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울리기만 할까, 벽 곳곳에서 계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던전을 공략한 적 없는 몸이기는 합니다만…….”
강하수가 나선형의 계단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던전이란 게 이렇게 변형이 잦답니까?”
“나도 던전은 공략해 본 적이 없단다, 강하수.”
강인한이 계단을 올라서며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는 ‘던전’ 같은 게 아니거든.”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긴가민가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용사님?”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지랄맞은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란다.”
사사삭,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에 강하수가 계단 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계단을 검게 덮고 있는 수십 마리의 지네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크기가 성인 남성은 될 법한, 굉장히 커다란 지네들이 말이다.
“우오오오! 이프리트시여!!”
“!!”
* * *
“…지한결?”
“들어가면 안 됩니다, 도하운 씨.”
손목에서 느껴지는 악력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거 놔.”
“놓을 수 없습니다.”
“야.”
억지로라도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잘못했다가는 손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 얼마나 세게 잡고 있는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으니까.
“한결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꽤 무례하네.”
“윽……!”
지한결이 잡고 있던 내 손목 주위로 파지직, 붉은 전기가 튀었다. 붉게 튀는 전기에 지한결은 곧장 얼굴을 찌푸리며 제 손을 거뒀다.
나는 빨갛게 남은 자국을 어루만지며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해로운이 내 옆을 지키듯 지한결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다. 비단 해로운뿐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귀환의 모두가 지한결을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노려보는 중이었다.
지한결이 그 시선에 주춤거리며 물러난다. 나는 짜증스레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여긴 왜 있어? 그런 옷차림으로… 어디 게이트라도 터진 곳이 있나 봐?”
“…….”
누가 봐도 몬스터를 사냥하러 갈 차림새였다. 하지만 게이트가 터졌다며 날아온 문자 따윈 없었다.
그런데 저렇게 단단히 준비한 차림새로 이곳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다니.
“지난 세계에서 지금과 같은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걸 해결하기 위해 온 거고.”
지한결이 움찔거리고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손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쿠우웅―!
느닷없이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꺄악! 뭐야?!”
“무너진다! 피해!!”
“으아아악!!”
그와 함께 동굴을 뚝 떼어놓은 형상이었던 던전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주변의 건물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파편에 사람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황을 통제 중이던 헌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으아악!”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인지, 달리다 넘어진 남자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다. 남자의 위로는 커다란 간판이 떨어지고 있었다.
“법……!”
서늘하게 내려간 온도에 나는 법사를 부르려던 입을 다물었다. 남자 위로 떨어지던 간판이 아래서부터 올라온 얼음에 파묻히고 말았다.
얼어붙은 간판은 이내 산산조각이 나서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 생성됐던 얼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저 광경을 어디서 봤는지, 나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너 뭐야……?”
저건 도비의 스킬이었다. 내 물음에 지한결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제가 누구인지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까 묻는 거야. 타인의 스킬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니, 듣도 보도 못했다고.”
“헌터들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만.”
“관심 없어.”
한 걸음, 지한결에게 다가가서는 입을 열었다.
“네가 ‘회귀자’라서 관심을 가지는 거야.”
“…….”
지한결은 말없이 나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살짝 돌리며 말했다.
“저는 도하운 씨의 말씀대로 일을 해결해 보려고 왔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지한결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 말곤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한결이라면 던전의 문을 손쉽게 열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괜히 나서서 상황을 바꾸려고 들지 마십시오.”
“…뭐?”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들에 개입하지 말란 말입니다.”
지한결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흔들림 없이 곧은 눈이 일그러진다.
“당신이 ‘도하운’이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해도 세상은 결국 멸망의 길로 향할 겁니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는 중입니다.”
지한결이 모습이 변형된 던전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 던전은 그 과정 중에 하나고요.”
“…그러니까 지금 얌전히 있으란 말이지?”
“알아들으셨으니 다행입니다.”
멸망으로 향하고 있든, 그러지 않고 있든 상관없다. 내가 할 말은 단 하나였다.
“지랄하지 마.”
저 안에 도하인이 있고, 용사님은 연락되지 않는 상황이다.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말이다.
나는 지한결에게 다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고는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 같은 건 없어. 무시하고 내버려 두고 있다가 우연이란 게 맞아 들어 일어나는 일들이겠지.”
지한결이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어줬다.
실패한 세계를 겪고 돌아왔으면서, 저딴 말을 지껄이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입 닥치고, 방해하지 마.”
일어날 일이니까 일어나게 내버려 둬야 한다니.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없지.
“법사, 던전 문 억지로 열어본 적 있어?”
“아니, 없죠.”
법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해볼게.”
그와 함께 붉은 마법진이 던전을 주위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도하운 씨!!”
“닥치라니까?”
나를 붙잡으려는 손을 쳐내고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같이 들어갈 거 아니면, 그 입 좀 닥치고 있으라고.”
덜컹, 굳게 닫혀있던 던전의 문이 움직이더니 손톱을 세워 쇠를 긁듯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검은 안개가 새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그에 나는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따라올 사람들은 알아서 따라와. 하지만 대공, 너는 안 돼. 마왕님도. 하림이랑 유빈이 챙기고 있어야지.”
“길마님!”
“안 된다는 건 안 된다는 거야.”
마왕님은 웬일로 조용하셨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은 대공님과 똑같았지만 말이다.
“던전 문이 열렸어……!”
“종놈은? 공략자가 안 보이는데?”
몸을 피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법사가 우리를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리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부디 그래 주고 있기를 바라며 나는 걸음을 돌려 지한결을 바라보았다.
“실패해서 돌아온 거 아니야?”
“…….”
“그런 식으로 굴면 또 실패하겠다, 너.”
나는 한껏 비웃음을 지어주고선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 * *
타다닥, 타들어 가는 벌레들의 사체에 강인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친놈이었구나, 강하수?”
“미친놈이라니요! 저렇게 징그러운 것들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누가 놀라지 않습니까!!”
“네 어깨에 쟤들 새끼 붙은 거 같은데.”
“흐어어억!!”
강하수는 부축하고 있던 도하인을 내팽개치고는 펄쩍 뛰기 시작했다. 쿵, 머리를 박은 도하인이 손을 움찔거리고는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윽… 아윽……!”
상처도 벌어졌는지 이마를 타고 붉은 것이 흘러내기 시작했다.
강인한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펄쩍 뛰고 있는 강하수와 바닥을 구르고 있는 도하인을 보고는 피곤한 낯을 문질렀다.
“환장하겠네, 정말.”
도하인이 지끈거리며 올라오는 통증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도대체…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지 도무지 모르겠다며 도하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고는 손을 흥건하게 적시는 핏물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때였다.
“우오오! 실프시여!! 도무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방에서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도하인이 입을 쩍 벌렸고, 강인한은 “저 미친 새끼가 기어코 일을…….”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 후, 강하수가 개운해진 얼굴로 강인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가… 강 대표님?”
“…….”
그러나 보이는 건 당황한 얼굴의 도하인이었다. 분명 자신이 부축하고 있었는데, 언제 저렇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게, 이게 지금…….”
강하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사근사근 웃는 낯으로 말했다.
“아이고, 도하인 부길드장님. 상처가 심하시군요!”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방금 전에 그건……!”
“방금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답니다.”
“웃기지 마십시오!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뭐가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겁니까!!”
도하인은 미치고 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반인이라고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가 헌터였다니?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 숱하게 받은 검사에서 분명 일반인이라고 나왔는데?
헛것이라도 본 건가, 도하인은 눈가를 꾹 누르고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사장님은요? 사장님은 어디…….”
도하인은 강인한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제 몸집만 한 대검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데 찾기 어려운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도하인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강하수는 도하인의 시선을 피했고 강인한은 뒤늦게 자신의 대검을 인지하고는 이를 몸 뒤로 숨기고자 했다.
당연하게도, 강인한의 대검은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는 크기였다.
하나같이 대답을 피하는 모습들이었다. 그에 도하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그 외침에도 강인한과 강하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하인이 어떻게든 대답을 듣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을 때.
쿠우웅―!
“!!”
그들이 모여있던 곳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