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카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드슬이의 검이 가로막혔다.
드슬이의 검을 막아낸 마왕 새끼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네 녀석, 지켜보기만 한다지 않았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드슬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가로막혔던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 그려진 궤적이 마왕을 향했으나, 마왕은 그 공격이 가소롭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이를 피해냈다.
그러나 드슬이가 노린 건 마왕이 아닌, 그가 펼친 검붉은 빛깔의 마법진이었다.
[두 개의 갈림길(Lv. ??), 지정 대상―]
흐릿한 시야에 나타났던 메시지가 노이즈가 낀 TV처럼 지지직거리더니 사라졌다. 파괴된 마법에 마왕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녀석…….
“마법을 부숴도 시전자한테 타격은 안 들어가나 보네.”
아쉽게.
나지막하게 덧붙이는 뒷말과 함께 드슬이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곤 두 눈으로 좇기 힘들 속도로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캉, 카앙―!
여러 번,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만이 드슬이가 마왕한테 밀리지 않고 그와 대적하고 있음을 알려줄 뿐이다.
드슬이가 그렇게 마왕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 용사가 나를 부축하며 물었다.
“길드장, 이거 마실 수 있겠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리를 냈다가는 입안에 고인 핏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 잠깐만. 어차피 저걸 마시려면 입을 벌려야 하잖아. 용사님께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려고 했다.
“…콜록!”
용사님이 억지로 내 입을 벌리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삼키지 못한 핏물이 잔기침이 되어 튀어 나갔다.
용사님의 뺨에 묻는 붉은 것에 황급히 용사님의 손목을 잡았지만, 용사님은 그대로 드슬님께서 주고 가신 것을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대로 삼키렴.”
이대로 어떻게 삼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용사님 같으니라고!!
하지만 용사님께서 입을 벌리고 있는 통에 나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레몬즙을 탄 것과도 같은 물을 꿀꺽 삼켰다.
“윽…….”
핏물과 섞여 비릿한 맛이 올라와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가를 가리자 용사님께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좀 괜찮니?”
“…괜찮아 보여?”
오늘 먹은 게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잘못했으면 여기에 무지개떡을 하나 만들었을 거다.
사정없이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용사님께서 내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행히도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러니까 안 괜찮다고!
신경질적으로 입가를 닦아내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쿠구궁―!
내리친 벼락이 코앞에서 멈췄다.
드슬님께서 검으로 막아주신 덕분이었다. 헛숨을 들이켜는데, 드슬님이 대검을 한 번 크게 휘둘러 연기를 걷어내고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일어나셨네, 길드장님?”
비딱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낯짝에 나는 짜증스레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나한테 뭘 준 거야? 이상한 거 준 거 아니지?”
“이상한 거 주려다가 참았어.”
“말이나 못 하면.”
말은 이렇게 했지만, 드슬님께서 뭘 주신 건지 대충 예상이 갔다.
목구멍을 넘기면서 올라오는 비릿한 맛에 긴가민가했지만, 단숨에 가벼워지는 몸에 확신했다.
“성수를 어디서 얻어온 걸까, 드슬님?”
“알면서 물어보는 거지, 지금?”
나는 눈웃음을 지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끝마쳤다.
성수를 어디서 얻었는지는 보나 마나 뻔하지. 드슬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글로리아의 신관들이 얻어다 준 걸 거다.
하지만, 도대체 성수를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르겠다.
글로리아에서 가지고 온 건지, 아니면 이 세계에서도 이런 걸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건지.
그 새끼들을 만나면 물어볼 게 또 하나 더 생겼다.
“움직일 수 있겠어?”
“덕분에.”
나는 손끝에 잡히는 검의 손잡이를 쥐고서는 드슬님 옆에 섰다.
“용사님, 남은 것 좀 검에 뿌려줄래?”
내 말에 드슬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깝게. 그거 귀한 거라던데.”
“걔들한테나 그런 거지.”
물론, 나한테도 귀한 것들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호오, 일어날 힘이 아직 있나 보군.
바닥에 고인 핏물과도 같은 눈이 내게로 향한 것과 동시에 발끝에서부터 저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빌어먹을 마왕 새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꾹 참았다. 그런 나를 용사님께서 붙잡으려고 든다.
“도하운! 그냥 얌전히 있으렴!!”
“싫어.”
짓씹듯이 말을 내뱉고서는 걸음을 옮겼다.
[권능, ‘전진(前進)’이 활성화됩니다.]
치켜든 검이 검붉은 마법진에 가로막혔다. 힘주어 이를 깨뜨리고는 다시 검을 움직였다.
“마왕님, 내 친구가 수능 준비할 때 하나만 죽어라 팠거든? 하나는 포기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내 검을 피한 마왕님께서 한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내게 묻는다.
―수능?
“마왕님은 몰라도 되는 이야기야.”
그런 마왕님께 다시 검을 휘둘렀다. 푸른 궤적이 마왕님의 뺨에 기다란 생채기를 만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나만 선택했거든?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알아?”
―흐음?
“그해 수능이 불수능이라서 둘 다 망했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게냐, 성녀.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났던 생채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주변이 검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도하운!!”
드슬님과 용사님께서 뒤늦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대로 걸음을 살짝 뒤로 물렸다.
“네가 준 선택지는, 뭘 골라도 망하는 선택지였다고.”
검붉은 빛이 곧, 눈부실 정도로 붉은 마법진에 휩싸였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콰광―!!
“그걸 이야기하고 싶은 거야.”
그림이 그려져 있던 벽이 부서졌다. 그와 함께 나타난 건, 해로운 법사님이셨다.
해로운이 나를 보며 눈웃음 짓는 것과 동시에 메시지 하나가 나타났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메시지에 대답을 너무 안 해주셔서 직접 와버렸죠?
네 메시지 받지도 못했다, 새꺄!
* * *
[메테오(Lv 측정 불가), 지정 대상 ‘아자젤’.]
넓게 펼쳐진 붉은 마법진에서 커다란 암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법사! 이 미친 새끼야!!”
쨍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우리 길드장님께서는 무사하신 모양이다.
해로운은 목소리가 들린 쪽에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는 곧장 손을 움직였다. 느릿하게 떨어지던 암석이 속도를 더하여 마왕, 아자젤에게로 빠르게 향했다.
이윽고, 여러 개의 암석이 아자젤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듣기 괴로운 비명에도 해로운은 평온한 얼굴로 허공에 떠있을 뿐이었다.
쿵, 쿠궁―
해로운은 건물을 뒤흔들던 울림이 멈춘 뒤에야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곤 보이는 광경에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어깨를 겨우 넘을까 싶은 도하운이 이시온과 강인한을 지키듯이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작은 어깨에 잘도 두 사람을 끌어안고 있다 싶었다.
해로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도하운에게 다가갔다.
“내가 길마님 주변에 실드(Shield)도 안 쳐줬을까 봐?”
그에 도하운이 짜증스레 외쳤다.
“쳐줬겠지! 하지만 암만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그런 걸 날리면 어떻게 해!!”
“히잉, 길마님 너무하죠. 법사는 길마님이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건데 다짜고짜 욕 들어먹고 있죠.”
해로운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이시온이 질색하는 얼굴을 보였다. 이를 놓치지 않은 해로운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윽……!”
“해로운! 애먼 애 괴롭히지 마!”
“괴롭히는 거 아니죠? 드슬님께서 법사를 가소롭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법사의 무서움을 좀 보여준 거죠?”
“지랄을… 으윽……!”
이시온이 괜히 입을 열었다가 더한 고통을 얻게 됐다. 어깻죽지를 붙잡고는 신음을 참는 얼굴에 도하운이 손을 들었다.
“해로운, 그만 안 해?!”
“아야! 그만하면 되잖아! 그만하면!!”
찰싹, 어깨를 때리는 손길에 해로운이 불퉁한 얼굴로 이시온에게서 마법을 거뒀다. 그러고는 도하운의 양 볼을 붙잡고는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
“잠깐, 길마님. 지금 꼴이 어떤 줄 알아?”
도하운이 해로운의 손목을 붙잡아 제게서 떨어뜨리고는 뚱하게 말했다.
“당연히 엉망이겠지.”
“그래, 하준 형님께서 보시면 뒷목 잡고 넘어갈 만큼 아주 엉망이야.”
그에 도하운이 몸을 움츠리고선 입술을 씰룩였다.
“그건 곤란한데…….”
피투성이가 된 꼴로 잘도 말한다 싶었다. 해로운은 도하운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도하운이 그를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며 물었다.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은 어디 있어? 괜찮아?”
“다른 길드원들은 지금 밑에서 해골들이랑 놀고 있죠?”
“밑에서……?”
도하운은 그제야 열고 들어왔던 ‘문’이 사라졌음을 자각했다.
도하운이 멍하니 입을 뻐금거리다가 다급한 얼굴로 해로운을 붙잡고는 물었다.
“하인이는? 도하인은 괜찮아?”
해로운이 저를 붙잡은 손을 제 손바닥으로 덮으며 미소 지었다.
“도련님은 괜찮아. 최우선으로 보호 중이니까 걱정하지 마, 길마님. 그보다.”
해로운이 도하운을 자신의 품으로 이끌고선 고개를 돌렸다.
쿠르릉―!
―끄윽… 으으윽……!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절반이 날아간 마왕, 아자젤이 꿈틀거리며 제 몸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인한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이시온은 끔찍하다는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도하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해로운만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얼굴로 가볍게 말했다.
“저것부터 처리해야겠는데? 좀비도 저렇게 살아나지 않는데, 진짜 끈질기네.”
안 그래?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도하운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