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화난 건 알겠는데, 일단 모래 좀 털자.”
“아! 살살 털어!!”
“지금 엄청 살살 털어주고 있죠? 로운이 손이 지금 깃털처럼 움직이고 있는 중이죠?”
“지랄하네!!”
해로운이 내 머리를 털어줄 때마다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진짜, 망할 길드원들!
* * *
마몬은 공원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중이었다. 성녀와 마주치게 된 이시온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라면 알아서 잘 해결할 거다.
‘그런데 시온 씨가 성녀와 아는 사이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제게 신호를 보낼 수가 없었다. 자세한 건 돌아오면 물어보기로 하고, 마몬은 그렇게 걸음을 바삐 옮겼다.
“마몬?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요?”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몬은 걸음을 멈추었다. 연갈색의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여자가 보였다. 마몬이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됐군요? 어디 가는 길이십니까?”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고, 공원으로 산책이나 갈까 해서요. 집이 이 근처거든요.”
“아하.”
마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마몬의 말에 여자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게… 성녀님께서 거기 계셔서 말입니다.”
그 말에 여자의 얼굴이 빠르게 식어갔다. 오싹하게 이는 기운에 마몬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당연히 괜찮죠.”
여자가 입가를 꾹꾹 누르고선 미소 지었다.
“괜찮아야죠.”
하지만 기껏 그려낸 미소는 언제 그렸냐는 듯이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심술을 좀 부리고 싶네요?”
뾰족하게 가시가 돋친 목소리에 마몬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성하님의 뜻대로.”
* * *
“얘들아, 그렇게 놀면 위험하잖아!”
“안 위험해요!”
“마쟈! 리미는 괜차나!”
대공님께서 저 멀리 날아간 공을 주워들고선 두 아이를 타일렀다.
“유빈이도 같이 괜찮아야지, 림아. 그리고 유빈이도 림이가 그런다고 같이 그러면 어떻게 해?”
그에 유빈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빈이가 잘못한 거에요?”
“리미는 잘못 안 해써!!”
대공님께서 유빈이와 하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짓는다.
“대공님, 애들 잘 돌보네.”
내 왼쪽에 앉아있던 해로운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무림님은 고양이랑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무림님께서는 드슬이 새끼의 고양이님을 즐겁게 해주는 중이었다.
“왓더, 퍽!”
냥냥 펀치를 얻어맞은 무림이가 울상을 짓는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조카님이 저리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놀다니, 신기하도다.”
벤치 옆에 몸을 기대고 있던 마왕님의 말에 해로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마왕님,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짐이 뭐라고 했다고 그러느냐?”
“하나뿐인 조카한테 고삐 풀린 망아지라니! 조카님이 들으시면 속상해하시겠죠!”
“조카님께서는 형님을 닮아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느니라.”
마왕님의 말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유빈이가 우마한 길드장을 닮았다고? 닮기는 닮았다. 잘난 외모만 물려받아서 문제였지.
법사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거, 우마한 길드장님을 닮은 게 아니라 마왕님을 닮은 거 아니야?”
그에 마왕님이 놀라 외쳤다.
“조카님은 내 아들이 아니느니! 무슨 그런 큰일 날 소리를 하는게냐, 망할 법사 놈아!!”
“아니, 그게 아니라……!”
법사가 빽 소리를 지르다가 말을 멈추고선 얼굴을 문지른다.
“됐다, 말을 말지.”
그새 10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법사의 말에 마왕님께서 불퉁한 얼굴로 나를 부른다.
“도하운아! 법사 놈이 말을 하다 말고…….”
“알아, 시끄러.”
내 말에 마왕님께서 토라진 얼굴을 보이신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관심을 가질 대상은 마왕님의 얼굴이 아니었다.
“넌 왜 옆에 앉아있는 거야? 고양이 찾았으면 돌아가지?”
내 오른쪽에 앉아있는 드슬님이었지.
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드슬이 새끼가 화들짝 놀라더니 소리 질렀다.
“나도 돌아가고 싶거든? 그런데 리카가 저기서 놀고 있잖아!”
“리카?”
“아메리카노. 줄여서 리카.”
“…….”
무림이와 놀고 있는 드슬이 새끼의 고양이님은 진한 갈색빛의 털을 가지고 있었다. 법사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드슬님……. 이름 짓는 거 정령사님한테 배웠나요?”
“무슨 소리야?”
“성의가 없어서.”
“네가 뭔데……!”
해로운이 해맑은 웃음을 보인다. 드슬이가 질색하는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성격 나쁜 새끼.”
“그 말, 그대로 돌려서 해줘야겠죠? 길마님을 냅다 모래사장에 처박아 버린 사람이 우리 길마님 옆에 앉아있는 사람 같은데?”
“그건……!”
드슬이 새끼가 나를 흘긋거리고는 뚱하게 말했다.
“그렇게 세게 처박아 버린 것도 아니었잖아.”
“장난하냐? 너도 저기 가서 처박혀 볼래?”
드슬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고갯짓이 무색하게도 법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갈 것도 없이 법사가 모래를 여기로 옮겨다 줄게, 길마님!”
그 말을 마왕님이 거들었다.
“짐은 다져주겠느니라.”
나는 질색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둘 다 필요 없어.”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줘, 제발! 이 망할 길드원들아!!
내 속마음을 알아들었는지 몰라도, 법사님과 마왕님은 조용히 입을 다무셨다. 드슬이 새끼야 말할 것도 없고.
조용해진 주변에 한숨을 푹 내쉬는데, 발밑으로 웬 공 하나가 굴러왔다.
“엄므아! 공!!”
하림이가 놀다가 떨어뜨렸나 보다. 나는 발밑으로 굴러온 공을 하림이에게 던져줬다.
“그러고 보니, 쟤…….”
조용히 있던 드슬이 새끼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가 데리고 있던 드래곤 새끼인 거 같은데.”
그러더니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선 하림이를 쳐다본다.
“아니, 드래곤 새끼가 맞네. 벌써 폴리모프를 할 줄 알아?”
“그런가 보지. 저렇게 인간 모습으로 있는 걸 보면.”
“그런데 쟤가 왜 너를 ‘엄마’라고 불러?”
“내가 어떻게 알아. 알에서 태어나자마자 본 게 나라서 그런가 보지.”
“…운도 참.”
짧게 혀를 차며 말하는 목소리를, 나는 또렷하게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방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대한 친절한 얼굴을 보이면서 말이다.
“혹시라도 하림이 잡으러 들려고 하지 마, 드래곤 슬레이어님? 그러면 배에 한 번 더 구멍 뚫리게 될 테니까!”
물론 그랬다가는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다. 하지만 드슬님께서는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얼굴을 찡그리고선 구시렁거렸다.
“…성격 나쁜 건 귀환자 종특인가.”
“드슬님, 자기 소개했죠.”
“…….”
본전도 못 찾았지만 말이다.
피식 비웃음을 흘려주고는 고개를 돌리는데 애들이 가지고 놀던 공이 다시 발밑으로 굴러왔다.
“천사 달믄 누나! 공 주세요!”
“…네가 뭘 닮아?”
“닥쳐.”
나는 드슬님의 입을 다물게 하고는 유빈이에게 공을 던져줬다.
“그보다 거기서는 왜 그런 거야? 사람을 난데없이 모래사장에 처박아 버리다니! 나한테 시비라도 건 거야?”
“내가 너한테 시비를 왜 걸어! 걸려면 다른 식으로 걸었겠지! 그리고 그건 리카 때문에 그런 거라고 했잖아.”
“그걸 변명이라고 해?”
내가 고양이를 위협하려고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리카’라는 고양이는 드슬님 품에 얌전히 안겨있었고.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나 진짜 왜 모래사장에 처박힌 거지?
“차라리 네 고양이가 나를 모래사장에 처박아 버리라고, 그렇게 말했다고 하지 그래?”
내 말에 드슬님께서 입을 다무시더니,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응.”
“…….”
장난하냐.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법사님, 주변에 결계 좀 쳐줄래? 마왕님이 쳐줘도 괜찮아.”
내 말에 곧장 붉은 마법진이 펼쳐졌다. 마법을 펼치려고 했던 마왕님께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법사를 쏘아본다. 그 시선에 법사는 능글맞게 웃음을 지어줄 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오직 드슬님만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 뭐야. 뭐 하자는 건데?”
“뭐 하자는 거 같아?”
나는 곧장 손바닥을 휘둘렀고, 드슬이 새끼는 가드를 올렸다.
“형아! 저희 삼쵼이 사라져써요!”
“괜찮아. 저기 잘 계셔.”
“아무도 없눈데?”
“없는 게 좋아. 아니, 눈에 안 보이는 게 좋아.”
대공이 필사적으로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악! 잠깐만!! 이 망할 길드장님이……!”
뭐, 이 망할 길드원아.
* * *
도하운이 정원에서 길드원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강인한은 인내의 시간을 견디는 중이었다.
하지만 인내란 건 결국 끊어지기 마련.
|Pr. 용사| : 강하수.
|Pr. 정령사| : 네, 사장님――^^
|Pr. 용사| : 같잖은 눈웃음 집어치우고 저 녀석 끌어낼 방법 좀 생각해 보지 그래?
강인한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창가 자리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도하인을 쳐다봤다.
강인한의 시선을 따라간 강하수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Pr. 용사| : 같잖은 눈웃음 집어치우라고 말했단다.
“…….”
강하수가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Pr. 정령사| :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 중입니다ㅠ
나타난 메시지에 강인한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강 대표님께서 이 카페를 자주 들락날락하시는 것 같던데 처음 보시는 사이였군요.”
도하인은 그 말을 끝으로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물어봤을 뿐이다.
“가게 CCTV를 좀 확인하고 싶은데요.”
“그건 좀 곤란하네요, 도하인 부길드장님.”
그 말에 도하인은 곧장 순순히 물러났다. 마치,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