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무슨 정신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됐을 때는 나는 이미 ‘H-Entertainment’에 들어와 있었다.
“드십시오.”
달칵, 앞에 놓인 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핫초코였다.
“나 뜨거운 거 싫어해.”
단 것도 싫어한다. 내 말에 강하수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주는 대로 드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잔에 얼음을 넣어주는 강하수였다. 나는 티스푼을 들어 얼음이 동동 띄워진 코코아를 한번 휘젓고는 잔을 들었다. 입안에 삼킨 코코아가 달다. 해로운 법사님께서 좋아하실 법만 맛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에 앉은 강하수를 쳐다봤다. 강하수 앞에 놓인 것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녹차였다.
나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두서없이 목소리를 내었다.
“너 말이야.”
“네, 길드장님.”
“거기서 날 어떻게 보고 붙잡은 거야?”
“우연히…….”
“라고는 말하지 말고.”
강하수가 뺨을 긁적이고는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을 본 건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여 말했다.
“나 감독님과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뵙고 돌아가던 길이었거든요.”
“그 감독님, 은근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 같단 말이야? 허구한 날 정령사님을 부르는 것 같아.”
내 말에 정령사님께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고 있는 강하수에게 뚱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가 자리를 막 비워도 되는 거야?”
“막 비운 것 아닙니다. 나 감독님을 찾아뵙는 것도 다 훗날을 위해서지요.”
인맥 모르냐면서, 강하수가 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그런 인맥은 쌓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그런데 길드장님은 무슨 일로 거기에 계셨던 겁니까?”
“있고 싶어서 있던 거 아니야. 그 망할 새끼한테 붙잡혀서 있었던 것뿐이지.”
“그 전에는요?”
“…….”
잠시 지한결을 떠올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강하수가 그런 나를 보고는 말한다.
“말하기 싫으시면 괜찮습니다. 그보다 마왕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마왕님이? 왜?”
“곧 드라마 촬영 재개되니까요. 당부할 것이 있어서 불렀답니다.”
“전화로 하면 될 것을.”
“전화로 해서 알아먹을 인간이 아니니까 불렀지요.”
하긴, 마왕님이라면 정령사님께서 전화를 걸기 무섭게 ‘짐은 전화 따윈 받지 않느니.’ 하면서 끊을 것 같았다.
“정령사님이 말하는 드라마,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말하는 거 맞지?”
“네, 맞습니다.”
재개할 거라고 하더니,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갈 건가 보다.
“촬영 시작 날에 맞춰서 기사 내보낼 거지?”
“네, 그럴 겁니다만…….”
“날짜 좀 알려줘.”
그때를 맞춰서 기자 회견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 말에 정령사가 미심쩍어하면서 묻는다.
“불안하게 왜 그러십니까?”
“너한테 좋은 일이야. 화제성 좀 키워줄게.”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좋은 일 맞거든.”
나는 길드와 관련된 일이라면서 협조를 구했다. 강하수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일정이 변경될 가능성이 높아서 말입니다. 하지만 늦어도 다음 주 중에는 촬영에 들어갈 겁니다.”
다음 주 중이라…….
나는 입가를 만지작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실 겁니까?”
“응.”
“마왕님 보고 가시지요.”
잠깐 그럴까, 고민했다. 마왕님의 얼굴을 안 본 지가 꽤 돼서 보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아니, 됐어. 일하는 데 방해가 될 수는 없잖아?”
“길드장님께서 계시면 좀 더 수월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강하수가 우아하게 잔을 들면서 말했다.
“마왕님께서 길드장님 말씀은 철석같이 알아듣지 않습니까.”
“개똥같이 알아들을 때가 더 많은데.”
“아…….”
강하수가 얼빠진 얼굴을 보인다. 나는 키득거리며 웃고는 강하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만 가본다.”
“해로운 놈 안 부르십니까?”
“안 불러. 오늘 하루 종일 밖에 있을 거거든.”
나를 찾으며 울고 있을 하림이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생각보다 일찍 들어갈 것 같지만 말이다. 내 말에 강하수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 말입니까?”
“아니?”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폰을 꺼내 화면을 두드렸다. 그러곤 나타난 이름을 강하수에게 보여줬다.
[배서하 씨♡]
“배서하 씨……?”
“친구야, 친구. 내 좁은 인간관계의 유일한 친구지.”
방긋 웃으면서 말하는데, 강하수가 ‘허’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는 내게 물었다.
“설마 아까 전의 일로 삐치셨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요?”
“아니거든.”
“맞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니라니까?”
사실 삐친 것 맞다. 하지만 티를 냈다가는 정령사 새끼가 놀려댈 게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은 척, 툴툴거리고는 문을 열었다.
그렇게 나가기 전, 나는 강하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 강 대표님.”
“새삼스레 왜 그런 인사를 하십니까?”
“해야 할 것 같아서.”
강하수가 실없다면서 웃는다. 그러곤 내가 나가기 편하게 문을 활짝 열어젖혀 주며 말했다.
“조심히 가십시오. 도착하시면 연락 주시고요.”
“싫은데.”
정령사님께서 얼굴을 찌푸린다. 나는 그 얼굴에 혀를 날름거려 주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배웅은 안 해둬도 돼.”
“해줄 생각도 없었습니다!”
버럭 지르는 목소리에 그러냐면서 웃어줬다. 강하수가 어서 가기나 하라며 짜증을 낸다.
“네네, 마왕님이랑 이야기 잘 나누세요!”
나는 그런 강하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왔다. 누가 볼세라,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폰을 들었다. 꾹꾹 누른 번호는 강하수에게 보여줬던 내 친구 배서하 씨의 것이었다.
몇 번 신호가 가는가 싶더니, 상대가 전화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우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정겨웠다.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배서하 씨, 나랑 놀자.”
―도하운! 너 그동안 내 연락 씹더니 뻔뻔하게 뭐라고? 놀자고?! 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H-Entertainment’ 앞인데, 주소 보내줄까?”
뚝, 전화가 끊겼다.
“여보세요? 서하야?”
잘못 들었는가 했지만, 뚜뚜― 들려오는 소리를 보니 배서하가 전화를 끊은 게 맞다.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서하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배서하 씨♡] :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날아든 메시지에 나는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기다리고 있으라는데, 어떻게 해.
여기서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않고 기다려야지.
다행히 서하는 몇 분 지나지 않아 ‘H-Entertainment’의 건물 앞에 나타났다.
“도하운! 야!!”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손을 흔들며 서하에게 다가갔다. 서하가 그런 나에게 후다닥 달려오며 질책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이 망할 기지배! 그동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도하인이 나 괜찮다고 연락 안 해줬어?”
“해줬지! 그래도 얼굴을 봐야 안심할 거 아니야!”
내 앞에 멈춰 선 서하가 내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는 흔들었다.
“이 꾀죄죄한 꼴 좀 봐! 너 씻지도 않고 나왔지?”
“티 많이 나?”
“많이 나!! 아침 댓바람부터 가족이랑 싸우고 그대로 집 나온 애 같다고!!”
그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서하가 내 뺨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도 얼굴 보니 좋네.”
안도하는 얼굴에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우니, 먹는 걸로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 나 비싼 거 먹자고 할 거야.”
“안 돼, 네가 사는 거거든.”
“……?”
서하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고는 말했다.
“나 카드 모두 취소됐어. 도하인이 카드 있으면 또 집 나갈 것 같다면서 다 취소시켰거든.”
“으이구! 그러게 애를 왜 걱정시켜!! 하인이 너 없어지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지?”
“도하인이 울었다고?”
“그래! 하준이 오빠랑 둘이서 술 마시고 전화했었단 말이야!”
“언제?”
“내가 회사원 헌터 H 씨한테 너 돌려달라고 말할 때!! 내가 너 때문에 뉴스까지 출연했었어!!”
서하가 언제를 말하는지 짐작이 갔다. 한창 용사님네 가게에서 지내고 있을 때, 그때를 말하는 걸 거다.
멋쩍게 웃는데, 서하가 내 손을 잡아 이끌며 물었다.
“회사원 헌터 H 씨는 잘 지내셔?”
“아주 잘 지내고 있지.”
우리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이걸 말했다가는 회사원 헌터 H 씨와 무슨 사이냐면서 닦달하며 물어댈 거다.
내 말에 서하가 후, 하고 한숨을 짓고는 말했다.
“잘 지내신다니 다행이네. 마음고생 심하셨을 텐데 말이야. 언제 한번 자리 만들어줘. 회사원 헌터 H 씨한테 사과도 할 겸, 저녁이라도 사드리게.”
“사과는 왜?”
“왜겠어! 너 때문이지!!”
서하가 ‘회사원 헌터 H 씨가 너를 납치했다는 오명에 얼마나 힘들어했겠어!’라면서 내 등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나는 뚱하게 입술을 씰룩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았는데.”
그걸로 촐싹거리며 입을 나불대기만 했지.
서하는 내 말을 못 들었나 보다.
“너는 회사원 헌터 H 씨한테 잘해줘야 해! 알겠지?”
라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싫다면서 펄쩍 뛰었고, 서하는 그런 내 등을 한 대 더 찰싹 때렸다.
“어서 가기나 하자. 카드 없는 우리 우니, 내가 오늘 배부르게 먹여준다!!”
그래도 친구란 건 좋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찾아온 것 같은 일상에 나는 실실 웃으면서 서하와 팔짱을 꼈다.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