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웨오옹.
아직 우리 집에 있는 리카가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그 뒤로 꽤나 낯이 익은 남자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다친 곳 없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도하운 씨.”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도하인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공이 내 뒤를 따르며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대공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Pr. 신살자(길드장)| :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저 새끼도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Pr. 북부대공| : 없었단 말이에여ㅠ!! 진짜 없었는데ㅠㅠㅠ!!
억울하다는 듯이 돌아오는 답장에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집어삼켰다. 오빠와 우마한 길드장이 나와 지한결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운아, 지 팀장님과 아는 사이야?”
“신… 크흠, 지 팀장님께서 도하운 양과 아는 사이인가 봅니다?”
오빠와 우마한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얼굴을 와락 찌푸린다. 나는 혹여나 둘이 싸울까 싶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렇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야. 조금 안면이 있는 사이?”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
도하인이 나를 보고는 비딱하게 웃음을 짓는다.
“센터에서 만난 ‘아는 사람’이 저분 아니었어, 도하운?”
뒤늦게 센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망할, 도하인 새끼! 그런 건 좀 잊어주지!
도하인의 말에 오빠가 놀란 눈을 하고는 내게 물었다.
“하운아, 네가 어떻게 지 팀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지 팀장님께서는 현장 전문이라 센터에서도 잘 안 보이시는 분인데 말입니다.”
우마한의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한 번 차고는 지한결을 쳐다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지한결이 움찔거리더니 헛기침을 터트리며 모두의 이목을 돌렸다.
“도하운 씨와는 개인적으로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요? 도대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오빠의 집요한 질문에 지한결이 나를 흘긋거리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개인적인 일이라…….”
“그러니까 그 개인적인 일이 뭔지 묻고 있는 거 아닙니까?”
도하인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지한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는데, 그 시선이 마치 내게 용서를 구하는 눈빛 같았다.
뭐야, 불안하게 왜 그런 눈빛을 보내는데?
의문도 잠시, 나는 지한결이 왜 내게 그런 시선을 보냈는지 알게 되었다.
“혹시 도빈 씨라고 아십니까?”
“도빈?”
“왜… 지금 방영 중단이 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의 황태자 역할을 맡았던…….”
“아! 도비!! 네, 알기는 아는데 그 사람이 왜 여기서 나오는 겁니까?”
평소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의 애청자였던 도하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묻는다. 그 물음에 지한결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와 하운 씨가 도빈 씨의 팬 미팅 현장에서 만났거든요.”
“…네?”
나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입을 뻐금거리기만 했다.
저 망할 새끼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너와 내가 누구의 팬 미팅 현장에서 만나?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우웅 울리는 게 느껴졌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지한결을 보니, 지한결이 눈짓으로 휴대폰을 가리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보여주고는 급한 연락이라며 휴대폰을 들었다. 도하인이 너한테 올 급한 연락이라면 교수님 면담밖에 없지 않냐고 비아냥거렸지만 무시다.
[010―■X■X―X□X□]: : 적당히 말을 맞추십시오. 아니면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지어내라는 겁니까?
“…….”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가 애써 이를 풀고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맞아, 도비 색…이가 아니라! 도빈 씨, 팬 미팅 현장에서 만났었어!”
“진짜?”
“응! 진짜!!”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때 한결 씨랑 따로 이야기 나눈 것도 서로 도빈 씨 사진 공유하려고 한 거였는걸?”
시발.
귀여운 고양이라면 몰라, 내가 왜 도비 새끼의 사진을 공유하고 있어! 저장해 둔 것도 없는데!!
하지만 나는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입꼬리를 힘껏 올리고 있는데, 북부 대공님께서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Pr. 북부대공| : 길마님, 그 사람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여? 아니면 싫어하는 척했던 거에여?
|Pr. 신살자(길드장)| : 아니, 싫어하는 거 맞아.
|Pr. 신살자(길드장)| : 지금 저 새끼랑 같이 적당히 말 맞추고 있어서 그래.
대공님께서 지한결을 흘긋 쳐다보고는 내게 또 다른 메시지를 보내왔다.
|Pr. 북부대공| : 근데 왜 하필 도비래여?
|Pr. 신살자(길드장)| : 내가 어떻게 알아? 대화에 집중이나 해.
대공님께서 이 환장할 대화에 어떻게 집중하겠느냐는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나는 이를 못 본 척하며 모두를 쳐다봤다.
도하인이 미심쩍다는 듯이 나를 보고는 말했다.
“너 연예인에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최근에 생겼어.”
“그러고 보니…….”
오빠가 목소리 끝을 흐리고는 우마한 길드장을 쳐다봤다. 우마한이 왜 쳐다보냐는 듯이 얼굴을 찌푸린다.
오빠는 그에 함박웃음을 지어주고는 말했다.
“우리 하운이가 댁네 남동생도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왜 과거형입니까? 지금도 좋아하고 계실 텐데요, 도하준 길드장.”
아닌데요.
나는 질색하는 얼굴로 우마한 길드장을 쳐다봤다. 질색하는 내 얼굴을 본 우마한이 난데없이 뺨을 한 대 얻어맞은 얼굴을 보인다.
나는 그런 우마한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여 주고는 지한결에게 물었다.
“그보다 여기는 왜 오셨데요?”
“도하운 씨에게 전해드릴 게 있어서 말입니다. 우마훈 씨에게도 전해드려야 하는데, 그건 우마한 길드장님께 맡겼습니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지한결이 품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도하운 씨의 각성자 증명서입니다. 등급은 S급.”
“!!”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서울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우리 덕분에 금방 닫혔다고는 하나, 그래도 꽤 큰 피해를 입어 여기저기서 난리였다. 그 난리를 잠재우고 있는 게 센터의 헌터들이었고.
하운과 화랑도 길드가 입은 피해를 복구시키는 즉시, 센터를 도울 거라고 들었다.
오빠가 내가 받은 증명서를 한 번 살펴보고는 지한결을 향해 미소를 보였다.
“바쁜 와중에 직접 가져다줘서 감사합니다, 지 팀장님.”
“다른 전할 말도 있으니 겸사겸사해서 가지고 온 겁니다. 하운과 화랑이 한자리에 있는 경우가 흔치 않기도 하고요.”
지한결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도하운 씨, 각성자 증명서를 받은 이유는 길드를 설립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내가 오기 전에 서로 이야기가 오갔나 싶었지만, 오빠와 도하인 그리고 우마한 길드장은 놀란 눈을 보이는 중이었다. 저런 얼굴을 보이는 건, 오간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저 새끼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지?
눈가를 살짝 찡그리는데 불현듯이 센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도하운 씨, 당신은 ‘귀환(歸還)’을 밝힐 생각입니까?’
‘그러려고 여기 와서 각성자 증명을 받았겠지?’
망할, 나한테서 들었던 이야기구나. 그리고 그 이야기를 높으신 분들께 알렸나 보다.
망할.
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지한결에게 말했다.
“그럴 생각이기는 한데, 지금 센터 쪽이 바빠서 길드 설립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
“센터는 도하운 씨의 길드를 곧바로 승인해 줄 겁니다. 그럴 준비도 되어있고요.”
지한결의 말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한결이 그런 나를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지금 바로도 됩니다.”
그러면서 내게 내민 서류들은, 길드 설립과 관련하여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주의 사항이나 뭐 그런 것들이었다.
해로운 법사님과 검토한 보고서에서 읽은 적 있는 것들이라 나는 이를 대충 눈으로 훑고는 대공에게 넘겼다.
|Pr. 북부대공| : 이걸 왜 저한테 줘여?
|Pr. 신살자(길드장)| : 너도 알아야 할 것들이니까 너한테 주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읽어.
대공이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인다. 나는 그 모습을 무시하며 지한결에게 물었다.
“센터 쪽에서 원하는 게 뭐야?”
“도하운.”
난데없이 말을 낮춰버리자 도하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주의를 준다. 하지만 도하인은, 들려오는 지한결의 대답에 나와 같이 지한결에게 말을 낮춰버리고 말았다.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려지기를 원합니다.”
“뭐? 지금 우리 누나가 세울 길드를 이용하겠다는 거지, 지금?”
지한결은 드러나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 인사들이 많이 모여있으니까요. 회사원 헌터 H씨부터, 우마한 길드장님의 동생분 그리고…….”
지한결이 나를 보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도하운 씨까지.”
보이는 미소가 재수 없게 느껴졌다. 지한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하인이 테이블을 내리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어쨌든 우리 누나의 길드를 이용하겠다는 거잖아!!”
“꽤나 불쾌하게 들리는데 말입니다, 지한결 팀장. ”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도하준 길드장님.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 상황이 그리 좋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지한결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서울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게이트는 한 시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 만에 모두 닫혔다.
그렇다고 하나,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무너진 건물들만 해도 수십 채는 된다고 들었다. 열심히 복구 중이지만, 언제 일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두가 장담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지한결이 내게 내밀었던 길드 관련 서류를 대공에게서 뺏어 들고는 말한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위쪽에서는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 같더군요.”
“위쪽?”
센터의 고위 관료들을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센터를 만드신 아주 높으신 분들 말하는 거야. 너는 신경 쓸 거 없어.”
도하인의 말에 나는 “아.” 하고 짧게 탄식하고는 지한결을 쳐다봤다. 지한결은 서류를 챙겨 들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서류를 뺏어버리고는 펜을 들었다.
“야!!”
“하운아!!”
도하인과 오빠가 뒤늦게 나를 말리려고 들었지만, 이미 서류에 사인을 한 뒤였다.
나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지한결에게 서류를 넘겼다.
“이러면 되는 거죠? 판은 그쪽이 만들어주나?”
지한결이 못마땅한 얼굴로 내게서 서류를 넘겨받으며 말했다.
“곧, 연락이 갈 겁니다.”
누구한테서 연락이 갈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지한결과 나눌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기왕이면 그가 이와 관련해서 연락해 줬으면 했다.
서류를 챙겨 든 지한결은 우리 모두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꾸벅이고는 문을 열었다. 그러기 무섭게 어린아이 둘이 방 안으로 우다다 뛰어들어 왔다.
“엄므아! 아쁘아!! 비니가 자꾸 리미 맘마 못 먹게 해!!”
“아빠! 림이가 자꾸 참새를 먹으려고 해요!”
“…….”
오빠와 도하인의 시선이 나와 옆에 앉아있는 대공에게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우마한 길드장이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유빈이를 안아든다.
“유빈아, 우리는 잠깐 나가 있을까? 지 팀장님,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잠깐, 우마한 길드장님?
나는 소리도 없이 닫히는 문을 황망하게 쳐다봤다. 달칵, 닫혀버린 문에 방 안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잠깐이었다.
“도하운.”
“하운아.”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