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연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있는 여자는, 제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서 잠든 여자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여자의 곁을 마몬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지키는 중이었다.
“저… 성하님.”
“네, 마몬.”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마몬의 물음에 성하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옛날 생각나고 좋네요.”
그 말에 라헬이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성하는 라헬이 보여주는 웃음에 눈웃음을 지었다.
라헬은 글로리아 중앙 신전의 제3위(位)의 신관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전에서 자란 라헬은 성하를 어머니처럼 여기며 따랐기에, 그녀에게 애교를 부리곤 했다.
“성하님, 성녀님이 저를 괴롭혔어요. 또 제 목을 찌르려고 했단 말이에요.”
이렇게 말이다.
성하가 잔잔히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성녀님을 왜 만나러 가신 거예요, 라헬?”
그에 라헬이 칭찬을 바라는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두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성하님을 위해서요.”
“저를 위해서요?”
“네, 성녀님이 다치거나 죽으면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아닌가요?”
성하는 대답 대신 기특하다는 듯이 라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그래도 라헬은 지금 움직이면 안 된답니다.”
“왜요?”
눈가 아래에 자리한 짙은 그늘이 보였다. 밤마다 차지한 몸의 주인과 관련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악몽이라면 악몽일 것이었다.
충성심을 가득 내보이고 있는 라헬의 두 눈에 성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몸을 제대로 차지하는 게 우선이니까요.”
성녀와의 만남 도중에, 차지하고 있는 몸의 주인이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완전히 몸의 주인을 잡아먹은 자신이나 마몬, 그리고 단테라면 몰라도 라헬은 아직 불완전했다.
성하의 말에 라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하님. 이 몸을 제대로 차지한 뒤에 성녀님을 만나러 갈게요.”
성하가 라헬의 대답에 미소를 그렸다.
“혼자서는 안 된답니다.”
“네! 꼭 마몬이나 단테를 데리고 갈게요!”
성하가 귀여운 아이를 보는 듯이 웃음을 그렸다. 그러나 이도 잠시, 성하는 그리고 있던 미소를 지우고선 마몬에게 말했다.
“그보다 마몬, 당신은 그분께 그새 정이라도 드셨었나 보군요.”
성하가 말하는 ‘그분’이란, 이시온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몬이 성하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닙니다만…….”
성하가 미소를 그린 얼굴로 말없이 마몬에게서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마몬이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두면 일이 더 쉽게 풀릴 것 같았습니다.”
“쉽게 풀린다면, 어떻게요?”
“시온 씨에게 걸린 세뇌를 풀기 위해, 성녀가 성하님을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고, 마몬은 덧붙였다.
“하긴, 성녀님께서는 그분께 걸린 세뇌를 풀기 위해서 저를 찾아오겠지요.”
찾아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성녀는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올 터였다. 세뇌에 걸린 이들을 구하기 위해, 몇 번이나 그렇게 해왔었으니까.
‘하지만…….’
성하는 눈가를 살짝 찡그리고는 지난 밤에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길드, ‘귀환(歸還)’ ― 기자 회견 참가자 명단]
마치 일부러 보란 듯이 켜져있던 지한결의 노트북에서 확인한 것이었다.
‘귀환’이라면, 성녀가 주인으로 이끌고 있는 길드라고 들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움직이는 집단이라고 들었는데, ‘기자 회견’이라…….
지여일은 최근 들어 도하운의 이름이 언론에서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떠올렸다.
‘남이 뭐라고 하든,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 성격 아니었던가.’
성하가 도하운을 떠올리고선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마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성하님?”
“네, 마몬.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보다 단테는 어디 갔나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보이지 않는 신관의 모습에 성하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에 마몬이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곤 답했다.
“오늘은 온종일 자리를 비울 거라면서, 성하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나갔습니다.”
“제가 오는 걸 알면서도요?”
“말하기도 전에 나가서…….”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성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마몬이 더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마몬. 단테는 부지런하기도 하지.”
성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바깥을 나돌아다니다가 성녀님이라도 만나는 건 아닐까 몰라.”
다소 날이 선 목소리에, 마몬과 라헬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 * *
찾아온 아침.
나는 졸린 눈을 비비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길마님! 아침 다 됐으니까 빨리 나와!!”
그러기 무섭게 해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대충 알겠다며 답해주고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정리했다.
해로운은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하준 형님! 아가씨를 저 새… 아니, 저 자식이랑 단둘이 남겨놓을 생각입니까!!’
기억에서 잊혀가고 있던 ‘아가씨’ 소리를 꺼내며 오빠의 마음을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시온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보다 내가 왜 이시온이랑만 단둘이 있어? 유대공도 있고, 하림이도 있는데.
“도하운!!”
“나가! 나간다고!!”
오빠랑 도하인은 길드에 나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해로운이 저렇게 나를 불러댈 리가 없었다.
나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문 사이로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인스턴트 음식의 냄새가 났다.
“라면?”
“네, 라면이에요!”
그것도 컵라면이다.
“밥은?”
“밥처럼 드세요!”
뭐라는 거야.
입을 옷이 없어 도하인의 옷을 빌려 입은 무림님께서 해맑게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드슬님은?”
“저기 소파에서 자고 있죠. 법사는 깨우지 않는 것을 추천하고 싶죠.”
나는 그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는 드슬님께 다가갔다.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리카였다.
―웨옹.
“웨옹.”
리카에게 인사해 준 뒤, 나는 드슬님의 어깨를 한 번 흔들었다. 감긴 눈이 느릿하게 떠지더니, 나를 향한다.
“엘로시아.”
그러고는 내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내 팔을 잡고선 끌어당겼다. 나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몸에 닿는 체온에 다짐했다.
성하, 그 망할 새끼를 하루라도 빨리 족치러 가기를.
“이시온, 어서 일어나.”
고개를 젓는다.
잠투정이 왜 이렇게 심한가 생각하고 있는데, 물이 가득 들어찬 비눗방울과도 같이 생긴 것이 이시온에게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것은 이내 이시온의 머리칼에 닿았고, 퐝 소리를 내며 터지고 말았다.
“윽……!”
쏟아진 물에 이시온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정령사님도 없고, 대공님도 없는 이 집에서 이런 짓을 벌일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해로운, 애 좀 곱게 깨워.”
“싫죠. 완전 싫죠. 그리고 드슬님은 애가 아니죠.”
그러고는 후르륵, 라면을 먹는다. 나는 거실 바닥에 널려있는 수건을 이시온의 손에 쥐여준 뒤 몸을 일으켰다.
“길마님은 빨리 와서 먹기나 해. 그렇게 드슬님이랑만 있다가 라면 불어터지겠죠.”
불퉁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식탁으로 향했다.
“대공님은 하림이랑 같이 용사님네 가게에서 자고 온다더라.”
“나도 어제 연락받았어.”
대공님의 연락이 온 건,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Pr. 북부대공| : 길마님! 림이가 깰 생각을 안 해서 용사님네 가가에서 자고 갈게욤!
그때 나는 오빠와 도하인과 함께 어디서 언제 어떻게 기자 회견을 열지 이야기 중이었다.
그 탓에 잠을 늦게 자버렸지.
나는 하품을 한 번 한 뒤, 젓가락을 들었다.
“무림님은 포털 열어줄까? 학교 안 늦겠어?”
“괜찮아요, 길짱님! 오늘 개교기념일이에요! 학교 쉬지롱!”
무림님께서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라면을 해치우는 사이, 젖은 얼굴을 닦은 이시온이 내 옆에 앉으려고 했다.
“…비켜.”
하지만 내 옆에는 해로운이 앉아있었다.
드슬님의 말에 법사님께서 코웃음을 치신다. 그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드슬님께서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이러다 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나는 드슬님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이시온, 내 앞에 앉아서 먹어.”
“길짱님 앞에는 제가 있는데요?”
“비켜줘. 어차피 다 먹었잖아.”
“히잉.”
무림님께서는 우는 목소리를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비워진 자리에 드슬님이 냉큼 앉는다. 그러면서도 자기 몫의 라면은 먹으려 하지 않았다.
“…먹어도 돼, 이시온.”
이시온은 내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라면을 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해로운이 비아냥거린다.
“드슬님, 우리 길마님 말 정말 잘 듣죠?”
“너도 괜히 애 놀릴 생각하지 말고 어서 먹기나 해.”
해로운이 불퉁한 얼굴로 국물까지 싹 비운 컵라면을 보여줬다. 나는 내 몫의 라면을 해로운의 컵라면에 조금 덜어준 뒤 말했다.
“무림님은 오늘 개교기념일이라고?”
“넹!”
“잘됐네. 의뢰나 뛰면 되겠어.”
“…….”
무림님께서 사람이 어쩜 그리 잔인할 수 있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불어터진 라면을 입에 삼켰다.
그렇게 라면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 시선의 주인은 해로운이었다. 해로운 법사님께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연다.
“그게 말이야. 의뢰하니까 생각난 건데.”
“응?”
해로운이 비딱하게 웃음을 지으며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우리, 왜 의뢰가 안 들어오고 있지? 길마님은 왜인지 알아?”
“…….”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뒤늦게 떠올랐다.
해로운이 빈 잔에 물을 따라주고는 내게 건넨다.
“아는 것 같네, 길마님.”
나는 해로운이 건네주는 잔을 받아들며 애매하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 법사님은 눈치 한번 더럽게 빠르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