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글로리아(Gloria).
그 이름이 적힌 문을 열기 전에 해로운은 고민했었다.
도하운을 만난다면, 어떤 얼굴로 무슨 말을 건넬지 말이다.
왜 떠나간 것이냐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보고 싶었다면서 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뭐냐니까?”
살갗에 닿는 검에 해로운은 허망한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해?’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두 눈에 해로운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또한, 관심도 없다.
그 증거로 해로운의 목에 들이밀어진 검이 빠르게 움직였다. 가까스로 이를 피한 해로운이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 질렀다.
“길마님! 나야!!”
“……?”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모습에 해로운이 입술을 꾹 깨물며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나라고 소리를 지르다니.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었다.
하지만 도하운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길마님이라면 길드의 마스터?”
그에 해로운이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에 도하운이 비딱하게 웃음을 지으며 해로운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어느 길드?”
“어……?”
검을 치켜든 도하운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보 길드 쪽 사람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물을 사냥하는 놈도 아닌 것 같은데.”
화색을 띠던 해로운의 얼굴에 낭패가 서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지는 낯빛에 도하운이 걸음을 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신전에서 그새 사람을 고용했었나 보네.”
내가 뭔 짓을 벌이면 죽이려고.
덧붙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운은 검을 휘둘렀다. 후웅, 바람을 가른 푸른 궤적이 해로운을 향해 날아든다.
해로운이 입술을 짓씹으며 마법을 펼쳤다.
콰과광―!
반으로 갈라진 검격에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도하운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로운을 향해 걸음을 뗐다.
“잠깐, 이야기 좀……!”
도하운은 해로운의 절박한 외침을 무시하며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카각―
휘두른 검이 붉은 마법진에 가로막혔다. 도하운은 짧게 혀를 차고서 걸음을 뒤로 물렀다. 느닷없이 벌어진 대치 상황에 해로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야기를 나눠야 해.’
하지만 어떻게?
해로운은 떨리는 눈으로 도하운을 바라보았다.
기억보다 창백하게 질린 피부, 그 뺨에 말라붙어 있는 붉은 핏물이 보였다.
입고 있는 옷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 하얬을 것은, 붉게 점칠 되어 곳곳이 찢겨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을 겨를은 없었다. 푸른 궤적이 다시 한번 더 날아와 해로운이 펼치고 있던 방어 마법진을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허억……!”
내상을 입은 몸에서 울컥, 입 밖으로 핏물이 올라왔다. 힘이 풀린 다리가 꺾인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있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간단히 자신의 마법을 깨뜨릴 줄은 몰랐다.
도하운은 쿨럭거리며 기침을 토해내는 해로운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그의 목을 내리치려던 순간.
“도하운, 제발……!”
들린 이름에 도하운은 허공에서 검을 멈췄다.
‘이름 따윈 버리세요, 성녀님. ‘성녀’라는 지위만으로도 당신을 칭하기에는 충분하니 말입니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자신의 이름.
도하운이 쥐고 있던 영광의 검을 아래로 내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돌변한 태도에 해로운이 다소 놀란 눈을 보이며 입을 뻐금거렸다.
“제발… 이라고.”
“그거 말고.”
도하운이 바닥에 꿇어앉고는 해로운의 멱살을 잡아 얼굴 가까이 이끌었다.
“내 이름 불렀잖아.”
“…….”
충동적으로 부른 이름이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빌 듯이 불렀던 이름.
‘잘못 부른 거라고…….’
그렇게 변명을 할까.
하지만 해로운은 도하운의 두 눈에 맺힌 것을 보고 하려던 말을 말았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며 보고 싶었던 이의 이름을 굴렀다.
“하운아, 도하운.”
들려오는 이름에 도하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두 눈에 맺혀있던 것이 기어코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하운은 숨죽여 울음을 터트리며 해로운의 어깨에 끌어 잡았다.
해로운은 그런 도하운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이름을 속삭여 주었다.
도하운이 눈물을 그칠 때까지, 몇 번이고.
* * *
“헉…….”
내 눈치를 살피는 남자의 이름은 해로운. 모든 회차를 통틀어서 처음 등장한 녀석이다. 오래되어 흐릿해진 기억이 있기는 하나, ‘해로운’이란 이름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저 멍청한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애초에 이름이 ‘해로운’이란다. 저런 특이한 이름이라면 기억에 남을 법도 한데…….
“모르겠단 말이야.”
“응?”
“국자 내려놓고 앉아있기나 해.”
독극물이라도 제조한 것인지, 냄비 안에 담긴 수프가 거무죽죽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냄비에 담긴 것을 모조리 쏟아버렸다.
그에 해로운이 다급하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야. 처음 만져보는 재료라서 실수했어! 나 원래 요리 잘한다?”
“무슨 요리를 그렇게 잘하는데.”
“라면.”
“…….”
“김치찌개도 잘해!”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를 보아하니, 해로운은 나와 똑같이 글로리아로 날아온 녀석인가 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법은 누구한테 배운 거야?”
암만 생각해도, 내게 보였던 마법은 글로리아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들의 것이 아니었다. 내 물음에 해로운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비밀이죠.”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으나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그보다, 도하운 씨.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신전에 계속 있으면 되지 않았냐고 해로운이 묻는다. 그 질문에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해로운은 신전에 널려있던 시체를 말끔히 치워줬다. 낭자하게 흩뿌려져 있던 핏물 역시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지만 벗어나야 했다.
성하가 소수의 신관을 데리고 나를 피해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성하가 도망치는 상황은 오랜만인데.’
그들은 머지않아 성기사들을 이끌고 나를 잡으러 올 거다. 그 때문에 신전을 벗어나야 했다.
성하가 이끌고 올 성기사 중에는, 영광의 검을 막아낼 수 있는 놈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하운 씨,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시끄러.”
나불대는 입을 다물게 만들고는 다시 끓인 수프를 녹슨 그릇에 담았다.
“로운이는 안 주나요?”
“네가 알아서 퍼먹어.”
그보다 저 나이 먹고 제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고 싶나 보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놈이었다. 해로운은 울상을 짓고서 다시 끓인 수프를 자신의 그릇에 덜었다. 그렇게 한 입 먹었을 때.
“우웁!”
“……?”
해로운은 입안에 넣었던 것을 도로 토해냈다. 아주 더럽게 말이다.
해로운이 냇물에 입을 헹구고는 내게 묻는다.
“이걸 먹겠다고? 제정신이야?”
“제정신인데.”
나는 한 입 꿀꺽 삼키고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배만 채우면 되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해로운이 말을 길게 흐리더니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음식물 쓰레기로 요리를 한다고 해도 이렇게 맛이 없지는 않을 텐데.”
“뭐?”
“아니, 아무 말도 안 했어. 하지만, 하운아. 요리는 이제 내가 맡을게.”
“네가 맡는다고?”
해로운이 만든 독극물과도 같은 수프는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해로운이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열심히 공부할 거죠!”
“퍽이나.”
나는 수프를 한 입 떠다 먹으며 말을 이었다.
“빨리 먹기나 해. 바로 이동할 거야.”
“어디로 갈 건데?”
목적지를 말해줘야 할까.
얼떨결에 데리고 다니게 됐지만, 이걸 말해줘도 될지 모르겠다.
…눈앞의 ‘해로운’이란 놈이 글로리아의 손아귀에 있는 장난감일지도 모르는 일이니.
“도하운?”
하지만 들리는 나의 이름에 답해주기로 했다.
“마왕군에게.”
“마왕?”
수프가 담긴 그릇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북쪽에서 세를 확장 중이거든. 마왕군과 합류해서 북쪽 신전을 무너뜨릴 거야.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유희를 즐길 거라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쪽으로 갈 거야.”
“굳이 마왕이어야 해?”
못마땅하다는 듯이 묻는 목소리에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역시 눈앞의 남자는 뭔가 이상했다.
글로리아의 것과는 다른 마법을 부리는 차원 이동자.
이것만으로도 수상한데, ‘마왕’을 들먹이는데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굳이 마왕한테 가야 하냐는 듯이, 불만스러운 기색을 내비칠 뿐이다.
나는 한쪽 눈가를 찡그리고선 말했다.
“불만이면 여기서…….”
갈라지자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내 이름을 불러줄 유일한 사람이다.
수를 셀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처음 등장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그렇기에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냥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그에 해로운이 웃음을 짓는다. 마치, 내가 삼킨 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왜?”
능청스레 묻는 목소리에 나는 대답 대신 챙겨온 단검을 치켜들어 이를 던졌다.
“……!”
해로운의 뺨에 기다란 생채기가 났다. 상처에 맺힌 핏물이 흐르기도 전에 수풀 속에서 째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로운의 뺨에 난 생채기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길게 난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모습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어주고는 영광의 검을 쥐었다.
해로운은 그제야 입을 뻐금거리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길마님… 진짜, 너는……!”
“길마님이 아니라 도하운.”
수풀 속에서 성하가 보낸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고쳐잡으며 뒤에서 상황을 파악 중인 해로운에게 말했다.
“이름으로 불러.”
그 목소리를 내뱉기 무섭게 성하에게 고용된 암살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를 가든 지금보다 배의 숫자가 나를 따라붙을 테니.
그렇게 검을 휘두르려 할 때.
타앙―!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 총탄이 선두로 달려 나오던 놈의 이마를 꿰뚫었다. 삽시간에 고요해진 주위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너.”
“너가 아니라 해로운.”
붉게 펼쳐진 마법진에, 장총을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남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가씨.”
싱긋, 웃음을 짓고 있는 얼굴에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수상하고 자시고 이 자식은 그냥 위험한 놈인 것 같다. 데리고 다녀도 될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