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까드득―
몬스터의 날카로운 이에 물린 검을, 힘주어 휘둘렀다. 두꺼운 가죽을 찢기 무섭게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쏟아진 것에 몸이 흠뻑 적셔졌지만, 이를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왜 저를 구해주셨나요, 성녀님?”
빌어먹을 성하 새끼와 나눌 이야기가 있기에.
나는 피가 묻은 검을 한번 털어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순순히 죽을 새끼가 아니잖아, 너. 그런데 죽으려고 했어.”
최후의 최후까지 도망쳤던 인간이다. 그런 놈이 순순히 제 목숨을 내놓으려 하다니.
“무슨 꿍꿍이야? 아니,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잔잔히 미소를 그리고 있는 얼굴이, 혼란이 가득한 이곳과 미묘하게 어울려 보기가 거북했다.
그렇기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금 말했다.
“말해, 성하.”
“곱게 들어주실 생각은 있으시고요?”
“그러려고 구해준 거야.”
내 말에 성하가 소리 없이 웃음을 짓는다.
“저희가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을 것 같나요? 동과 서, 남과 북. 네 명의 대신관들은 왜 없고요.”
그동안 궁금하긴 했다. 왜 하필 중앙 신전의 대신관들과 성하만이 이곳에 오게 된 건지.
하지만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글로리아가 뭔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이 벌어질 리가 없었다.
“수작이라…….”
성하가 목소리의 끝을 길게 흐리더니 이내 말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중앙 신전은 글로리아 님의 말씀을 직접 전해 듣는 곳.”
그분과 가장 가까운 곳이지요.
덧붙인 말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래서 저희가 선택받은 거랍니다. 그분과 가장 가까우니까요.”
“사방위의 대신관들이 너무 불쌍한데.”
물론, 빈말이었다.
사방위의 대신관들 역시 중앙 신전의 대신관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내 말에 성하가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너무 그렇게 불쌍히 여기지는 마세요, 성녀님.”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텐데, 성하는 가증스럽게도 말했다.
“그분들은 저희와 함께 있거든요. 당신께서 저버린 글로리아의 모든 이들 역시.”
들린 말에 입술이 벌려졌다. 멍하니 이를 달싹거리다가 흔들리는 두 눈을 들어 성하를 쳐다봤다.
[권능, ‘진리의 눈’이 활성화됩니다.]
바라본 얼굴에 누군가의 얼굴이 덧씌워진다. 내가 아는 성하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자들의 얼굴이 여러 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좌절감에 울고 있는 얼굴이었다.
―성녀님……! 성녀님……!
―글로리아께 영광을!
―성녀님, 왜 저희를 버리셨습니까……!
메아리치듯 울리는 목소리에 뒷걸음질 쳤다. 그런 나를 보며 성하가 잔잔히 미소를 짓는다.
“모두가 있답니다, 성녀님.”
한 걸음, 내가 다가오며 성하가 말을 이었다.
“글로리아 님과 가장 가까운 저희가 모두를 품에 안았거든요.”
코앞에 멈춰선 성하가 핏물이 말라붙은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들과 함께 저희는 당신을 따라왔답니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손.
그러나 그 손을 쳐낼 수가 없었다. 그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성하를 노려볼 뿐이었다. 내가 보내는 시선에 성하가 잔잔히 미소를 그린 낯으로 묻는다.
“그보다 다른 분들은 구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신가요?”
그 말에 뒤늦게 주변을 인지했다. 분명 하얬을 벽이 붉게 점철되어 있다.
“아…….”
구하지 못했다.
절망에 빠지려는 찰나 내게 닿는 목소리가 있었다.
“도하운! 사람들이 흘린 피가 아니야! 착각하지 마!!”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가 찢어져라 비명을 내지른다. 그 소리를 뚫고서 해로운의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뒤늦게 곳곳에 펼쳐있는 붉은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모습이라곤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빠와 도하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왕님께서 내 말에 따라 두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 준 듯했다.
다행이다.
안도감과 함께 나긋한 목소리가 나의 주의를 돌렸다.
“언제든지 찾아와요, 성녀님.”
뺨에 닿았던 손길이 거둬지고, 성하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내게 건넸다.
“당신께서는 마음만 먹으면 저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성하의 주위로 푸른 마법진이 펼쳐진다. 글로리아의 것이었다. 그 환한 빛에 삼켜지며 성하가 소리 없는 말을 내게 보낸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것 같나요?
소리 없이 전해진 것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차원 관리자, ‘X’가 침입한 ‘글로리아’와 그 휘하 별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소멸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 실패 시: 이 세계의 파멸 그리고 멸망.
눈앞에 보이는 의뢰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파멸로 치달을 거라는 게 이런 식인 거야?”
‘글로리아’인 나를 비롯한 대신관들과 성하를 죽이기 위해, 차원 관리자는 이렇게 게이트를 만들 생각인 거다.
“멸망한다는 게……!”
글로리아와는 관계없는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이런 거냐고.”
어느 순간부터 몬스터의 비명은 끊겨있었다. 고요해진 가운데 억눌러 내뱉은 나의 목소리만이 남아 흩어진다.
나 역시 흩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글로리아를 쫓아 이곳에 온 녀석들을 먼저 죽여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수많은 영혼을 먹어, 몇 번의 삶을 부여받았는지 모를 존재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는 거지?
‘그럴 순 없지요. 차지한 몸이 꽤 마음에 들어서 말입니다.’
단테의 말이 떠올랐다.
죽는 건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다만, 다시 차지하게 될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문제란 거였지.
‘당신을 따라왔답니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글로리아를 죽여, 그 몸이 다시 살아날까 싶어 모든 것을 먹어치웠으니.
그렇게 나는 ‘글로리아’의 모든 것을 사슬 아래 묶어 가지고 왔으니까.
그러니 가지고 온 것을 이용하면 된다. 사슬 아래 묶여있는 모든 것을 풀어버리면…….
“도하운.”
말끔하게 차려입은 보람도 없이, 해로운의 꼴은 엉망이었다. 마왕님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보기 좋았는데.
“해로운.”
애써 웃으며 물었다.
“너 나 없이도 잘할 수 있지?”
떨린 목소리의 끝에 답이 돌아온다.
“…그게 무슨 소리야.”
희게 질린 해로운의 얼굴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도하운.”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
제발.
덧붙인 말에 해로운의 얼굴이 흐리게 일그러졌다.
다행히도, 되묻는 말은 없었다.
* * *
붉게 적셔진 하늘이 푸르게 빛을 낸다.
성하는 그 가운데서 찬란하게 빛나는 해를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성하님?”
“괜찮고 말고요. 그보다 단테.”
성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바깥이 매우 혼란스러웠나 보네요.”
그 말에 단테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몬스터들이 갑작스레 쏟아져서 말입니다. 성하님을 미처 살필 겨를이 없었답니다.”
죄송하다며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성하는 괜찮다 하였다. 그러곤 말했다.
“만나러 갈 사람이 있어요.”
뒤이어 들린 이름에 성하의 눈앞에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성하는 미소를 지으며 마법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눈에 익숙한 사무실이었다. 텅 빈 사무실 한가운데에 누군가 서있다.
“게이트 일어난 거 알지, 오빠?”
성하가 차지한 몸의 유일한 혈육, 지한결이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성하를 노려본다.
그 시선에 성하는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가서 현장 통제해야 하지 않아? 팀원들은 다 내보내 놓고…….”
성하가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혼자서 뭐 하고 있는 거래?”
잠깐의 침묵 끝에 지한결이 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오지 않았으면 어쩌려고?”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성하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네. 숨긴다고 숨긴 거였는데.”
그에 지한결이 원망 섞인 시선을 성하에게 보냈다. 성하는 그 시선에 잔잔히 미소를 띠며 물었다.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알았는지 가르쳐주지 않겠지요. 지한결 씨.”
사무실을 울리는 목소리에 지한결이 주먹 쥔 손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피어난 얼음꽃이 성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하에게 닿지 못했다.
“윽……!”
도리어 지한결을 집어삼켰다.
성하가 지한결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건네었다.
“내가 누군지 알면,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것도 알 텐데. 아님, 이것까지는 몰랐던 걸까?”
지한결은 대답 없이 성하를 노려보기만 했다. 원망과 좌절 섞인 시선에 성하가 웃으며 물었다.
“동생이 보고 싶나요, 지한결 씨? 만나게 해드릴까요?”
“…개소리하지 마.”
만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바랐다.
“왜 하필 내 동생이야.”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도.
분노를 억누르듯이 건넨 목소리에 성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로리아 님께 여쭤보세요. 모든 것은 그분의 뜻일지니.”
“글로리아! 그 망할 글로리아!!”
억누르던 분노가 결국 토해졌다.
“이미 죽은 신이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따르는 것이냐고, 지한결은 소리 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에 성하가 미소를 그렸다.
“깨어나실 거랍니다. 저희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
바뀐 말투와 같이, 다른 목소리를 내줬으면 했다. 그러나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동생의 것이었다.
그 목소리로 성하는 말했다.
“두 손, 두 발. 온전히 달린 몸으로 깨어나신 그분을 이 몸으로 보필할 거랍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말이에요.”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못하게 할 거다.
“그러니까…….”
성하가 얼음꽃에 갇힌 지한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이 지한결의 어깨를 살짝 미는 것과 동시에 얼음꽃이 부서져 내린다.
지한결이 주변을 인지했을 때는 허공이었다.
“성하!!”
부르짖는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성하는 추락하는 지한결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잘 가, 오빠.
라는 말을 건네면서.
끝까지 동생의 흉내를 내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