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마신님, 여기서 신격이 더 떨어져도 돼?”
떨어지면 안 되나 보다. 흉포하던 검은 기운이 차츰 수그러드는 것이 보였다. 기운을 한껏 움츠린 모습에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다시는 우마훈의 몸을 탐하려고 들지 마. 우리 세계에 발도 들이지 말고.”
돌아오지 않는 답에 나는 한 번 더 빌어먹을 마신 새끼의 신격을 헤집어주었다.
“……!!”
마왕님께서 입술을 꾹 깨물고서는 내 어깨를 끌어 잡는다. 미안, 마왕님. 조금만 참아. 수그러진 검은 기운이 비명을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어서 맹세해.”
―맹세 하겠니라! 그러니 이제 그만! 그만해다오!!
“좋아. 어기는 순간, 너는 네 모든 신격을 잃어버릴 거야.”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기는?”
[주인, ‘글로리아(Gloria)’의 이름 아래 맹세가 이루어졌습니다.]
“내 마음대로지.”
반쯤 부서져 있던 곳이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우마훈의 어깨너머로 일렁이던 검은 기운도 함께 사라져갔다.
분명, 드러난 얼굴이라고는 없는 안개와도 같은 것인데 왜인지 경악 어린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네놈은 도대체……!
목소리를 들어보니, 얼굴이 있었다면 꽤 봐줄 만했겠다 싶었다.
나는 우마훈의 명치에서 손을 빼내고는 힘겹게 숨을 토해내는 그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이만 네 세계로 영원히 꺼져.”
이 빌어먹을 마신 새끼야.
8. 아주 첩첩산중이다
모든 것이 재가 되어 사라진 후, 나타난 건 엉망이 된 회의장이었다.
[성좌, ‘사탄보다 더 대단한 지옥의 군주’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묻습니다.]
또한, 성좌님의 당혹감 가득한 메시지도 함께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00:07:07】
줄어들던 시간이 보기 좋은 숫자에서 멈춰있었다. 나는 드높은 하늘 위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별님께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기는요? 별님, 상황 보면 몰라요? 이세계의 마신 새끼는 두 번 다시 이 세계로 넘어올 일이 없게 됐거든요.”
간단명료하게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설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고하신 별님께서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나 보다.
[성좌, ‘사탄보다 더 대단한 지옥의 군주’가 그걸 어떻게 믿겠냐고 성을 냅니다.]
저렇게 성을 내는 걸 보니 말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믿어라, 별님아.
나는 짜증스레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똑같은 의뢰를 다시 한번 더 보내보든가.”
보내지 못할 거다.
‘데키온’의 마신이 이 세계를, 그리고 이 세계의 별님들을 위협할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의뢰는 종료.
“불만 사항은 직접 내려와서 건의하세요, 별님들.”
좋게 말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던데, 별님들은 잘 알아들은 것 같다. 떠오르는 메시지가 더는 없었다.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곧이어 길드 보상이 길드의 창고에 보관이 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후우…….”
상황 정리되는 데 참 오래도 걸린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는 지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마왕님께 물었다.
“괜찮아?”
마왕님께서는 전혀 괜찮지 않다는 듯이 두 눈을 질끈 감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여기저기 나한테 얻어맞고 옷까지 뜯긴 꼴이 누가 봐도 좋아 보이는 꼴은 아니었다. 나는 겉옷을 벗어 마왕님의 어깨에 대충 걸쳐주고는 손을 들어 마왕님의 뺨에 가져다 댔다.
[권능, ‘치유’가 활성화됩니다.]
“윽……!”
“아, 맞다. 너 ‘마왕님’이셨지? 그래도 조금만 참아.”
나는 마왕님의 뺨을 붙잡고서는 성녀의 힘을 불어넣었다. 눈가를 살짝 찌푸렸던 마왕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괜찮지?”
마왕님께서 눈을 살짝 내리깔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어깨에 걸쳐준 내 겉옷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암만 봐도 옷이 작아 보인다. 지한결한테 옷 좀 달라고 해야겠다.
“도하운아.”
“으, 응?”
그런데 마왕님께서 돌연 내 손을 꼭 그러쥐며 물었다.
“정령사 놈은 괜찮은 게냐? 정말 괜찮은 게냐?”
겁에 질려있는 모습에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마왕님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령사님을 데리고 있는 분께 물었다.
“지한결, 정령사님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깨우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지만요.”
“들었지?”
내 말에 마왕님께서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그러면서도 꼭 쥐고 있는 내 손은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왕님.”
나는 억지로 손을 빼내어 마왕님의 두 뺨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내가 정령사님 다 치료해 줬다고 했잖아.”
마왕님이 눈을 한 번 깜박이자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왕님께서 이번에는 두 손을 들어 올려 내 손등을 덮는다.
“그래도 짐은 걱정됐느니라.”
멋쩍게 웃음을 짓는 얼굴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그런 나를 마왕님께서 걱정스레 부르셨다.
“도하운아?”
“마신 새끼 때문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나 봐.”
“……?”
속이 다른 사람이라서 우는 얼굴도 웃는 얼굴도 안 어울린다고 느꼈나 보다.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니.
마왕님께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신다.
“무슨 말인 게냐?”
“몰라도 돼.”
나는 마왕님의 두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나를 마왕님께서 붙잡으려고 하신다.
“도하운아! 무슨 말을 한 게냐! 짐이 무엇이 안 어울린다는……!”
“시끄러! 일어나기나 해!!”
마왕님께서 뚱한 얼굴을 내게 보이며 불만을 표출하는 것도 잠시, 마왕님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다 말고 잠깐 비틀거리기는 하셨지만 말이다.
“어지러워?”
부축이라도 해줘야 하나 했는데, 마왕님께서 고개를 저으며 딴소리를 내뱉었다.
“형님을 찾아야 하느니라.”
“그래야지. 그런데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같이 있었다만… 짐이 바깥으로 보내버렸느니라.”
마왕님의 말에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바깥으로 보내버렸다니, 그럼 우마한 길드장은 건물 안에는 없다는 건가?
“하지만 다시 안으로 들어왔느니. 정령사 놈이 앞장서서 들어와서 그런 것 같도다.”
그리고 정령사는 장렬히 전사해 버렸다면서, 마왕님은 침통해 하셨다. 나는 마왕님의 뺨을 있는 힘껏 꼬집은 뒤 지한결에게 다가갔다.
“정령사님 좀 챙겨줄 수 있어?”
“당신이 그렇게 말 안 해도 챙길 겁니다.”
“그것참 고맙네.”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어주고는 뚫려있는 구멍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일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는 이쪽을 이용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으아아악!!”
“!!”
뚫린 구멍 아래서부터 커다란 얼음덩이가 솟구쳐 올라왔다. 대공님의 비명은 덤이었다.
“뭐… 뭐야?”
난데없이 나타난 얼음덩이라니,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몸의 실력에 놀랐나 보군, 글로리아.”
네 실력에 놀란 건 아니다, 이 망할 도비 새끼야.
얼음덩이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길드장, 괜찮니?”
곧바로 풀었지만.
“길마님! 저 사람 진짜 이상해요!!”
대공님께서 용사님께 들린 채 아래로 내려오셨다.
“구해준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군, 알바생.”
도비 새끼가 그 뒤를 따라 얼음덩이에서 내렸고. 도비의 말에 대공이 바닥에 발을 디디며 눈살을 찌푸렸다.
“구해줬다니요! 구해준 건 우리 사장님이거든요!!”
손을 털어내는 용사님의 모습이 참으로 듬직해 보였다. 용사님께서 내 뒤에 서있는 마왕님을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마신 새끼를 몰아낸 모양이구나?”
“너희가 밑에서 노닥거리는 사이에 몰아냈지.”
“노닥거렸다니. 말은 똑바로 해주렴, 길드장.”
용사님이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도비를 노려봤다.
“저 도비인지 도빈인지 뭔지 하는 새끼 때문에 아주 발목이 붙잡히다 못해 부러질 뻔했으니까 말이지.”
“저 사람 진짜 완전 트롤이더라고요.”
거드는 목소리에 용사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도대체 세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대공님이 ‘트롤’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대공아, ‘프란체스카’ 잊어버렸니?
대공의 말에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는데 도비 새끼가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트롤이라니, 이 몸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도빈 씨.”
그 말을 잠자코 있던 지한결이 끊어버렸다. 이번만큼은 나이스다, 지한결아!
지한결이 제 코트를 벗어 정령사에게 덮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이 몸이 고작 그런 거로 다칠 리가 없지 않나.”
“하긴, 그것도 그렇죠.”
지한결이 영혼이라고는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라고는 없어 보이는 고갯짓이었는데, 도비 새끼는 만족한다는 듯이 웃음을 짓는다.
“어? 잠깐! 정령사님 다쳤어요?! 누구한테요?”
“누구한테기는? 마신 새끼한테 다쳤지 않겠니?”
용사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마왕님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나는 괜히 마왕님의 등을 소리 나게 때려주며 다독여 주고는 대공님과 용사님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정령사님은 괜찮아. 그보다 다들 올라오면서 우마한 길드장 못 봤어?”
내 말에 용사님과 대공님이 서로 시선을 한 번 마주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못 봤단다.”
“못 봤는데요?”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왕님의 상태를 보니, 바깥에 펼친 마법은 곧 부서질 것 같다. 아니면 이미 부서졌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