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 의뢰를 확인한 다음, 어떻게 했더라. 해로운 씨에게 물어봤던 것 같다.
“글로리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해로운 씨께서는, 미간을 모으고 나를 봤다. 그러다 성큼 다가와서는 웃음을 지었다.
다갈색 눈동자에 새겨진 붉은 마법진이 보였다.
무엇을 보는 걸까.
그런 의문도 잠시, 해로운 씨는 처음 만난 날과 같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공유해, 지한결 씨가 받은 의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의뢰를 공유했으면 안 됐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던전에서 그 누구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
“지한결…….”
“네, 로운 씨… 저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어요…….”
눈앞의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거 다 네 잘못이야.”
내가 ‘지여일’이란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최초의 잘못일 거다.
“유대공이 죽은 것도, 우마훈이 죽은 것도. 강하수가 죽은 것도, 강인한이 죽은 것도. 최강이 죽은 것도.”
그다음은, 몇 번이나 내 동생의 영혼을 집어삼켜 버린 ‘글로리아의 것’을 놓쳐버린 것이 두 번째 잘못일 거다.
“네가 그렇게나 애정하던 도빈이 죽은 것도.”
그리고 마지막은…….
“다 네 잘못이야.”
그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허우적거린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거다.
“내 잘못이 아니라, 네 잘못이라고.”
숨이 꺼져가는 게 거짓이라 여겨질 정도로, 해로운 씨의 목소리에서 떨림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증오만이 느껴졌다.
그러나 울컥, 피를 토해내는 모습에서 나는 그의 숨이 꺼져가는 것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왼팔이 날아가고, 오른쪽 옆구리가 휑하니 뚫렸음에도 해로운 씨는 일어나려 했다.
“…로운 씨, 제발…….”
조금이라도, 그 숨을 부지해 줬으면 했다.
그마저 죽으면, 나는 멸망해 가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홀로 남겨질 테니까.
하지만 해로운 씨는 키득거리며 기어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한결.”
날아갔던 왼팔이, 휑하니 뚫려 장기가 쏟아지던 옆구리가 서서히 ‘복구’되는 것이 보였다.
언제인가 그는 말했었다.
자기 자신에게 힐은 사용할 수 없다고. 그렇다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뭐란 말인가.
당혹감도 잠시, 해로운 씨가 몸을 숙이고선 나와 눈을 마주했다.
붉은 마법진이 그려지지 않은 다갈색 눈동자에서 보이는 건, 허무였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관리자씩이나 되는 양반이 네게 의뢰를 보냈으니,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지. 안 그러겠어?”
“해로운 씨…….”
“하지만, 이것 하나만 약속해. 다음 세계에서는 나한테 알은척하지 않기로. 나뿐만이 아니야.”
어깨가 붙잡혔다.
그러나 이를 붙잡은 손에서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알은척하지 마, 빌어먹을 새끼야.”
그 말을 끝으로 해로운 씨는 나를 뒤로 밀어버렸다. 밀려나지 않을 힘이었다. 하지만, 나는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펼쳐진 붉은 마법진 안으로 삼켜지며, 그것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이름이 있었다.
“안녕, 글로리아(Gloria).”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간 이세계의 신.
닫혀가는 포털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이 지난 세계의 끝이었다.
[축하드립니다!]
[Main Title, ‘회귀자’를 획득하셨습니다!]
《‘회귀자’의 칭호가 관리자에 의해 봉인됩니다!》
[조건부 달성하에 봉인이 해제될 수 있습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푸른 하늘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나의 방이었다.
[Sub Title, ‘세계의 대리자(Ex)’를 획득하셨습니다!]
[Sub Title, ‘세계의 수호자(S)’를 획득하셨습니다!]
[Sub Title, ‘글로리아의 대적자(S)’를 획득하셨습니다!]
[Sub Title, ‘멸망한 세계의 중도 포기자(A)’를 획득하셨습니다!]
돌아왔다는 것에 기쁨은 느껴지지 않았다. 치밀어 오르는 슬픔만이 느껴졌다.
【HIDDEN STATUS OPEN】
[Main]: 회귀자(봉인)
[Sub]: 세계의 대리자(Ex), 세계의 수호자(S), 글로리아의 대적자(S), 멸망한 세계의 중도 포기자(A)
하나같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칭호들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오빠, 출근 안 할 거야? 도대체 어제 얼마나 마시고 돌아온 거야?”
노크도 없이 열린 문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여일아.”
익숙하다기보다는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보다는 불쾌한 얼굴이라는 게 맞을 거다.
내 동생의 껍질의 뒤집어쓰고, 내 동생의 목소리를 내면서 좋을 대로 나를 휘두르려고 했던 이.
“지여일.”
성하.
“…울어? 지금 우는 거야? 우는 거 맞지?”
해로운 씨와의 약속을 어기고 싶었다. 어디 있는지 모를 그를 찾아가 울부짖고 싶었다.
[차원 관리자, ‘X’로부터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일어날 미래를 생각하면, 눈앞의 동생을 지금 죽여야 한다. 그것이 옳은 일이다.
하지만.
“악몽이라도 꿨어? 아니, 근데 악몽 꿨다고 그렇게 울어? 얼마나 무서운 꿈이었는데 그래?”
나는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고.
[차원 관리자, ‘X’가 침입한 ‘글로리아’와 그 휘하 별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소멸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 실패 시: 이 세계의 파멸 그리고 멸망.
그래도 이번은 달라야 했다.
“악몽이 아니었어.”
“응?”
동생이 동생이 아니게 되는 순간, 나는 그 목에 검을 들이밀어야만 한다.
“지여일.”
그러니 그 순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내 잘못인 거야.”
“……?”
일상을 누리고자 했다.
* * *
“해로운의 큰 실수였네.”
“…….”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지한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멱살을 잡고 있던 손도 놓고는 그대로 지한결의 집을 빠져나왔다.
“도하운 씨!!”
부르는 이름을 뒤로하며, 도망치듯 그렇게 지한결의 집에서 벗어났다.
성언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니 지금쯤 도비 새끼는 씩씩거리고 있을 거다.
나는 픽, 웃음을 흘리곤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우르릉, 하늘이 울리는가 싶더니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싫었다.
신발을 묵직하게 만드는 감각이 싫었고, 젖은 옷이 살갗에 들러붙는 것도 싫었다.
그래도 하나 좋은 것이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을 숨겨주는 것 말이다. 이것 하나만큼은 정말 좋았다.
|Pr. 북부대공| : 길마님, ㅇㄷ에여? 법사님이랑은 만났어여?
나타난 메시지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비에 씻겨간 눈물이 다시 차오를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머리칼을 젖게 만들었던 빗방울이 뚝 그치고 말았다.
거리를 울리는 세찬 빗소리는 계속해서 들리는 중이니, 비가 그친 것은 아닐 거다.
느릿하게 고개를 드니 머리 위에 쓰인 우산이 보였다.
“…뭐야.”
이를 들고 있는 남자 역시도.
“네가 왜 여기 있어.”
“길마님을 데리러 왔으니까 여기 있겠죠?”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해로운 법사님께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소중한 길마님, 비가 이렇게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데 감기라도 들면 어쩌나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데리러 왔다며, 법사님은 너스레를 떨며 웃음을 지었다.
내게로 기울어진 우산에, 해로운의 어깨가 젖어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해로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법사는 모르는 게 없죠?”
절로 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그래도 나도 가끔 모르는 게 있더라고. 아니, 아주 많이 있더라.”
“……?”
다시 고개를 돌려 해로운을 쳐다봤다. 답지 않게 씁쓸한 듯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길드장님. 아니, 도하운.”
우산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이 젖은 뺨을 쓸고 지나갔다.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 없어?”
“…….”
성하가 찾아왔어. 나를 그렇게나 괴롭혀서, 내가 수십 수백 수천 번을 죽였던 그 ‘성하’가 나를 찾아왔었어. 망할 회귀자 씨를 찾아갔지. 물어봤어. 그런데 그 새끼가…….
두서없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차라리 성난 목소리로 내게 화를 냈으면 했다. 조금 전에는 왜 자신에게 그런 힘을 사용한 거냐고.
그렇게 내게 화를 냈으면 했다.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멋쩍게 사과했을 텐데.
“우리 길마님은 비밀도 참 많지.”
저렇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어서 돌아가자, 길마님.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기에 나는 해로운의 손을 잡아당기고선 그대로 그를 끌어안았다.
지난 세계의 길드장님을, 그렇게 꼭 끌어안았다.
가까스로 우산을 놓치지 않는 해로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도하운?”
“조금만 이렇게 있자.”
젖은 몸에 닿는 온기가 따뜻했다. 해로운이 두 눈을 데굴 굴리고는 입을 연다.
“길마님, 나는 있잖아.”
“응.”
“길마님이 이렇게 답지 않게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면, 참 좋은데 한편으로는 무섭더라?”
“왜?”
“또 무슨 일을 시키려나 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젖은 손을 들어 해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길마님, 내가 저번에 이성과의 접촉이 마력 회복을 빨리 시키는 방법이라고 했잖아.”
“거짓말이라며.”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죠!”
“그래서 이렇게 종종 해달라?”
“어떻게 알았지.”
속 보이는 새끼.
나는 두 손을 들어 해로운의 뺨을 붙잡고선 웃음을 지었다.
“해로운.”
해로운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를 본다. 나는 그에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도 수고해 줘.”
싱글벙글 웃음을 짓고 있던 해로운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봐봐, 이러니까 내가 무섭다고 하는 거야. 우리 길마님은 머릿속에 로운이 일 시킬 생각밖에 없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해 줬다.
“어서 포털이나 열어, 법사님.”
일상을 누리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다. 해로운의 마법이 없는 한, 내 얼굴을 알아보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기도 했고.
그러나 나의 일상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하운아, 왔어?”
“도하운! 너……! 배서하가 불렀다고 해도 그렇지! 식사 도중에 가버리면 어떻게 해! 그보다 왜 그렇게 비 맞은 생쥐 꼴이야!!”
“뭐? 하운이가 비를 맞았다고?! 해로운 씨! 제가 우산 두 개 줬지 않습니까? 설마, 혼자 쓰고 왔어요?!”
“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러한 나의 일상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차원 관리자, ‘X’가 침입한 ‘글로리아’와 그 휘하 별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들을 모두 소멸시켜 달라고 요청합니다.]
▷ 실패 시: 이 세계의 파멸 그리고 멸망.
의뢰를,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귀환(歸還)의 존재를 견고하게 하는 것.
내가 없어도, 굴러갈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