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추적하게 내리는 비에 지여일은 우산을 펼쳐 들었다. 하나뿐인 ‘혈육’이 챙겨준 것이었다.
“여일 씨, 조심히 들어가!!”
“네, 다들 조심히 들어가세요.”
지여일은 미소를 그린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옆방에 있던 성녀의 일행들은 이미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아쉽네.’
고깃집에서 성녀를, 아니 ‘도하운’을 만날 줄은 몰랐다. 성급하게 인사를 건넨 건 아닐까 싶었지만, 어차피 만났어야 할 사이다.
지여일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성녀에게 붙잡혔던 목이다. 붉게 자국이 남았을 테다.
‘당분간은 가려야겠네.’
그러지 않으면 하나뿐인 혈육이 귀찮게 굴 테니까.
지여일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성하는 그렇게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성하님?”
그러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잔잔히 미소를 걸치고는 인사했다.
“이런 곳에서 만나네요, 마몬.”
잿빛으로 머리칼을 물든 사내 옆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로 서있다.
성하는 그에게도 웃음을 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시온 씨, 이렇게 만나는 건 두 번째죠?”
“…….”
이시온은 아무 말 없이 성하를 쳐다봤다. 노려봤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거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에 성하가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마몬은 성하의 눈치를 보다가 이시온에게 소곤거렸다.
“시온 씨,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나는…….”
“아니요, 마몬.”
성하가 마몬의 말을 끊고선 말을 이었다.
“이시온 씨도 같이 이야기 나누지 않을래요?”
“…같이?”
“네, 이시온 씨도 들으시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에 이시온이 꺼림칙하다는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
“성녀님을 만났답니다.”
들려오는 말에 이시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성하를 쳐다봤다. 그 놀란 얼굴에 성하가 작게 웃음을 흘리곤 말했다.
“인사도 나눴고요.”
“인사를 나눴다고요? 성녀와 말입니까?!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요!!”
“다친 곳은 없답니다. 정말 다행히도요.”
성하는 멱살만 잡히고 끝났다면서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키득거렸다.
“한 대 맞을 각오로 알은척한 건데 말이에요. 우리 성녀님, 너무 유순해진 것 같지 않나요?”
“…….”
마몬도, 이시온도 침묵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나 보네요.”
성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이시온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이시온 씨는 엘로시아를 만나기 위해서 저희와 함께 움직이는 중이지요?”
“…그런데.”
“돌아가지 않아도 그분을 볼 방법이 있는데 어때요?”
“……!”
성하가 이시온의 코앞에 다가와서는 눈웃음을 지었다.
이시온은 당혹감이 가득한 얼굴로 성하를 쳐다봤다. 하지만 곧, 이를 지우고선 입을 열었다.
“…내가, 너의 뭘 믿고.”
“하긴, 그렇네요. 하지만 저는 이시온 씨를 돕고 싶어서요.”
“…나를 돕고 싶어?”
“네.”
쏴아아, 쏟아지는 빗소리가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시온 씨는 성녀님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이시온이 도하운과 함께 드래곤을 잡는 모습은, 성하 역시 보았다. 그 이전, 자신이 불러온 에키나의 마왕을 함께 토벌하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이시온을 곁에 두었다.
“어떠세요, 이시온 씨?”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 하니까.
이시온이 입을 굳게 다물고는 성하를 노려봤다. 수그러진 빗줄기에 성하는 우산을 접고는 이시온의 어깨를 쥐었다.
“……!”
해로운의 마법이 걸려있는 그 어깨였다. 불에 덴 듯한 고통에 이시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성하는 이시온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성녀를 죽이세요, 이시온 씨. 엘로시아를 위해서.”
‘내가, 왜.’라는 말이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이시온이 입을 뻐금거리다가 꽉 막히는 숨에 헐떡였다.
땅을 딛고 서있던 다리가 휘청거리며 무너졌다. 성하는 무릎을 굽히고선 이시온의 귓가에 속닥거렸다.
“죽일 상대가 드래곤에서 인간으로 바뀐 것뿐이랍니다.”
간단하지요?
덧붙이는 말에 이시온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성하를 바라보았다.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위로 덧씌워지는 얼굴이 있었다.
“…엘로, 시아…….”
자신을 죽이고, 또 죽어버린 제국의 수호자.
이시온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얼굴을 두 눈에 담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성하가 이시온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몬, 마법은 이제 능숙하게 다루시지요?”
“네, 성하님.”
“이시온 씨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최대한 많은 마법을 걸어주세요.”
이왕이면 같이 움직여도 좋고요.
들리는 말에 마몬이 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성하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시온 씨가 성녀님께 다치는 거, 원하지 않잖아요?”
“…성하님의 뜻대로.”
그제야 대답이 들려왔다. 성하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걸음을 옮기려 들었다.
[중앙 재난 안전 대책 본부]
금일 23시 42분경, 신도림 1번 출구 인근을 주변으로 게이트 발생.
인근 주민들은 즉시 대피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웅, 울리는 진동에 나타난 메시지가 보였다. 성하가 화면을 끄고서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물들어 있는 붉은 하늘이 보였다.
“…자주도 열리네.”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닌지라 성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이 세계의 신들이라 불리는 것들의 눈은 가린 지 오래.
불길하기 짝이 없는 ‘게이트’가 빈번하게 열리고 있는 건, 자신들을 어떻게든 찾아 없애기 위해서일 거다.
‘어디 한번 해보라지.’
그쳤던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한다. 성하는 접었던 우산을 다시 펼쳐 들고는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성하가 아닌, 지여일.
지한결의 하나뿐인 동생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지한결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작게 떨었다.
“오빠? 게이트 터졌다던데, 차출 안 됐나 봐?”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신발장 한편에 두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성하에 대해 모른다며, 너.’
불청객처럼 찾아왔던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지한결이 잘게 떨리는 손을 주먹 쥐고선 동생을 쳐다봤다.
“불은 다 끄고 뭐 하는 거래?”
거실의 불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서는 동생.
“도빈 씨와는 만났어? 나 감독님이 아무리 하차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회식에 얼굴도 안 비추냐면서 강대표님을 얼마나 닦달했는지 몰라.”
단조로이 들려오는 목소리.
지한결은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오빠?”
“…응.”
한 박자 늦게 대답한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겨있었다. 지한결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동생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해로운의 큰 실수였네.’
비수와도 꽂히는 목소리에 가슴에서 통증이 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지한결은 동생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았다.
어찌 됐든, 저 목을 향한 칼날은 쥐어졌으니.
* * *
“하운아, 센터 쪽에 길드 명단은 제출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아. 그래도 괜찮다고 하네?”
오빠가 그림자가 짙게 물든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어젯밤 열린 게이트로 잠이 부족한가 보다. 그러게 같이 가자니까.
‘하운이는 쉬고 있어. 그리 규모가 큰 게이트가 아니니까 금방 끝내고 올게.’
규모가 크지 않다던 게이트는 1급이었고, 나는 그 즉시 해로운 법사님을 보냈다.
‘길마님, 너무하죠! 법사 지금 잠 엄청 부족한데!!’
내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게이트는 무사히 닫혔고 나는 지금 오빠와 길드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길드, 하운에서 말이다.
센터 쪽에서 ‘귀환’을 알리는 데 판을 깔아줄 거라고 했지만…….
지한결 그 새끼와 같이 일을 할 수 있어야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일 거 같아서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기자들은?”
“섭외 중이야.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연락을 돌렸는데, 곧 답이 돌아올 거야.”
미소를 짓는 얼굴에 나는 고맙다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일정은 나중에 알려줄게. 오빠는 이제 좀 쉬어.”
“집에 데려다줄게.”
“아니야. 해로운 불러서 가면 돼. 그리고 그 전에 갈 곳도 있으니까 오빠는 신경 쓰지 말고 쉬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빠가 붙잡을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내가 갈 곳이라는 곳은 용사님네 가게였다.
에키나의 마왕님 덕분에 산산이 부서졌던 용사님의 가게는 드디어 복구를 끝마쳤다.
해로운이 고쳐줬지만, 내부 인테리어를 바꿨다나 뭐라나.
|Pr. 신살자(길드장)| : 용사님, 바빠?
|Pr. 용사| : 바쁘단다.
1초 만에 답장이 오는 걸 보니, 안 바쁜가 보다. 나는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용사님네 가게로 향했다.
하운에서 용사님네 가게까지는 거리가 꽤 됐지만, 내가 자주 애용하는 법사님의 포털 덕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혼자 놀러 가려고 하죠!!
|Pr. 신살자(길드장)| : 그런 거 아니거든ㅡㅅㅡ
비록, 법사님의 포털을 이용하는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금방 해결됐다.
|Pr. 신살자(길드장)| : 놀고 싶으면 너도 와. 대신 대공님이랑 림이 데리고.
보낸 메시지에 해로운은 좋아라 하며 포털을 열어줬다. 그렇게 나는 용사님네 가게 앞에 당도했다.
“…….”
불행이라면, 용사님이 나를 보고는 문을 걸어 잠가버린 걸까.
“용사님! 열어줘!!”
“꺼지렴.”
“손님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인별에 올린다?!!”
유리문 하나를 두고 대치 중인 용사님께서 어깨를 으쓱거린다.
나는 유리문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도하인이 용사님 주라고 봉투 줬는데! 그거 안 준다?”
“봉투는 무슨 봉투.”
“용사님이 좋아할 만한 봉투! 수표!!”
내 말에 용사님께서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문을 열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다.
나는 곧바로 외투 안쪽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용사님께 보여주며 활짝 웃었다.
“받기 싫으면 말고. 무림님 용돈으로 줘야겠다.”
그러기 무섭게 딸랑, 문이 열렸다. 자본주의의 노예 같으니라고.
가게 문을 열어젖힌 용사님께서 봉투를 내놓으라는 듯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질색하는 얼굴로 하얀 봉투를 용사님의 손에 쥐여줬다.
“진짜 속물이야.”
“칭찬 고맙단다.”
용사님께서는 봉투 안에 모셔진 수표 여러 장을 확인한 후, 내가 안으로 들어가기 편하게 몸을 틀어줬다.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가 입술을 오므리며 감탄했다.
“와, 인테리어 싹 바꿨네?”
분명 모던한 분위기가 일색인 가게였는데, 엔틱한 디자인이 보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가게로 탈바꿈하였다.
용사님께서 카운터에 몸을 기대고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아자젤이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단다.”
“…용사님은?”
“물론, 나도 좋아했지. 지금도 좋아하고.”
단조로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용사님을 빤히 쳐다봤다. 용사님께서 내 시선에 웃음을 짓더니 묻는다.
“주문이나 하렴.”
“공짜야?”
“그럴 리가.”
용사님께서 돈도 많은 애가 공짜를 왜 그렇게 좋아하냐면서 있는 애가 더 그런다고 툴툴거렸다.
나는 그에 키득거리며 웃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그렇게 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래곤슬레이어| : 어디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