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네?”
“옆방이시잖아요.”
여자는 피우던 담배를 스탠드 재떨이에 비벼 끄고서는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이 왠지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불쾌했다.
그보다 옆방이라니, 옆방이라면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촬영 관련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을 텐데…….
의문도 잠시,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강 대표님 들어오실 때 잠깐 봤었거든요.”
“아…….”
그곳의 스태프 중 한 명인가 보다. 그런 거라면 내게 이렇게 알은척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마왕님의 매니저 노릇을 하겠다며 촬영장을 방문했던 때에 아주 큰 사고가 터졌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드슬님, 도대체 고양이를 언제 데려가려는 거지?
“우마훈 씨랑도 아는 사이죠? 우마훈 씨 매니저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들리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나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건 잠깐, 아르바이트 식으로 한 거라서…….”
“그래요? 나 감독님께서는 도하운 씨가 계속 맡아주셨으면 하던데요?”
이런,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만 내 이름을 모른다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었다. 적당히 사고를 쳤어야 말이지.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여자의 대답을 피했다.
어서 여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지한결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하지만.
“그런데 이상하네요, 도하운 씨.”
여자는 대화를 계속 이어갈 생각뿐인 것 같았다.
이 순간에 마왕님께서 나타나 주시면 좋을 텐데. 그럼,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끊어질 테고 말이지.
그러나 유리문이 젖혀지며 마왕님이 나타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에게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내가 아는 도하운 씨가 맞는지 모르겠어.”
“……?”
들린 말에 살짝 벌려졌던 입술이 도로 닫혔다.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여자에게서 독한 향수를 뿌린 것과도 냄새가 났다. 조금 전에 피운 담배 냄새일 거다.
다가선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비아냥거린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도하운 씨가 맞나?”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다소 날 선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여자는 아무리 많게 잡아도 해로운의 또래, 그러니까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
내가 아는 20대 후반이라고는 공시 준비한다고 학교를 휴학한 선배밖에 없었다.
내 물음에 여자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옛날 생각나게 자꾸 왜 그러세요? 당신답지 않게.”
코끝을 간질이는 독한 향기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가 그런 내 얼굴을 두 눈에 담으며 즐겁다는 듯이 말한다.
“숨길 줄 알잖아요, 당신 감정.”
“…….”
들리는 목소리 위로,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겹쳐지기 시작했다.
‘숨기세요. 당신의 감정, 습관 그 모든 것들을 숨기셔야 합니다.’
심장이 거세게 울린다. 그 고동 소리를 뚫고서 나긋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요?”
들린 목소리에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성하.”
목소리가 허망하게 흩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 * *
야근이 있다던 지한결은 이른 시간에 퇴근해 원목 의자에 앉아있는 중이었다.
“사이비, 없는 시간 내서 왔더니 대접한다는 저녁은 보이지 않는군.”
도빈과 함께 말이다.
도빈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지한결이 들고 있던 폰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도빈 씨. 급하게 연락할 것이 있었거든요.”
“그 급하다는 연락을 끝냈으면 어서 저녁을 대접해 줬으면 하는데. 이 몸은 바쁜 인간이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지한결은 주머니에 넣어뒀던 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무슨 연락 오면 알려주시겠어요?”
“연락?”
“네, 답장이 올 줄 알았는데 안 와서요.”
아무래도 그 급하다는 연락과 관련된 답장인 듯 보였다. 도빈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부엌으로 들어가는 지한결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지한결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도빈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도빈 씨?”
“사이비, 네놈에게 뭔가 휘둘리는 느낌이라서 말이다.”
“도빈 씨가 저에게요?”
지한결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달걀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도빈이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그 허튼소리들을 무시하면 되는데, 그게 왜 안 되는지 이 몸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허튼소리인가요…….”
도빈이 말하는 ‘허튼소리’란 것은, 자신이 말해줬던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들일 거다.
지한결이 씁쓸하게 웃음을 짓고선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휘둘려 주시면 안 될까요?”
“이 몸을 뭘로 보고.”
그에 지한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달아오른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뜨려 프라이를 해먹을 때까지도, 둘 사이에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고급 음식점에 모여있는 귀환의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림제일고수| : 형아들, 길짱님 왜 이렇게 안 돌아와여?
|무림제일고수| : 누가 좀 데리고 와봐여ㅠ
|용사| : 최강, 이런 건 따로 방을 파서 이야기를 나누든지 하렴.
따로 채팅방을 만드는 법 따윈 없는데도, 강인한은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 뒤로 강하수가 말을 덧붙였다.
|정령사| : 맞는 말입니다.
|정령사| : 안 그래도 마왕님 때문에 정신 사나워 죽겠는데, 더 정신 사납습니다.
|마왕| : 짐은 사납지 않으니.
나타난 메시지에 해로운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유대공은 마시던 물을 쿨럭이며 내뱉었다.
“대공 씨? 괜찮습니까?”
“네? 네, 괜찮아요.”
유대공이 황급히 입가를 닦으며 도하준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하준이 그에 그린 듯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하운이에게 지금 어디 있냐고 메시지를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화장실에 간 게 아닌 것 같아서요.”
“그것도 아니면, 변기통에 빠져버렸거나.”
“하인아.”
타이르듯 부르는 목소리에 도하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도하인도 속이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진짜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설마, 방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도하인의 뚱한 목소리에 유대공이 멋쩍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연락해 볼게요.”
“그 전에 저는 잠깐 일어나 보겠습니다.”
해로운이 도하준을 향해 눈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유대공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은 내가 찾아올게.
|Pr. 북부대공| : 어디에 계시는 줄 알고여?
|Pr. 9서클대마법사| : 어디든 있겠지. 그러니까 적당히 둘러대고 있어.
유대공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보냈지만, 해로운은 사람 좋게 이를 웃어넘길 뿐이었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해로운이 한 일은 지나가는 종업원을 붙잡아 도하운에 관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봤는데요.”
“아, 고마…….”
“도하운이가 여기 있느냐?”
“!!”
난데없이 들려오는 불유쾌한 목소리에 해로운이 놀란 얼굴을 보였다. 해로운에게 도하운의 행방을 알려줬던 종업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업원은 복도의 불빛에 그림자가 짙게 진 우마훈의 얼굴을 보고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해로운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선 채,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정령사님께 와있다고 하는 건 들었는데, 진짜로 와있는 줄은 몰랐죠?”
“불만이느냐?”
“응, 불만이야.”
해로운이 활짝 웃고선 손가락을 들었다.
“화장실 가는 거라면 저쪽인데.”
“정령사 놈이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해서 나온 것뿐이니라.”
그에 해로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감탄했다.
“오, 마훈이 정령사님 말씀 잘 듣죠?”
“도하운이 다음으로 정령사 놈의 말을 잘 듣기로 했도다.”
“내 말도 좀 잘 들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니라, 해로운 법사 놈아.”
해로운이 짜증 가득한 웃음을 보였고, 우마훈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보였다. 둘은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왜 따라오는 거야?”
“왜 따라오느냐?”
똑같은 방향으로 말이다.
해로운과 우마훈은 사이좋게 얼굴을 찌푸렸다가 긴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훈 씨?”
그러다 부르는 목소리에 우마훈이 멈춰 섰고, 얼떨결에 해로운도 같이 멈춰 서고 말았다.
|Pr. 9서클대마법사| : 마왕님, 이게 무슨 짓이죠! 이 손 당장 놓죠!!
우마훈이 혹여나 해로운이 먼저 갈까, 그 손목을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마훈은 해로운의 메시지를 무시하고선 자신의 이름을 부른 여자에게 알은척을 했다.
“지 작가야, 나 감독이 찾더니만 이제 들어오느냐.”
“머리 좀 식힌다고요. 그보다 어디 가시나 봐요? 옆에는…….”
“해로운 놈이다.”
“야! 그렇게 소개하면 어떻게 해!!”
빼액 지르는 목소리에 우마훈은 심드렁한 얼굴을 보였다. 그에 여자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하운 씨를 찾는다면 밖에 계세요. 어서 가봐요.”
“도하운이를 아느냐?”
“안다면 아는 사이죠.”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우마훈과 해로운을 지나쳐 가버렸다. 해로운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길마님의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는 않은데…….”
말하는 걸 보니,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의 작가인 듯 보였다. 그런데 그 작가와 도하운이 아는 사이라니.
해로운은 고개를 갸웃거리고선 우마훈을 불렀다.
“마훈아, 지 작가라는 분하고 길마님이 무슨 사이인지… 야!!”
우마훈은 이미 유리문을 열어젖히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