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도비가 검지를 들어 마왕님이 내려놓은 트로피를 소매로 문지르고 있는 지한결을 콕 집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네 녀석은 왜 네 집이라도 되는 것인 양 구는 것이고.”
지한결은 애매한 웃음을 지을 뿐, 도비의 말에는 답해주지 않았다. 참고로 지한결과는 도비네 집 앞에서 만난 거였다. 절대 같이 움직인 게 아니었다.
“길짱님! 이거 진짜 맛있어요! 엄청 딜리셔스! 길짱님도 마셔보세요!!”
무림님께서 어디서 꺼내왔는지 모를 유리잔에 주스를 따라서 내게 건네줬다.
나는 주스를 홀짝이며 도비에게 말했다.
“마저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잖아? 너랑. 그리고…….”
나는 지한결을 보며 눈웃음 지었다.
“너랑.”
호기롭게 대화를 나누자고 입을 열었는데 말이다.
“…….”
대화는 무슨, 침묵만이 감도는 중이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지금 이거 무슨 상황?
|Pr. 신살자(길드장)| : 알 거 없어.
|Pr. 9서클대마법사| : 。•́ ― •̀。
보기에만 그렇다는 거다.
나는 내 앞으로 나타나는 메시지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답장을 보내는 중이었다.
|Pr. 무림제일고수| : 길짱님! 길짱님!! 길짱니이ㅣ임!
|Pr. 신살자(길드장)| : 뭐.
|Pr. 무림제일고수| : 지금 무슨 시추에이션이에요?
|Pr. 무림제일고수| : 닥치고 있어야 하나여?
|Pr. 신살자(길드장)| : ㅇㅇ
|Pr. 무림제일고수| : 왓더펔!
|Pr. 무림제일고수| : 입은 말하라고 있는 건데ㅔ!!!
무림이 새끼가 입을 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도하운아.”
“궁금한 건 메시지로.”
곧장 마왕님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Pr. 마왕| : 저 녀석들이 왜 말없이 너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게냐?
|Pr. 신살자(길드장)| : 대화 좀 나누려고 하는데 너희가 내 뒤에 옹기종기 모여있어서 그렇잖아.
내가 보낸 메시지에 마왕님께서 양옆을 한 번씩 쳐다본다.
“왜 그렇게 봐, 마왕님?”
“왜욤?”
마왕님의 좌우에 서있던 법사님과 무림님께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왕님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네놈들 모두 도하운한테서 떨어지거라.”
“…….”
마왕님, 너도 떨어져 줄래? 나는 머리를 짚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왕님의 말에 법사가 절대 떨어질 수 없다고 난리를 부리신다. 그 말을 무림이가 거들었다.
“왜 나랑 사형만 길짱님한테서 떨어져야 하는데요? 마왕님도 같이 떨어져요!!”
옳지, 무림이 잘한다.
무림이의 말에 마왕님께서 눈살을 찌푸리셨다.
“짐에게 못 하는 말이 없도다.”
“흥! 왕도가 무너진 지 언제인데 짐이래요?”
“짐은 마왕이느니. 왕도가 무너진 것과는 관련이 없느니라.”
“그… 그건 그렇지만…….”
잘한다 싶었더니 무림님께서는 마왕님께 금방 밀리고 말았다.
“마왕님, 같은 길드원이면서 이러기 있기, 없기?”
“뭐라는 것이느냐, 망할 법사 놈이.”
“헐! 너무하죠!!”
뒤쪽에서 들려오는 쫑알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글로리아, 저 녀석들은 원래 저런 녀석들이냐?”
도비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부끄러움에 아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원래 저런 분들입니다.”
지한결의 대답에 도비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니, 저기요? 네가 뭔데 그렇게 말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 멍하니 입술만 벌리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아이고, 너무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버렸네요. 회의실만 계속 다니다 보니까 습관이 되어버려서 말입니다. 그런데 문을 왜 안 잠그고 있는 겁니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꽤 지친 얼굴의 강하수였다. 문을 열어주기 위해 일어났던 도비가 엉거주춤하게 서고는 놀란 눈을 보였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왜……?”
“그러는 도비 군이야말로 이분들과 뭐 하고 있습니까……?”
도비가 내가 있는 쪽을, 정확히는 내 뒤의 길드원들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저 녀석들이 멋대로 쳐들어와 자기들 멋대로 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대표님.”
도비의 말에 뒤쪽에 있던 망할 길드원들이 빼액 소리 질렀다.
“우리는 노는 거 아니죠!!”
“대화 중이거든요, 대화!! 토크 몰라요, 토크?!”
오직, 마왕님만이 입을 다물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마왕님, 그날 이후로 정령사님을 못 만났지?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정령사를 반겼다.
“정령사님, 여기는 어떻게 왔어?”
“그야 해로운 놈이 도비 군의 집에 있다고 해서… 그보다 ‘정령사’라니요! 입조심하십시오!!”
버럭 지르는 목소리에 도비가 눈가를 찡그렸다.
“…정령사?”
“센터에서 일어났던 침입자에 들어본 적 있어? 그 침입자가 바로 쟤야, 쟤.”
내 말에 정령사가 경악하며 외쳤다.
“오, 이프리트시여!! 길드장님, 마왕님 닮아가십니까?”
헐, 너무나도 심한 말.
나는 상처 입은 얼굴로 정령사님을 쳐다봤다. 정령사가 그런 내 얼굴에 헛기침을 두어 번 터트리고는 말했다.
“사람 무안하게 그런 얼굴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법사가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와, 정령사님 나쁘죠.”
“정령사 형아 나쁘다.”
무림이가 그 옆으로 몸을 숙이며 법사의 말을 거들었다. 그 모습에 정령사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더니.”
제일 윗물이 난데요, 정령사님?
정령사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다. 내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정령사님, 얘네 좀 데리고 나가 있어 줄래? 법사님부터 마왕님, 무림님까지 싹~다 데리고.”
“네?”
정령사님께서 두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이내 빼액 소리를 지르셨다.
“베이비시터 시키려고 저를 불렀습니까!!”
나는 두 귀를 막으며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널 부른 건 내가 아니라 해로운 법사님이거든.”
“저 망할 해로운 놈이!”
“로운이는 잘못 없죠!!”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이 자리에는 도비와 지한결도 같이 있다는 거였다.
도비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지한결은 손주들의 재롱 잔치를 보는 듯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고.
“어쨌든 간에 부탁할게, 정령사님.”
“싫습니다!”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활짝 웃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Pr. 신살자(길드장)| : 마왕님이 지금 네 눈치 엄청 보는 중이다?
정령사가 몸을 크게 움찔거리고는 내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마왕님을 쳐다봤다. 그 몸짓에 나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Pr. 신살자(길드장)| : 강 대표님, 마왕님은 강 대표님네 소속사 식구잖아요?
|Pr. 정령사| : 젠장.
돌아오는 메시지에 나는 키득거리고는 어깨에 닿는 마왕님의 머리칼을 쭈욱 아래로 끌어당겼다.
“도하운아! 짐의 머리카락은……!”
“매일 관리 중이라고? 알아. 그런데 마왕님. 머릿결 진짜 좋다.”
“진짜요? 저도 만져봐도 돼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마왕님한테 물어봐야지.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왕님을 비롯하여 법사님과 무림님, 우리 모든 길드원들의 등을 사이좋게 떠밀었다.
“정령사님이랑 다 같이 나갔다 와!!”
물론, 망할 길드원님들이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 리가 없었다.
“싫어! 길마님 혼자 쟤들이랑 무슨 대화를 나누려고!”
“도하운아, 싫도다!!”
“헐! 길짱님,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쫓아내려는 시추에이션이다!
나는 정령사님께 도움의 눈길을 보냈고, 내 시선을 알아들은 정령사님께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누군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으허헉! 소름 돋게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정령사님!!”
법사의 외침에 정령사가 질색하며 말했다.
“시끄럽습니다.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어서 따라오기나 하십시오. 두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쿵, 닫히는 문에 나는 쾌재를 부르고는 현관문에 달린 모든 잠금장치를 작동시켰다.
“…아주 네 집이군, 글로리아.”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여 주고는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고로 우리 집이 도비 집보다 더 좋다. 그나저나 드디어 조용해졌다.
어쨌든 우리 길드원들, 목청도 좋지. 아니, 목청이 좋은 게 아니라 그냥 말이 많은 건가.
“글로리아, 이 몸이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만.”
“뭔데?”
“우리 대표님께서 왜 네 녀석에게 경어를 쓰는 거지?”
도비가 던진 질문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너희 대표님이 나를 ‘길드장’이라고 부르는 거 못 들었어? 내가 걔보다 위에 있어서 그래.”
“뭐… 뭐라고?”
도비가 당황한 듯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다. 나는 그저 씨익 웃음을 지어줄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강 대표님 위에 계신다니요?”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질문에 나는 입가에 걸쳤던 웃음을 지우고는 말했다.
“무슨 소리냐니? 너는 무슨 소리인 줄 알 거 같았는데?”
“…….”
“이상하네. ‘회귀자’니까 나를 만난 적 있을 줄 알았는데.”
지한결은 아무런 답도 없이 경계 가득한 시선을 내게 보낼 뿐이다. 처음 내게 인사를 건넸을 때와 같은 눈이다.
그러나 그 시선에 기죽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내게로 향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지한결이 시선을 살짝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을 만난 적 없습니다.”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해야 하는 거야, 지한결 씨.”
“거짓말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