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쏴아아―
쏟아지는 비를 묵묵히 맞다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바쁘신 분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야?”
“마왕님께서 여기 계신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정령사님께서 우산을 접고선 나를 본다.
“우마한 길드장님께서 애타게 찾고 계시거든요.”
운디네라도 부른 모양인지, 쏟아지는 빗줄기가 강하수만을 피해가고 있었다.
강하수의 말에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왕님은 안에 계셔. 다친 곳은 내가 치료해 줬으니까 데리고 가.”
“그렇군요.”
단조로이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고자 했다.
“그런데 길드장님, 제 질문에 아직 답해주시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강하수가 나를 붙잡았다.
정령사님께서 웃는 낯으로 내게 질문을 건넨다.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정령사님은 몰라도 되는 곳.”
내 말에 정령사님께서 눈웃음을 짓는다. 그러곤 내게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넸다.
고맙다고 받아들고선 주저하다가 이를 펼쳤다. 그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마십시오.”
“…….”
답이 없는 내게 강하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멀리 가셔도 상관없답니다. 길드장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찾아낼 방법은 있으니 말입니다.”
“정령사님, 무서운 소리를 잘도 하시네.”
무서운 소리는 내가 더 자주 하지 않냐면서 정령사님께서 웃는다. 그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정령사님은 내가 어디를 가든 알 수 있겠지?”
이프리트만 하도 외쳐대서 잊기 쉽지만, 강하수는 ‘실프’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H-Entertainment’에서 일어났던 적합자 심사를 떠올려 보건대, 강하수가 부리는 바람의 정령은 사람의 흔적을 쫓는 것이 가능했다.
내 말에 강하수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하나 남은 언약을 여기서 맺자.”
“…지금, 뭐라고.”
“언약을 맺자고 했어.”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에 성큼, 다가가서는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정령사님께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강하수, 네가 나를 찾지 않는 거야.”
강하수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들려온 것은 분을 참는 목소리였다.
“뭐 하자는 짓입니까.”
“그거 이시온이 자주 묻는 말인데.”
“길드장님.”
장난치지 말라는 듯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잔잔히 미소를 그렸다.
[금단의 언약(Lv. ??), 지정 대상 ‘신살자’와 ‘정령사’]
[갑(甲): 신살자 → 을(乙): 정령사]
마왕님이 있어야 하는 일이면 어쩌나 했는데, 도중에 멈췄던 것이라 그런지 마법이 저절로 발동됐다.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강하수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그러나 선택지는 하나뿐일 거다.
[세 번째 언약이 맺어졌습니다.]
나타난 메시지에,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해로운을 부탁할게.”
네가 있으면 잘할 거야.
덧붙인 말에 강하수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그 얼굴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누구에게 누구를 부탁해, 도하운?”
찾아오지 말아줬으면 했는데.
느릿하게 돌아본 얼굴에 해로운이 비딱하게 웃음을 짓고서 서있었다.
“길마님, 지금까지 우리를 잘만 가지고 놀았잖아.”
성큼, 다가오는 걸음에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려고 그래? 응?”
다가온 해로운이 내 손목을 잡는다. 그 탓에 잡고 있던 우산이 아래로 떨어졌다. 땅바닥을 구르는 우산에 차가운 빗방울이 다시 머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가지고 놀았던 적 없어.”
“네가, 나를……!”
해로운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다.
“우리를 떠나는 순간, 가지고 논 게 되는 거야.”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이 빈 알갱이와도 같은 웃음을 흘리며 해로운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에 해로운이 울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내게 말한다.
“내가 마음대로 사라지려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잡힌 손목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디를 가려고 그래.”
“왜, 따라오려고?”
“아니.”
나를 코앞까지 끌어당긴 해로운이 비딱하게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네가 어디를 가든,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와 동시에 붉은 마법진이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곤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을 풀어냈다. 해로운을 붙잡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내 손목을 놓아주고서 멀찍이 떨어진 해로운이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정령사님, 나 좀 도와줘. 우리 길마님께서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려 하거든.”
벌어진 상황에 당황해하던 강하수가 이윽고 해로운을 돕기 시작했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언제 어디서 성하가 글로리아의 신관들을 이끌고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나타난 그들이, 해로운과 강하수를 노리려 든다면?
그럴 수야 없지.
[권능, ‘성언(聖言)’이 활성화됩니다.]
“그만해.”
“……!”
얼굴을 날카롭게 할퀴고 가던 바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멈췄다. 그러나 붉은 마법진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해로운이 다갈색 눈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을 휘게 접으며 말했다.
“길마님께서 그만두시면, 나도 그만둘 거야.”
“해로운……!”
어떻게 신살자의 힘이 먹히지 않는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붉은 마법진 안에서 나타난 쇠사슬이 나를 묶으려 든다. 곧장 영광의 검을 쥐어 이를 휘둘렀다.
상처를 입히기 싫었다. 그렇다고 잡힐 수는 없다.
[권능, ‘성역(聖域)’이 활성화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다.
짓누르는 중력에 해로운이 몸을 비틀거리다가 주저앉는다. 강하수가 그런 해로운을 돕고자 움직이려 들었다.
“움직이지 마, 강하수.”
그런 정령사님께 나지막하게 경고를 내뱉고는 미소를 그렸다.
“내가 사라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일이야.”
“너한테만 좋을 일이겠지.”
짓씹듯이 내뱉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다. 해로운이 내리누르는 중력을 억지로 이겨내고선 나를 바라본다.
“못 가.”
한 걸음씩, 힘겹게 다리를 움직이며 다가오는 모습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포기할 법도 하건만, 어떻게든 나를 붙잡으려 들고자 한다. 그에 해로운을 짓누르고 있는 중력에 더욱 힘을 가했다.
내디딘 걸음이 무너지고, 두 손이 바닥을 짚는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 붉은 마법진이 생겨나는가 싶더니 곳곳에서 전기가 튀기 시작했다.
“해로운……!”
성역을 파괴할 수 있는 힘 따윈 없을 거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이 우습게도, 성역은 아주 간단히 파괴돼 버렸다.
성언에 이어 성역까지.
나의 힘을 파괴해 버린 해로운이 울컥, 피를 토해내고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가 못 간다고 했지……!”
손을 뻗으며, 달려드는 이를 향해 사슬을 움직이며 검을 들었다. 강하수가 부디, 해로운을 붙잡아 내게서 떨어뜨리기를 바라며 검을 휘두르고자 했다.
그러나.
“모시러 왔습니다, 성녀님.”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푸른 마법진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뻗어지는 손이 보인다.
“도하운!!”
잡으라며, 아니. 잡아달라면서 내민 손에 쥐고 있던 영광의 검을 떨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미안.”
허망함에 잠긴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푸른 마법진과 함께 그를 떠났다.
푸르게 이는 빛이 가시고 난 뒤에 보인 사람은 성하였다. 말없이 내게 다가온 성하를 보며 힘없이 물었다.
“우리 돌아갈까?”
“…네?”
다소 뒤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너의 신이 되고, 너는 나를 따라서.”
이곳의 하늘은 맑았다. 차라리 비가 내렸으면 했다. 그렇다면 뺨을 타고 흐르고 있는 이것을 아무도 보지 못할 텐데.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 않고서 성하에게 말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벗어나 사라지자고, 우리.”
성하가 한쪽 눈가를 찡그리고선 내게 말한다.
“글로리아 님의 힘을 사용하여, 저희를 불러 한다는 말이 사라지자는 건가요?”
“돌아가자는 거야.”
성하의 말을 정정해 주고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네가 품은 사람들, 놓아주고 싶지 않아?”
성하는 불쾌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이 세상에서 놓아줘도 되는 일이랍니다, 성녀님.”
당신께서 당신 스스로를 저버리고, 글로리아 님을 놓아주시기만 하면 된다면서 성하는 말했다.
나의 죽음을 쉽게 종용하는 목소리에 물었다.
“죽은 신을 어떻게 놓아주지?”
나의 말에, 성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산산이 조각나 묶여있는 힘을, 네가 이어 붙여주기라도 하려고?”
“그렇게 할 거랍니다.”
“아니, 못 해.”
성하의 말을 간단히 부정하고는, 글로리아를 따라 이곳에 온 자들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한들, 네가 품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아가지 못할 거야.”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이 세상이 ‘글로리아’를 거부할 테니.
“그러니 내가 너의 신이 될게, 성하.”
무너져 버린 차원을 되돌려, 영원토록 그곳을 지키는 신이 될게.
나의 말에 성하가 소리 없이 웃는다. 기쁘다는 듯이, 환희에 찬 듯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어떻게 할래, 성하.”
이름을 불린 이가 미소 지었다.
글로리아의 인자한 종께서는 다가와, 내 손을 잡고는 손등 위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글로리아 님의 뜻대로.”
* * *
놓쳤다.
그렇게나 가지 말라고 했는데.
“으… 윽……!”
해로운은 바닥을 긁으며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려보냈다.
“해로운 씨, 일단 상처부터 봅시다. 지금 그 꼴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강하수가 해로운을 부축하려고 했으나, 그는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바닥을 긁어대며 좌절 어린 목소리를 토해낼 뿐이었다.
그러다, 그 순간.
[신살자(길드장)의 부재가 확인되었습니다.]
[‘길드장’의 직위가 ‘9서클 대마법사’에게로 넘어갑니다.]
나타난 메시지에 해로운은 황망한 얼굴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나타난 메시지에 해로운이 멍하니 물었다. 그에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황망했던 얼굴에 금이 가는가 싶더니, 해로운이 피를 토해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누구 마음대로 네 자리를 나한테 넘겨! 누구 마음대로!!”
강하수가 해로운을 붙잡고선 그만하라고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해로운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몇 번이나 피를 토해내며 울부짖던 해로운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해로운 씨!!”
시야 앞으로 길드원들의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말이나, 뜻은 하나였다.
도하운은 어디로 간 것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