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생각해 보니 대외적인 신분이 영 좋지가 못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길드인 ‘하운’의 길드장, ‘도하준’의 동생을 납치한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분명, 강남의 영웅이니 혜성같이 등장한 ‘회사원 헌터 H 씨’니 뭐니 하며 모두가 자신을 찬양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지.’
해로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그렇게 신세를 한탄하는 사이, 우마한은 해로운 옆에 서있는 최강을 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쪽은…….”
“최강이에요! 최강!!”
“아, 귀환의 길드원인가 보군요.”
우마한의 말에 최강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왓더, 퍽! 어떻게 아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우마한은 비밀이라고는 없는 동생을 떠올리고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해로운 역시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해로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질색하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해로운이 황급히 머릿속에 떠올린 얼굴을 지우고는 우마한에게 물었다.
“그런데 우마한 길드장님, 묶여있는 게 취미는 아닐 테고…….”
해로운이 우마한을 묶고 있는 넝쿨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이러고 있습니까?”
우마한이 피곤함 짙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못난 동생 놈 때문에 이러고 있습니다. 좀 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풀어줄 수 있죠!”
해로운이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넝쿨을 잡아 뜯었다. 아니, 뜯고자 했다.
“아야!!”
해로운이 황급히 손을 거두고는 울상을 지었다.
“왜 그래요, 사형?”
“가시에 찔렀어!!”
“가시 같은 거 없는데요?”
“아니야! 봐봐!!”
최강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가시가 있다면 우마한이 저렇게 상처 하나 없이 묶여있을 리가 없었다.
“흐움.”
암만 봐도 모르겠네. 에라, 모르겠다.
최강은 입술을 씰룩이고는 넝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야, 조심해. 너도 가시에 찔…….”
콰드득.
우마한을 묶고 있는 것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최강이 손을 털어내며 해로운에게 물었다.
“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해로운이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넝쿨을 쳐다봤다. 그사이 넝쿨에서 빠져나온 우마한이 최강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오! 그렇게 땡큐할 필요는 없어요!”
최강은 그렇게 손사래를 치고는 해로운의 뒤로 몸을 숨겼다. 해로운 그런 최강을 이상하게 쳐다보고는 우마한에게 물었다.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우마한 길드장님? 마왕님은요?”
“헉, ‘마왕님’이라니! 그런 거 함부로 말해도 돼요?”
“응, 말해도 돼. 그리고 저분, 마왕님 형님이셔.”
“와우! 안녕하세요!!”
최강의 뒤늦은 인사에 우마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우마한이라고 합니다.”
“저는 최강이에요, 최강!”
“아까도 말했잖아.”
“사형, 뭘 모르시네! ‘강조’ 몰라요? 강조!”
해로운이 앓는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끈거리며 두통이 올라오는 게, 어서 길마님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삐이―
“윽.”
“사형?”
두통에 이어 이명까지 들린다. 어깨에 꽂혔던 화살에 독이라도 묻어있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해로운은 머리를 짚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런 해로운에게 우마한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이나 해달라는 해로운의 뒷말을, 우마한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선 입을 열었다.
“저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촬영 건으로 한창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거든요.”
“여기서요? 굳이?”
이명이 가신 해로운이 지끈거리는 머리에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해로운의 말에 우마한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감독님께서 이전에 있었던 테러 건으로 많이 불안해하셔서요. 헌터들이 많은 곳에서 이야기를 나눴으면 한다고 강 대표님께 이야기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럼, ‘H-Entertainment’ 쪽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됐을 텐데요?”
강하수가 대표로 있는 연예 기획사는 중소 규모라고는 해도 소속 연예인들이 모두 헌터인 곳이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을 촬영 중인 나 감독이 이를 모를 리가 없을 터였다.
해로운의 물음에 우마한이 피곤한 낯을 문질렀다.
“그쪽에서도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으니까요.”
“아아.”
해로운은 뒤늦게 ‘H-Entertainment’에서 벌어졌던 돌발성 적합자 심사를 떠올렸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뭔데요?”
“무림님은 몰라도 되는 사건.”
“칫.”
“나중에 알려줄게.”
“넹.”
해로운은 ‘요새 애들, 참 키우기가 힘들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최강의 질문으로 잠시 멈췄던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그래서 저희 쪽에서 자리를 마련하여 감독님과 작가님, 출연 배우분들을 모셔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우마한이 크게 한숨을 내쉬고선 말을 이었다.
“마훈이, 그 자식이 갑자기 모두를 바깥으로 내보냈습니다.”
“와우! 마왕님도 마법 쓸 줄 아나 보네요?”
해로운이 최강에게 입을 좀 다물고 있으란 의미로 그의 머리를 꾹꾹 물렀다. 해로운의 손짓에 담긴 뜻을 최강이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강은 어쨌든 간에 입을 다물었다.
우마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강 대표님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고, 제가 뒤늦게 따라 들어갔습니다만…….”
우마한이 해로운을 보고는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해로운 씨께서 이렇게 오신 걸 보니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고 있지는 않나 봅니다.”
그 말에 해로운이 곤란하다는 듯이 난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밖에 나가셔서 기다리는 게 어떨까요, 우마한 길드장님?”
우마한의 말대로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고 있지는 않았다.
【00:10:09】
의뢰를 아직 끝내지 못했는지 붉게 나타난 시간도 계속 흘러가는 중이고 말이다.
하지만 우마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쿠웅―!
건물을 울리는 진동에 우마한은 짐짓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우나 고우나 제 동생입니다.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해로운 씨.”
도하운이었다면 기절을 시켜서라도 안 된다고 했을 거다. 하지만 해로운은 달랐다.
그는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대충 닦고서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아요, 우마한 길드장님. 대신 다치면 안 됩니다?”
마왕님께 원망 듣기는 싫거든요.
그런 소리 듣지 않게 어떻게든 지켜 줄 생각이지만.
* * *
“도하운아, 꼭 해야겠느냐?”
“응, 꼭 해야 해.”
나는 마왕님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며 미소 지었다.
“마왕님, 마신 새끼랑 한 몸 쓰고 싶지는 않잖아?”
마왕님께서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마왕님은 나란히 마주 보고선 바닥에 앉아있었다.
―이 빌어먹을 성녀 놈이! 이 녀석의 몸은 짐의 것이니라!!
“아, 좀. 닥치고 있어.”
“알겠느니…….”
“마왕님께 한 소리 아니야.”
마왕님의 귀에는 마신 새끼가 앙알거리는 게 들리지 않나 보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마왕님을 달랜 뒤, 마왕님 뒤에서 흉흉한 기세를 보이는 검은 기운에 얼굴을 찡그렸다.
【00:08:24】
마신 새끼가 마왕님 몸을 가지고 난동을 부리는 건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중이었다.
붉게 나타난 시간은 의뢰가 끝내야만 멈춘다.
그리고 의뢰는, 마신의 ‘숙주’를 처치하는 것. 여기서 ‘숙주’는 마왕님이었다.
하지만, 왜! 마왕님을 처치해야 되냐고!! 잘못한 건 빌어먹을 마신 새끼인데 말이야!!
“…도하운아.”
“미안, 생각하면 할수록 빡쳐서.”
마왕님이 입고 있던 와이셔츠를 홧김에 뜯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헛기침을 터트린 후, 성문을 개방했다.
[파괴된 차원, ‘글로리아(Gloria)’의 ‘절대 불변의 맹세의 장(場)’을 불러옵니다.]
[하늘의 권좌에 앉아있는 별들의 눈이 가려집니다!]
내가 설마 여기에 다시 발을 들일 줄을 몰랐다.
[주인을 환영합니다.]
그것도 ‘주인’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도하운아, 여기는 어디인 게냐?”
“알아서 좋을 곳 하나도 없는 곳이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마왕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그 어깨너머를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거야. 돌아갈 거야? 안 돌아갈 거야?”
―한낱 인간 따위가 감히 짐에게……!
“말이 많아.”
“헉……!”
마왕님께서 숨을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숙인다.
나는 한 손으로는 마왕님의 어깨를 잡고는 한 손은 마왕님의 명치 속으로 집어넣었다. 장기를 헤집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내가 헤집는 건 다른 거였다.
―크아아악!
흉포하게 날뛰는 검은 기운을 보며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신격(神格)이란 걸, 데키온의 마신님께서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네?”
―네놈, 네놈이 감히……!
나는 저 빌어먹을 마신님의 신격을 헤집는 중이었다.
신격이란, 말 그대로 ‘신’의 자격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신이 가지고 ‘힘’이었다.
“다시 한번 물을게, 마신님. 돌아갈 거야? 안 돌아갈 거야?”
―네놈……!
저 마신 새끼가 왜 이렇게 우마훈의 몸에 집착하는지 나름대로 궁리를 해봤다.
암만 생각해도 나오는 답은 하나였다.
―빌어먹을 성녀 놈이……!
데키온 내에서 가지고 있는 ‘힘’이 보잘것없어져서 혹은 닳고 닳아 버려서 우마훈을 이용해 그 힘을 다시 올리고자 하는 거다.
우마훈이 데키온에 있었을 때, 그는 ‘마신’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세를 떨쳤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