 안부 전해주십시오. 해로운 씨께도 부탁드립니다.”
“짐이 네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들어주지 않을 거 알지만, 그래도 전해줬으면 해서요.”
지한결이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는 걸음을 돌린다.
“그럼.”
그러기 무섭게 지한결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에 우마훈이 미간을 좁혔다.
“마훈 군!”
강하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지 팀장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모르겠느니.”
그새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를 떴나 보다. 강하수가 내심 아쉬워하며 우마훈에게 물었다.
“지 팀장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안 해주셔도 됩니다.”
“이상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상한 이야기요?”
“그래.”
사실,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다. 우마훈은 일방적으로 듣고 있기만 했다.
우마훈이 텅 빈 놀이터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두가 알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눴느니라.”
* * *
“그러니까, 그 무능한 놈이 어떻게 했냐면…….”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던 목소리가 끊겼다.
“…해로운?”
“잠깐만, 다음 내용이 기억 안 나서 머리를 굴리는 중이야.”
나는 해로운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기억 안 나면 뭐 어때. 다음에 들려주면 되잖아.”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그걸 까먹으셨다?”
해로운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린다.
“까먹고 싶어서 까먹은 거 아니죠. 로운이 나이가 나이인지라 자주 깜빡깜빡하죠.”
얼마나 많이 먹었다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피식 웃으며 해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찾아온 겨울, 바깥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길을 떠난 모녀가 걱정됐으나, 내가 알려준 마을에 잘 도착했으리라 믿는다.
“잘 거야?”
“아직.”
두 눈을 감으니 주변이 고요해진다. 해로운이 나를 그대로 안고서는 침대로 간다.
“안 잘 거라니까?”
“잘 거 같은데.”
“안 잘 거야.”
해로운이 내 말에도 기어이 나를 침대에 눕혔다.
“아니야, 우리 하운이는 이제 잘 거야.”
“야.”
“네, 하운 씨.”
“…….”
코끝에 닿는 해로운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걸려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나는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잘 거지?”
나는 말없이 해로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해로운이 그런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눕는다.
나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해로운에게 두서없는 말을 내던졌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의 세상에도 겨울이 찾아왔을까. 그렇다면 몇 번째 겨울이 찾아왔을까.
뒤에서 나를 끌어안는 손이 느껴졌다.
“돌아가고 싶지, 그런데 못 돌아가.”
고개를 돌려 해로운을 쳐다봤다.
조금 전의 대답은, 마치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물었다.
“왜?”
해로운이 다갈색 눈을 휘게 접더니 뺨에 입을 맞춘다.
“…이렇게 대답을 피하시겠다?”
“응.”
해로운이 나를 꼭 끌어안고서는 머리칼에 얼굴을 묻는다.
답하기 싫다는 것을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 때문에 더는 묻지 않고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나는 이대로도 좋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