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15.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어렵지 않다
사시사철 들꽃이 만발해 있는 곳.
처음에야 꽃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에 신기해하지만, 그 광경을 수도 없이 보면 말이 달라진다.
“성녀님.”
그러나 나를 부른 남자는 달랐다.
그는 언제나 이곳이 글로리아의 축복이 가득 담긴 곳이라며 황홀경에 담긴 눈으로 보고는 했다. 나는 들린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두 눈에 담았다.
어쩌다 다시 시작하게 됐더라.
아니, 어떻게 죽었더라.
다른 것은 모두 기억나는데, 맞이했던 ‘죽음’만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 그 부분만을 가위로 오려내 버린 것만 같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글로리아가 이상한 수작을 부린 건가 싶다.
어쨌거나 다시 시작해야 한다.
“성녀님, 날이 많이 찹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먼저, 내게 말을 건네며 귀찮게 구는 남자를 떼어내야겠다. 내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남자는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이곳에 조금 더 머물고 싶으시다면, 외투라도 걸치십시오.”
어깨 위에 얹어진 것을 곧장 바닥에 버리며 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곧장 주워들고는 내 뒤를 따랐다.
“성녀님을 뵙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였답니다.”
“그래서.”
“성녀님께서 찬 기운에 앓아눕기라도 하시면…….”
“단테.”
들린 목소리에 담긴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젯밤까지 내 발목을 조이고 있던 족쇄가 있었다. 도망칠 생각 따윈 없다고, 그리 말했는데도 눈앞의 남자는 믿지 않았다.
기어이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성녀의 힘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성녀님의 몸에 상처라니요.’
누군가 이를 알게 된다면, 글로리아의 존재를 의심하며 수군댈 거라면서 성하는 내게 상처를 가리고 다닐 것을 지시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방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성녀의 자질을 의심하여 몇 날 며칠 동안 그 힘을 쓰도록 한 적도 있었으니.
지나가 버린 날들을 생각하니 속이 거북해졌다.
‘죽일까.’
내 뒤를 따르고 있는 남자를 쓰러뜨려, 저 목을 졸라버릴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래서는 안 됐다.
남자를 죽이는 것은 영광의 검을 손에 쥐고 난 후에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글로리아의 중앙 신전에서 벗어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웃음을 지으며 남자에게 손을 건넸다.
“외투를 줘.”
남자가 웃음을 짓고선 내게 다가온다. 내가 내민 손을 지나친 남자는 직접 내 어깨에 외투를 걸쳐줬다. 드러난 어깨에 남자의 손길이 닿는다.
살갗을 스친 저 손을 당장에라도 잘라내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앓아누울 일은 걱정하지 마.”
나만이 기억하는 일들을, 외투를 여미며 잠재우고선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를 이리 걱정해 주는데 앓아누울 일이 뭐가 있겠어.”
필요한 건 영광의 검이다.
중앙 신전의 보물을 강탈하여, 성하와 신관들을 비롯한 모두를 죽이고서 마왕군에게 향할 거다.
‘이번에는 유희(遊戲)야.’
반복되는 삶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해도, 어떤 식으로 죽어도 다시 글로리아의 중앙 신전에서 두 눈을 떴다.
[절대 불변의 맹세의 장(場)]
아득하게 멀어진 첫 번째 삶에서 성하의 말을 따라 글로리아에게 맹세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영원히 글로리아 님의 아래에서 살아가겠다고, 그리 맹세하면 된답니다.’
그럼 언젠가,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면서 성하는 달콤하게 속삭였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성녀님.”
…그 말을 믿어서는 안 됐는데.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백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성하가 내게 손을 내민다.
“많은 분께서…….”
“나를 만나기 위해 모여있다고? 단테한테 들었어.”
성하의 말을 끊고서, 굳은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은 고운 손을 맞잡았다.
으스러뜨릴까.
이는 충동을 잠재우며.
“가자, 성하. 글로리아 님의 은혜를 많은 사람에게 베풀어야지.”
증오해 마지않는 이름을 입에 올리며 미소 지었다.
* * *
“여기라고?”
미심쩍어하며 묻는 목소리에 강하수는 지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으세요, 정령사님?”
유대공의 물음에 강하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강하수의 어깨를 최강이 힘내라는 듯이 두드린다.
해가 막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새벽, 해로운을 선두로 귀환의 모두가 공원 한가운데에 모여있었다. 그들 중 강하수만이 자리에 주저앉아 지친 낯을 문지르는 중이다.
‘죽겠다.’
입은 상처는 없지만, 온몸의 근육이 움직이지 좀 말라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망할 해로운 놈.’
해로운은 언약을 푸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았을 거다.
‘그러니 자기 몸에 걸려있는 언약은 그대로 두고 있는 거겠지.’
실프를 이용하는 것이 도하운을 찾을 유일한 방법이라면서, 모두가 강하수를 다독이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 도망쳐 버렸을 거다.
“그런데 정령사 형아, 길짱님이 여기 계시는 거 맞아요?”
“길드장님은 보이지도 않는데.”
이시온의 말에 강하수가 힘없이 웅얼거렸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너머에 계시는 게 분명합니다.”
“너머에?”
이시온이 미간을 살포시 좁혔고, 강인한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내 눈에는 놀이터밖에 보이지 않는구나. 너희 눈에는 뭔가 보이는 게 있니?”
강인한이 말한 ‘너희’에는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유대공과 해로운, 그리고 우마훈이 포함됐다.
먼저 답을 한 건 유대공이었다.
“느껴지는 건 있어요. 저보다는 법사님이나 마왕님이 잘 알 것 같네요.”
―맘마!
“림이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다네요.”
“그 느껴진다는 게 뭔데?”
이시온의 물음에 유대공이 하림이를 꼭 끌어안고선 자신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마력과 유사한 기운이 한 군데에 뭉쳐져 있는 게 느껴져요. 드슬님도 집중하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유대공의 말에 이시온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대공님, 드슬님은 멍청해서 그런 거 말해줘도 못 알아듣죠.”
“뭐라고?”
“응?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해로운이 이시온을 향해 방긋 웃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우마훈이 따른다. 해로운이 그런 그를 흘긋거리며 물었다.
“여기인 거 같지?”
우마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에 해로운은 곧장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대공의 말대로 마력은 아니나 그와 유사한 기운이 한데 뭉쳐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해로운은 비딱하게 웃음을 짓고서 그대로 이를 잡아, 책장을 넘기듯 공간을 접어버렸다. 그러자 놀이터밖에 보이지 않던 공간에 푸른 박으로 장식된 새하얀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우, 저 문을 열어야 길짱님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요? 저만 그래요?”
“나도 그렇게 느끼는 중이란다.”
그러나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정적이 찾아온 가운데 먼저 걸음을 옮긴 사람은 이시온이었다.
거대한 문 앞에 서고 나니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다.
‘엘로시아.’
제국을 수호하던 대마법사.
그녀에게서 느껴졌던 기운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것이 문에 서려있었다.
애틋하게 이는 감정에 이시온은 자신도 모르게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함부로 만지려고 하지 마.”
그걸 막은 건 해로운이었다.
이시온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선 해로운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사이 우마훈이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직―!
강하게 이는 전기가 우마훈의 손을 할퀴고 지나갔다.
“마왕님! 괜찮으세요?!”
“마훈 군, 괜찮으십니까?!”
뚝뚝, 떨어지는 핏물에 해로운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함부로 만지려고 들지 말라고 했잖아.”
왜 이렇게들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다면서 해로운은 우마훈의 손을 치료해 줬다.
해로운이 사용하는 힐(Heal)은, 도하운이 가진 성녀의 힘과 유사한 것이라 우마훈은 그 과정에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로운은 우마훈의 손을 치료해 주고선 거대한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름값 하네.”
상단에 적혀있는 문자는, 그 누구도 쉬이 읽을 수 없는 이 세계의 것이었다. 하지만 해로운에게만은 다르게 보였다.
[Gloria]
도하운이 머물렀었던 세계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다던 뜻의 단어였다.
“마왕님은 문에서 최대한 멀어져 있는 게 좋겠다.”
해로운의 말에 우마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해로운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히 다쳤다가 길마님이 보고서 속상해해도 나는 모른다?”
그제야 우마훈은 해로운의 말을 따랐다. 우마훈과 같이 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강인한이 해로운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열어야지.”
“어떻게요?”
“어떡하기는. 대공님 눈에는 문에 달린 손잡이가 안 보이나 보죠?”
그러니까, 지극히도 평범하게 손잡이를 잡고서 문을 열 거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되냐고, 물으려던 유대공은 환하게 터지는 빛에 말을 멈췄다.
“돼!!”
빛이 가시고 모습을 드러낸 건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한 하림이었다. 하림이가 해로운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로우니는 돼! 아쁘아는 안 돼!!”
하림이의 말에 유대공이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림아, 아빠는 왜 안 돼?”
“약하니까! 휩쓸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해로운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는 다르게, 유대공은 불퉁한 얼굴을 보였지만 말이다.
해로운이 그런 유대공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림이가 아빠 걱정도 다 해주고, 아주 다 컸어?”
“놀리지 마요.”
뚱한 목소리에 해로운이 키득거리고는 하림이에게 물었다.
“엄마 보고 싶지, 림아.”
“웅!”
해로운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림이의 얼굴에 잔잔히 미소를 짓고선 문으로 다가섰다.
“다들 하림이가 나는 된다고 한 말 들었지?”
“애가 하는 말이잖니.”
“그 애가 드래곤이죠, 용사님.”
생후 한 달이 겨우 넘었지만,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이 세계에 나타나는 드래곤과는 달리, 모든 마력의 정점에 선 생명체란 말이었다.
“나는 갈 거야.”
그리고 길드장은 다시 바뀔 거다. 해로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강인한을 쳐다봤다.
“다음 길드장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용사님이셨으면 좋겠죠.”
“나는 우마훈이 될 것 같구나.”
강인한의 심드렁한 말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오, 이프리트시여! 마왕님이 길드장을 맡게 될 거라니요!!”
“길드 탈퇴는 불가능하죠?”
유대공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이시온이 말했다.
“여기 오기 전에 시도해 봤는데, 여전히 불가능하더라고.”
그에 해로운이 매서운 눈초리로 이시온을 노려봤다.
논란의 중심이 된 우마훈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을 뿐이었다. 그때 최강이 말했다.
“다들 마왕 형아한테 왜 그래요! 생각보다 잘 굴러갈 수도 있죠!!”
우마훈이 기특하다는 듯이 최강을 바라본다.
“물론, 망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 우마훈은 눈가를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해로운이 그 얼굴을 보곤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로운.”
그런 그에게 강인한이 묻는다.
“저 문 안에서 길드장을 찾았다고 치자. 하지만 어떻게 데리고 올 거니?”
들린 질문에 해로운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잖아, 귀환의 조건.”
묵직하게 내려앉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해로운만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 번이 어려울 뿐이잖아?”
그 어려운 한 번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겪었다. 그러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 거라면서 해로운은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다녀올게.”
돌아올 때는 도하운과 함께일 거다. 함께 돌아왔을 때 이 세계의 시간이 얼마나 지나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야 했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뭐야, 너.”
해로운은 예상보다 빠르게, 정말 빠르게 도하운을 마주쳤다.
목에 검이 들이밀어졌다는 게 문제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