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도대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감았다 하면 악몽밖에 꾸지를 않아서 잠을 잘 안 자는 편인데…….
“일어났어?”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맞이한 개운한 아침에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게 해로운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건넨다.
“그거 알아? 하운이, 네가 지금 선 넘고 있는 거.”
“뭐……?”
무슨 말인가 했는데, 어젯밤에 그려놓은 선을 내가 넘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니 해로운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가 해로운이 입고 있는 옷에 나도 모르게 물었다.
“…어디 가려고?”
“여기, 상인들의 도시라며? 몇 가지 얻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해로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신전을 떠날 때 챙겨온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발목을 조심스레 쥔다.
아물었다가 다시 덧나기를 반복 중인 상처 위에 손길이 닿는다.
“…괜찮다니까? 걷는 데 무리도 없어.”
“내가 싫어.”
해로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멀리 나가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여기, 지리도 모르니까.”
그대로 방문을 연 해로운이 나를 보고는 방긋 웃음을 짓는다.
“그럼, 다녀올게요.”
“…….”
어서 꺼지라며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해로운은 밝게 웃으면서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낡은 나무판자가 어그러지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나는 창문 밖으로 여관을 떠나는 해로운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 중얼거렸다.
“나도 나가볼까.”
바체에는 훗날, 성녀의 힘을 구속하는 성능을 가진 아이템이 등장한다.
아이템이 등장하는 시기를 명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아이템을 획득하는 세력이 한 곳 있었다.
바체의 상인 조합에서 쫓겨난 놈들이 세운 정보 길드인데, 바체에 들리면 꼭 제거하는 곳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굉장히 성가셔질 테니.
그런 비겁한 변명을 하며, 나는 그들을 죽이러 나섰다.
* * *
“…이상해.”
거리를 걷던 해로운이 자리에 멈춰 서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몸짓, 표정 하나하나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버퍼링에 걸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다.
해로운은 주변의 소리가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에 표정을 굳혔다.
“바람도 불지 않고…….”
쌀쌀한 날씨라 겉옷을 두껍게 챙겨 입은 보람이 없다. 해로운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이 움직이지를 않네.”
시계탑 위에 걸려있는 구름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시곗바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건, 찬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해로운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다.
“아니, 글쎄! 라비앙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지 뭔가!!”
“……!”
삽시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삐걱거리는 장난감 병정처럼 다리를 움직이던 사람들도 자연스레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해로운은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멍하니 입술을 움직였다.
“…도하운.”
“여기 있었네.”
단조로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로운은 멍한 얼굴을 보였다. 도하운이 나타나기 무섭게 세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에 해로운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 해로운이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걱정돼서 따라 나왔어?”
“설마.”
단호하게 말을 내뱉은 도하운이 해로운을 손을 잡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 잠깐, 하운아? 길마님?”
“길마님이 아니라 도하운.”
혼잡한 인파를 척척, 걸어나가며 도하운이 물었다.
“아직 필요한 거 못 찾았지?”
해로운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운은 다행이라면서 해로운을 이끌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여러 상점이 입주해 있는 5층 규모의 건물이었다. 해로운은 자신을 왜 여기로 데려왔냐는 듯이 묻는 얼굴로 도하운을 쳐다본다.
그 시선에 도하운이 대답했다.
“좋아해, 여기.”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드러나는 감정이 없는 얼굴이다.
도하운은 잡고 있던 해로운의 손을 놓고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로운이 도하운을 놓칠세라 빠르게 뒤를 따라붙었다.
도하운은 해로운을 흘긋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지하상가 같거든.”
“지하상가?”
“응.”
해로운이 양옆으로 들어서 있는 상점을 보고는 웃음을 짓는다.
“쇼핑하는 거 좋아했나 봐?”
“친구가 좋아했어.”
들린 말에 해로운이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도하운이 말한 ‘친구’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하운아.”
작게 내뱉은 목소리를 도하운은 듣지 못했다. 해로운보다 앞서 걷던 도하운이 벤치에 앉고서는 말한다.
“여기 뭐든 다 있으니까 다녀와. 필요한 거 찾을 수 있을 거야.”
왜인지 모르게 지친 것 같은 기색에 해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좀처럼 걸음이 떨어 지지가 않는다. 도하운이 그런 해로운을 보고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다녀오라니까?”
이번에도 해로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뭇거렸다. 그에 도하운이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 일도 안 벌어질 거야.”
의외의 말에 해로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하운은 그 얼굴에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어디 가지도 않을 거고, 무슨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다녀와.”
해로운은 그제야 머쓱하게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하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역시.”
사람들의 움직임이 다시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들리는 말소리라곤 없고, 맡아지는 냄새도 없다. 곳곳에 향신료를 가득 뿌린 음식이 널려있는데도 그랬다.
해로운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슬프게 웃음을 지었다.
“도하운이 세상의 중심이구나.”
원래 이런 세계였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 세계는 왜 이렇게 망가진 걸까. 왜 도하운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 걸까.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의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해로운.”
“……!”
들린 목소리에 해로운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가게 주인이 너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거 안 보여?”
그 말에 해로운은 그제야 자신이 서있는 곳을 인지했다.
약초가 가득한 약방.
“안 살 거면 가시지요, 나으리?”
가게 주인의 다소 날 선 목소리에 해로운이 허겁지겁 약초를 고르기 시작했다.
도하운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 돈은 있어?”
“응, 네 거 가지고 나왔는데.”
“…뭐?”
해로운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하운은 짜증스레 얼굴을 구겼다가 해로운의 눈가에 맺혀있는 것을 보고는 다가갔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해로운이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가… 갚을 거죠! 진짜로 갚을 거죠!”
“시끄러.”
도하운은 그대로 해로운의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성녀의 힘을 사용했다. 몸속에서 퍼져나가는 따뜻한 기운에 해로운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운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도하운이 놀란 듯 입술을 벌리더니 이내 비웃음을 띠며 이를 달싹인다.
“돌아가고 싶지. 그런데…….”
지친 듯 읊조리는 목소리 끝에 분노가 실렸다.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절망에 가득 찬 도하운의 목소리를 들으며 해로운은 잊고 있던 한 가지가 생각났다.
귀환의 조건은 죽음.
해로운이 이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 *
해로운은 이상한 놈이다.
나와 같은 차원 이동자 주제에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를 마법을 부리는 것도 이상하다.
수상쩍다는 게 맞는 표현일 테지만, 어쨌든 제일 이상한 건 나에 대해 안다는 듯이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는 거다.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니.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들은 해로운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일그러져 있다.
돌아갈 방법을 아는데, 이를 행할 수가 없어 미안하다는 듯이. 그런 해로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다 샀으면 어서 돌아가자. 곧 경매가 열릴 시간이라서 북적거릴 거거든.”
놓치지 않게 따라오라며, 덧붙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너…….”
상대는 뻔했다.
해로운이 언제 얼굴을 일그러뜨렸냐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보며 말한다.
“이렇게 손잡으면, 놓칠 일도 없잖아. 안 그래?”
나는 짧게 혀를 차는 것으로 대답해 주었다. 어쨌든 해로운의 말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로운과 함께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 경매에 올라오는 게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라며?”
“노예로 부려먹기 딱 좋겠구만!”
“노예로 부려지기도 전에, 화형을 당할 것 같더군! 완즈 님께서 노리고 계시거든!”
지나가는 대화 소리에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저들이 말한 마족과 인간의 혼혈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다. 구한 적도 있는 아이다.
그것도 꽤 많이.
그러나 이번에는 구하지 않을 거다. 구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도 노예가 있어?”
함께 걷고 있는 해로운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상황은 바라지 않는다.
그 때문에 나는 다소 걸음을 빨리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없어. 다들 불법으로 부리고 있을 뿐이지.”
“그래……?”
해로운이 다소 환멸이 난 듯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여기도 그렇구나.”
무언가 이상한 말이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질문도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했다.
‘이 세상에도 노예가 있어?’
우리 세상에는 ‘노예’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존재했었다면 몰라도 말이다.
“너는…….”
나의 세상에서 온 것이 아니냐고, 그리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도 해로운은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다.
북적거리는 인파에 나를 놓칠세라 내 손만 꼭 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 모습이 아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해로운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니 나도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다.
괜한 것을 물었다가 이 관계가 어그러지면 안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