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너른 창문이 있는 거실은 지한결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오랜만의 정시 퇴근이라고 하나, 지한결은 여전히 업무 중이었다.
“아니요, 그 일과 관련해서는 이수혁 팀장님께서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상대는 난처함을 표했다. 하지만 지한결은 상대의 난처함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금요일에 있을 기자 회견에는 이수혁 팀장님께서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겠습니다.”
금요일 날 가는 것은 지 팀장님이 아니셨냐며, 상대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기로 했었습니다만,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상부와 이야기는 끝내놓았습니다.”
그러니 이수혁 팀장에게 말을 좀 전해달라면서, 지한결은 전화를 끊었다.
센터는 현재 비상이었다.
도하운의 길드를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그 길드의 주인이 기자 회견을 연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지한결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참고로 우리 길드를 알리는, 그 일에서는 손 떼. 내가 알아서 하기로 했거든.’
불현듯이 떠오르는 목소리에 지한결은 두 손을 주먹 쥐었다. 그러다 원탁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보고는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풀고선 이를 들었다.
[길드, ‘귀환(歸還)’ ― 기자 회견 참가자 명단]
사실, 지한결은 도하운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도하운으로부터 길드를 알리는 일에서 손을 떼라는 말을 들은 날에 곧바로 도하준에게 연락했다.
“센터를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압니다. 그 사람들이 좋은 기사를 써줄 겁니다.”
그렇게 몇몇 기자들의 이름을 도하준에게 넘겨주었다.
도하준은 지한결을 경계했으나, 이내 이를 풀고선 도하운의 기자 회견 날에 모일 기자들의 명단을 넘겨주었다.
그 명단은, 지한결의 노트북에 있던 명단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지한결은 센터에게서 도하운이 이끄는 길드에 관한 업무를 배정받았을 때, 도하운에게 일이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준비 중이었다.
‘필요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거기서 뭐 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한결이 고개를 돌렸다. 커피를 타러 나온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지한결은 지여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바람? 창문 안 열어놓고 있잖아.”
“창문 열면 춥잖아.”
그에 지여일이 이상하다는 듯이 지한결을 쳐다봤다.
바람을 쐬고 싶다는 사람이, 창문도 열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도 했다. 동생의 시선에 지한결이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그런 지한결에게 지여일이 말했다.
“오빠도 진짜 특이한 사람이야, 알지?”
“…알지.”
지한결은 수긍했다.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으니 이를 인정한 것이다.
지여일은 그 대답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빈 잔에 커피를 따르며 지한결에게 물었다.
“오빠도 한 잔 마실래?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 생각 없어.”
“그래?”
지여일이 커피가 채워진 잔을 들고서 지한결에게 다가왔다.
“여기 야경은 언제봐도 좋다니까.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지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여일이 미소를 짓고서 그를 쳐다봤다가 원탁 테이블 위에 놓인 것에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지여일의 시선을 따라간 지한결이 ‘아.’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도하운 씨라고 알아? 한창 매스컴을 탔던 분인데.”
지여일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도하운 씨? 회사원 헌터 H 씨가 납치했었다는 사람?”
들려온 대답에 지한결이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해주었다.
“…그건 누명으로 밝혀졌어.”
“아, 맞다. 그런 기사를 본 적 있는데 잊고 있었네.”
드라마 촬영 때문에 정신이 나가는 날이 많다면서, 지여일은 멋쩍게 웃음을 보였다. 지한결이 그 웃음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분이 왜? 또 뭐 했는데?”
“드래곤도 잡고, 이번에 열렸던 게이트들 실질적으로 닫아줬지.”
“잠깐! 나 누군지 기억났어.”
지여일이 지한결을 말을 끊고선 감탄했다.
“그 사람, 길드 세우나 보구나.”
“이미 세웠어.”
“응?”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에, 지한결은 지여일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설명해 주려면 긴데……. 어쨌든, 길드는 이미 세워져 있고 이를 알리려고 하는 것 같더라고.”
알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알리기로 확정한 사실이다.
지한결 역시 이를 알고 있으나, 일부러 이렇게 말을 흐렸다. 지여일을, 아니. 그 모습을 뒤집어쓴 성하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혹시 관심 있어?”
“관심?”
“응, 헌터들한테 관심 많잖아. 소재 얻기 좋다고.”
지여일은 잠시 고민했다.
헌터들에게 관심이 많기는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아했고,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여일’이 말이다.
성하는 원탁 테이블 위에 놓인 명단을 두 눈에 담고서는 웃음을 지었다.
“관심이 가기는 하네.”
“그래?”
지한결이 찢긴 종이 하나를 성하에게 건넸다. 이를 받아든 성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이게 뭐야?”
“관심 있으면 가봐. 회견장 안까지 들어가는 건 힘들겠지만, 바깥에서 구경은 할 수 있을 거야.”
금요일, 오전 10시.
장소는…….
지여일이 찢긴 종이에 적힌 것들을 읽고서 미소 지었다.
“고마워, 오빠.”
그 인사에, 지한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기자 회견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오늘부터 촬영을 재개했고, 나는 지금 회견장에 와 있다.
“길마님, 열심히 일하는 중인 법사에게 할 말이 없나요?”
법사님과 함께 말이다. 참고로 드슬님도 같이 있다.
드슬님은 집에 두고 오려고 했지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아서 결국 같이 왔다. 멍한 얼굴로 회견장을 보는 드슬님에게 해로운이 시비를 건다.
“하는 일 없는 드슬님, 길마님 대신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좀 칭찬해 주시죠.”
“…꺼져.”
드슬님께서 질색하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회견장 곳곳에 펼쳐져 있는 붉은 마법진들을 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해로운, 이시온 괴롭히지 말고 어서 회견장이나 살펴.”
“열심히 살피는 중이죠. 법사는 지금 길마님의 따뜻한 칭찬이 고프죠.”
“와, 우리 법사님 잘한다.”
“영혼 좀 담아주면 안 돼?”
“안 돼.”
법사님께서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진리의 눈을 사용하여 회견장을 둘러보았다.
“이상한 건 없어 보이지?”
“응, 애초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뒀다잖아. 길마님은 걱정이 너무 많죠.”
“시끄러.”
지난번, 센터에 각성자 등록을 했을 때 그들은 비밀 보장은 지켜주지도 않고 기자들을 불렀었다.
그런 그들이 오빠가 섭외해 둔 기자 회견장에 이상한 짓거리를 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으니…….
“점검은 꼼꼼할수록 좋아.”
“길마님은 너무 꼼꼼하죠.”
어쩌라고다.
그렇게 회견장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는데 메시지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Pr. 마왕| : 도하운아, 지금 어디 있느냐?
|Pr. 신살자(길드장)| : 회견장에 있는데?
그보다 마왕님, 지금 드라마 촬영 중이지 않나? 촬영 끝났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의문을 표하는데, 순간 검은 마법진이 나타나면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님?”
마왕님이셨다.
“뭐야, 마왕님이 왜 갑자기 나타나? 여기는 어떻게 알고?”
“형님께서 회견장을 알려주셨도다. 그리고 해로운 놈아, 너는 왜 여기 있느냐? 우중충한 놈은 또 왜 있느냐?”
마왕님의 말에 이시온이 눈살을 찌푸렸고, 해로운은 씨익 웃음을 보이며 내 어깨에 팔을 걸친다.
“당연히 길마님이랑 일하러 왔지. 마훈이는 다른 사람들이랑 일 잘했어?”
재밌었냐며 묻는 목소리에 우마훈이 얼굴을 와락 찌푸린다. 나는 해로운의 팔을 쳐내고선 마왕님께 다가갔다.
“촬영은? 끝났어?”
“끝났느니라.”
“집에 가서 쉬지. 여기는 왜 왔어?”
“네가 보고 싶어서 왔느니라. 오래 보지 못했지 않느냐.”
“내가 보고 싶어서?”
마왕님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일주일 정도 보지 못한 건 맞았다. 하지만 그 기간을 ‘오래’라고 표현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마왕님도 참 유별나시지.
“마훈아, 나는? 나는 안 보고 싶었어?”
“꺼지거라, 해로운 놈아.”
해로운 새끼도 참 유별나다.
나는 마왕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해로운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끌어당기고는 말했다.
“그럼, 마왕님. 이제 내 얼굴 봤으니 갈 거야?”
“가야 하느냐……?”
“그건 마왕님 마음대로지.”
“그렇다면 같이 있고 싶도다.”
마왕님의 말에 나는 붉은 마법진이 펼쳐져 있는 회견장을 살펴보고는 말했다.
“좋아, 그럼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마왕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와는 달리 해로운과 이시온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래 보지 못한 우리 마왕님, 내가 저녁 좀 먹이겠다는데 왜 저런 얼굴을 보이나 싶었다. 나는 영롱한 신사임당님을 두 장 꺼내고는 웃음을 보였다.
“가자, 마왕님.”
“길마님! 나는!!”
“이시온, 이리 와.”
“길마님, 이러기야?!”
진짜로 놔두고 갈 줄 알았나 보다. 해로운이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그 얼굴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길마님! 웃지 말고!!”
“포털이나 열어.”
내 영원한 포털 셔틀이 뚱한 얼굴을 보인다. 그래도 붉은 마법진이 나타나는 것이, 우리 법사님 말은 참 잘 듣는다 싶었다.
“로운이 비싼 거 먹을 거죠.”
“누가 사준대?”
“안 사주시면 지금 바로 하준 형님께 전화할 거죠. 하준 형님, 우리 소중한 아가씨가 지금 우마한 길드장님의…….”
“알았어, 사줄게.”
말 잘 듣는다는 거 취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