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고장 나서 수리를 맡겨놨다고 할 걸 그랬나.’
강인한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선 여유롭게 바깥을 구경 중인 도하인을 노려봤다.
저렇게 보니 이곳을 안락한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쌍둥이라더니 닮았네……. 아니, 잠깐!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 거니, 강인한!
강인한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헤집고선 도하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강하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메시지를 보냈다.
|Pr. 용사| : 도하준 길드장한테 연락은?
|Pr. 정령사| : 해봤습니다만…….
|Pr. 정령사| : 연락이 없군요ㅠ 이를 어쩌지요?
|Pr. 용사| : 그걸 왜 나한테 묻니? 일단 길드장한테는 최대한 늦게 돌아오라고 하렴.
마주칠 일이 없게 말이다. 어차피 이곳에 온종일 머물 것도 아닐 테니 말이지.
하지만 강인한은 곧 그 생각을 고치게 되었다.
“저, 사장님?”
“네?”
“여기 식사도 됩니까?”
“…….”
도하인은, 이곳에 온종일 머물고자 하는 게 분명했다. 강하수가 강인한에게 ‘표정 관리’에 느낌표를 잔뜩 붙인 메시지를 보냈다.
강인한이 가까스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네, 식사 됩니다. 메뉴 보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도하인은 그렇게 음식을 주문했고, 강인한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뻘쭘하게 서있던 강하수가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도하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딸랑, 울리는 소리에 강하수가 고개를 돌렸다.
“…지 작가님?”
“강 대표님? 어머,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요.”
연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내린 여자가 미소를 그리며 강하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 * *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하림이와 유빈이는 해가 질 때가 돼서야 지쳐 곯아떨어졌다.
“마왕님, 유빈이 좀 똑바로 안아보세요! 그러다 애 떨어드리겠다고요!!”
“북부 대공 놈은 조용한 줄 알았더니, 그건 짐의 착각이었도다.”
“지금 잔소리 듣기 싫다고 말한 거예요? 잔소리하는 거 아니거든요?”
누가 봐도 잔소리 같았다.
대공님의 말에 마왕님은 무시를 시전했다. 그러면서도 고개가 뒤로 넘어가는 유빈이를 가슴팍에 기대게 하는 게 말은 참 잘 듣는구나 싶었다.
대공이 그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애를 그렇게 안아야지 누가 무식하게 그렇게 안으래요?”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 저러다 싸울 것 같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대공이 하림이를 안아 든 채 걸음을 빨리한다. 그런 대공님을 향해 마왕님께서 소리 질렀다.
“북부 대공 놈아! 지금 짐에게 뭐라고 그랬느냐!!”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요!”
시끌시끌한 목소리에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저러다 애들이 깰까 걱정이 됐다. 그럼 또 놀아줘야 하잖아. 내가 놀아주는 건 아니지마는.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법사가 깐족거리며 내 걱정을 덜어줬다.
“유빈이랑 하림이, 곤히 잠들라고 법사가 마법을 걸어줬죠?”
그 말에 반응한 건 무림님이셨다.
“헐? 사형,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나중에 저도 해주세요!”
“무림님, 잘 못 자나 봐?”
“그런 건 아닌데 꿀잠이란 걸 자보고 싶어서요.”
“좋아. 아주 24시간 꿀잠 잘 수 있게 해주지.”
“오케이~! 기대하고 있을게요!”
기대하기는 뭘 기대해. 그보다 24시간 꿀잠이라니, 그건 그냥 살아있는 시체 아니냐고.
법사가 무림이한테 각종 약과 아이템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수면 유도제로도 안 되면, 안대 껴. 그리고 라텍스 베개도 구매하고. 라텍스 베개 추천해 줄까?”
“저 죽부인 끼고 자는데요.”
“아하.”
법사의 추천은 별 쓸모가 없게 됐다. 나는 둘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 신경 쓰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웨옧!
고양이를 소중히 안고 있는 드슬이 새끼가 내 눈치를 살핀다. 그 모습에 나는 짧게 혀를 차고선 말했다.
“너는 왜 따라오는 거야? 같이 있다는 그 새끼들한테 가지?”
끊임없이 내 눈치를 살피기만 하던 드슬이 새끼가 짜증스레 대답했다.
“그 새끼들이 너희들 가는 길에 있으니 따라가는 거지. 불만이면 나보다 먼저 가든가.”
“네가 먼저 가.”
“앞에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있는데 갈 수 있을 것 같아?”
“……?”
드슬이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용사님네 가게 앞이었다. 드슬님의 말대로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도로는 차들의 접근을 제한하는 중이었고.
“…뭐야?”
두 눈을 가늘게 떴다가 나는 앞서 걸어 나갔다.
“위험합니다! 물러나 주세요!!”
“휘말린 사람이 지금 몇 명이랍니까?!”
“지금 파악 중입니다! 위험하니까 물러나라니까요!”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 기자도 여럿 섞여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선 용사님네 가게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용사님의 가게였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벌렸다.
“던전이잖아, 저거?”
“와우! 이런 곳에도 생겨요? 대개 사람 없는 곳에 생긴다고 배웠는데!”
설마 용사님, 그대로 휘말려 버리신 건 아니겠지. 혼자라서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용사님이라면 금방 공략하고 나올 것 같았다.
정체는…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장님 헌터로 활동하라고 할까. 요새는 직장 하나로는 버티기 힘드니까. 부업으로 헌터 하라고 하는 거야.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듣기로는 종놈이 저 가게 안에 있었다는데?”
“가게? 저기 원래 가게 있던 자리였어?”
“응. 누구 만나러 왔었나 봐. 여기 인별에 종놈 봤다고 올라온 거 있어.”
“그럼, 저기 저 던전은 금방 공략되겠네?”
“맞아, 등급도 낮다며?”
“등급은 아직 모른다고 들었는데……. 어쨌든 종놈이 저기 들어가 있다면 금방 공략되겠지. 그리고 저거 ‘아웃브레이커 던전’도 아니라며?”
들려서는 안 되는 이름이 귓가에 들려왔다.
‘종놈’은 도하인의 별명이다. 그런 별명을 가진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도하인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종놈이라뇨? 도하인이 저 안에 있단 말이에요?”
“아마도 그럴 거예요. 가게에 있었던 걸 본 사람이 있거든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내게 대꾸해 준 여자가 흠칫, 놀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난다. 나는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던전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길마님.”
그런 나를 해로운이 붙잡았다. 나는 해로운의 손을 쳐내고는 눈가를 찡그렸다.
“괜히 붙잡으려고 하지 마. 네가 뭐라고 하든 들어갈 거니까.”
“길마님, 도련님이 어떤 사람인지 잊었어? 하운의 부길드장님이야.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해로운이 나를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의뢰도 안 들어왔잖아.”
그에 나는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해로운이 웃음을 짓고선 말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거야.”
“…….”
나는 괜히 해로운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무림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의뢰받으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요?”
“의뢰를 받는 건 문제가 없는데, 그 의뢰를 받아서 실패하면 문제가 생기지.”
“와우, 의뢰 안 받고 있기를 잘했다.”
“시끄러. 네가 안 받고 있던 의뢰들 내가 다 받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너도 이제 뛰어야지.
속으로 삼킨 뒷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무림이 새끼가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인다.
나는 눈살을 한 번 찌푸려주고는 동굴을 뚝 떼어다 옮긴 것 같은 던전을 쳐다봤다.
쿠웅―!
발끝을 울리는 커다란 땅 울림이 느껴졌다.
【00:20:21】
그와 동시에 의뢰를 맡을 때나 보던 붉은 시스템 창이 허공에 나타났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의뢰받은 사람 있어?”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묻는 것조차 우스운 질문이었다. 의뢰를 받는 순간 뜨는 메시지 창이 있는데, 그걸 본 기억이 없다. 들어온 의뢰도 없었고.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는 듯이 내뱉었다.
“누구 용사님께 진언 좀 날려봐.”
마왕님께서 도하운이가 진언을 날려보라느니, 그런 말을 한다.
용사님께서 마왕님의 진언을 받았다면 곧장 내게 욕설이 날아들어야 할 텐데 아무런 메시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성검(聖劍), ‘영광의 검’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립니다.]
곧장 검을 잡아 들려고 했다.
“들어가면 안 됩니다, 도하운 씨.”
나를 붙잡는 손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 * *
쿠웅, 울리는 진동에 강인한이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구더기가 들끓는 해골들을 처리하고 났더니 이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불현듯이 드는 기시감에 강인한이 입을 열었다.
“강하수, 도하인 부길드장은 좀 어떠니?”
“괜찮습니다. 출혈이 있기는 하지만… 목숨에 지장은 없어 보이는군요.”
강인한은 강하수가 부축 중인 도하인을 흘긋거렸다. 머리 쪽에 부상을 입었는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것이 보였다. 길드장이 알면 난리 나겠다고 생각하며, 강인한이 짜증스레 말했다.
“지장이 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지장이 없어야 한단다.”
“오, 이프리트시여! 저는 길드장님과 같은 능력은 없습니다!!”
“잘만 치료 중이지 않니?”
“지혈만 하는 것뿐입니다! 저희 운디네 님께서는 그 정도 능력이 전부란 말입니다!”
“은근슬쩍 네 정령왕이 형편없다고 욕하는 거니?”
“무슨, 그런 소리를!!”
빼액 지르는 목소리를 강인한은 가볍게 무시했다.
“혹시 계단이 있나 살펴보렴.”
“계단이요? 그런 건 보이지 않습니다만…….”
보이는 건 산산이 조각난 해골의 잔재뿐이었다. 강하수의 말에 강인한이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그 얼굴에 강하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시 한번 찾아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단다.”
강인한은 해골 조각을 사뿐히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길드장한테 답장은 아직 안 왔니?”
“네, 오지 않았습니다. 진언에 반응도 없는 걸 보니, 아예 연락 자체가 차단된 것 같은데요.”
막다른 벽에 걸음을 멈춘 강인한이 느릿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아마 그럴 거란다.”
“네?”
강하수가 의아하게 묻는 순간이었다.
쿠우웅―!
또 한 번, 던전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