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분명 하나뿐인 친구, 마이 베스트 프렌드 배서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는데 말이다.
“그럼, 지금까지 줄곧 운이의 보디가드로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운이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고?”
“네, 맞아요. 하운 아가씨가 아무 말도 안 해줬나 보네요?”
“아무 말도 안 해주기만 했을까 봐요? 제 연락도 씹고 있었어요!”
“우리 아가씨는 연락 씹는 게 일상이죠.”
“그쵸? 해로운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왜 우리 서하는 해로운 법사 새끼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인 걸까? 나는 보이지 않는 걸까?
씁쓸한 기분을 달래고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그런데 해로운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뭐든 물어보세요.”
해로운의 상냥한 목소리에 서하가 우물쭈물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운이랑 같이 사라졌었잖아요. 납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밝혀졌고…….”
그러고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해로운에게 속닥거리며 물었다.
“운이랑 같이 어디서 지내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지냈었다고는 말 못 한다.
나는 해로운의 상황 대처 능력을 기대하며 아메리카노를 한 번 더 홀짝거렸다.
해로운이 난처하다는 듯이 웃더니 이내 말한다.
“하운 아가씨가 즐겨 가던 곳이 있었거든요. 그쪽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어요.”
내가 용사님네 가게를 즐겨 찾기는 했지. 지금도 용사님네 가게에 있는 중이고.
서하가 그에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다른 것을 해로운에게 물었다.
“그럼, 몸은 왜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하운이랑 둘이서 몸을 숨길 이유가 있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답니다. 도하준 길드장님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네요.”
해로운이 우리 오빠와 한 약속 따위는 없다. 굳이 꼽자면, 내 주변 반경 100미터 이내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지만…….
그걸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지. 해로운 새끼, 능구렁이처럼 잘도 빠져나간다 싶었다.
해로운의 대답을 곱씹어 보던 서하가 해로운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해로운 씨?”
“네, 괜찮아요. 뭐든지 물어보라니까요?”
그 말에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서하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하운이랑 둘이 무슨 사이예요?”
“주종 관계.”
서하의 질문에 답한 것은 나였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을 해로운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말한 거다.
내 말에 서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주종 관계?”
“응, 주종 관계. 내가 주인, 해로운이 부하.”
“아가씨 너무하죠!”
해로운의 뚱한 목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서하에게 환한 웃음을 보였다.
“어쨌든, 서하야. 해로운과 나는 주종 관계일 뿐이야,”
“정말?”
“응, 정말이지. 그럼 나랑 해로운이 무슨 사이겠어.”
서하가 미심쩍다는 얼굴을 보인다. 해로운은 불퉁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둘의 얼굴을 무시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깔끔하게 비워버렸다.
그때, 서하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서하가 우리 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전화를 받아든다. 소리를 죽여 답할 때마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전화인 것 같았다.
뚝, 전화를 끊은 운이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게 말했다.
“어쩌지, 운아? 나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
“급한 일이야?”
“응…….”
교수님 연락이라 함부로 거절할 수가 없다면서, 서하는 미안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
다음에 또 만나면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방긋 웃음을 지어주었다.
“너무 급하면 데려다줄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하지만 서하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따악, 하고 손가락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내에 생성된 포털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서하가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는 해로운에게 물었다.
“…뭐, 뭐예요?”
“편안하고 안전한 포털 서비스죠. 우리 아가씨 친구분께 이런 서비스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법사의 눈에는 용사님이 보내는 메시지가 안 보이나 보다.
|용사| : 해로운! 너 미쳤니?!
|정령사| : 해로운 놈이 무슨 사고라도 쳤나 봅니다―^^?
|북부대공| : 법사님 지금 사장님네 가게에 있어여?
용사님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의 메시지도 말이다. 서하가 침을 꿀꺽 삼키고는 해로운을, 정확히는 나를 본다.
“이거 안전한 거…….”
“안전한 거 맞아.”
내 말에 해로운이 뿌듯하게 웃으며 서하에게 말했다.
“맞아요, 안전한 거 맞죠! 그런데 서하 씨, 다니는 학교가 어디예요?”
“네? 학교는 왜요……?”
“그쪽으로 경로를 다시 설정해 줄게요.”
서하가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얼굴로 해로운에게 다니는 학교의 이름을 말해줬다. 해로운이 어딘지 안다면서 싱글벙글 웃는다.
“계산 다시 했어요. 조심히 가세요, 서하 씨.”
“…이거 진짜 안전한 거 맞죠?”
“회사원 헌터 H 씨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서하 씨.”
쓸데없는 거 거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서하는 그 말에 믿음이 생겼는지, 굳게 다짐한 얼굴로 포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안으로 들어서며 내게 쨍하게 외쳤다.
“우니! 너 내 연락 씹으면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 안 씹을게.”
서서히 닫히는 포털을 보며 나는 빙그레 미소 지어주었다.
“서하 씨 가버렸네.”
“그러게.”
모처럼 서하와 놀려고 했는데, 허무하게 헤어져 버렸다. 음료라도 하나 더 시킬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때였다. 내 옆으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할 말 있어?”
해로운 법사님의 시선이었다. 내 물음에 법사님께서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우리 아가씨 너무하죠.”
“서하도 갔는데 그 ‘아가씨’ 소리 그만하면 안 돼?”
“안 돼.”
해로운이 먹다 남은 케이크를 집어 들고선 내게 내민다. 그러고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주종 관계잖아? 내가 어떻게 주인님을 함부로 부를 수 있겠어?”
“…….”
“원한다면 높임말도 써줄게. 하운 아가씨, 이제 뭐 하실 건가요? 집으로 돌아가실 생각은 없나요?”
능글맞게 묻는 목소리가 참 얄밉게 들렸다. 그렇기에 나는 내게 내밀어진 케이크를 해로운의 입안에 집어넣어 주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막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해로운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한입에 이를 삼킨 해로운이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길마님,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안 궁금해?”
“안 궁금해.”
“거짓말.”
해로운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든다. 그대로 화면을 두드리는가 싶더니 내게 기사 하나를 보여줬다.
[속보] 을지로 일대에서 소동… 미등록 헌터로 추정.
기사 속의 장소가 눈에 익숙했다. 단테와 만났던, 그 장소이기 때문일 거다. 나는 표정을 굳혔다가 애써 이를 풀고서는 해로운에게 물었다.
“범인은 잡혔대?”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것은 덤이었다. 해로운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기사가 보이던 화면을 꺼버린다.
“아직 못 잡았다는 것 같더라.”
“빨리 잡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 말이야.”
해로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치안이 너무 안 좋은 것 같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에 나는 괜히 빈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그 기사가 네가 여기 온 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아?”
“말 계속 빙빙 돌리지?”
해로운이 배시시 웃음을 보인다. 여우같이 웃는 모습에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법사님.”
“우리 소중한 길마님이 을지로에서 일어났다는 소동에 휘말렸을까 걱정이 되어서.”
“……?”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해로운이 내 모자의 끝을 잡고서 들어 올렸다. 내 얼굴이 보이게끔 말이다.
“그래서 길드원들한테 우리 길마님 행방을 물어보고 다녔죠.”
마주친 시선이 지나치게 가깝다.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자, 길마님. 림이가 길마님을 무척 보고 싶어 하죠.”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뒤로 내빼고는 툴툴거렸다.
“우리 하림이, 용사님네 가게에서 지낼 때는 나 보고 싶어서 어떻게 했나 몰라.”
“참았겠지. 아니면…….”
해로운이 살짝 들려진 내 모자를 푹 눌러쓰게 만든다.
“보고 싶은 줄 몰랐거나.”
문득, 모자에 가려진 해로운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생각’으로만 그쳤지마는.
해로운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그 뒤를 따랐다.
“용사님, 잘 먹었어.”
“다시는 오지 말렴.”
가볍게 거절하고는 가게 문을 나섰다. 용사님네 가게에서 포털을 바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손님이라고는 나와 해로운뿐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와 해로운은 굳이 가게를 나와 골목길로 향했다.
“기자 회견 일정은 정리해 봤어?”
“응?”
“기자 회견이요, 길마님.”
“아… 그거 말이야.”
눈앞에 나타난 붉은 마법진 앞에 멈춰 서고는 해로운에게 말했다.
“마왕님 드라마 촬영 재개하는 날에 맞춰서 할까 싶어.”
“마왕님 드라마라면…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응.”
나는 왜 그날에 맞춰서 하면 좋을지를 해로운에게 설명해 주고는 그를 쳐다봤다. 해로운에게 내 얼굴이 보일까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해로운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때?”
“좋은 것 같네.”
색이 흐려지던 붉은 마법진이 다시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나보다 한 걸음 먼저 내디딘 해로운이 내게 손을 내민다.
“그럼 이제 돌아가 보실까요, 길마님?”
능청스레 묻는 목소리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짓고서는 걸음을 내디뎠다.
“길마님! 손 잡아줘!!”
“꺼져.”
해로운이 내민 손은, 거절하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