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까악― 까악―
들려와서는 안 될 까마귀 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칭호, ‘신살자(神殺者)’의 네 번째 족쇄가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묶여있는 ‘기억’이 요동칩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피 냄새에 숨을 내쉬는 걸 잊었다. 하얗게 차려입은 드레스를 빨갛게 물들인 채, 시체들 사이를 걸어 다니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아.
돌연, 여자가 멈추더니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칭호, ‘전장의 학살자’의 봉인이 강제적으로 해제됩니다.》
여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칭호, ‘절대 악(惡)의 지배자’의 봉인이 강제적으로 해제됩니다.》
안 돼.
연달아 나타나는 메시지에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어떻게든 봉인이 해제되는 걸 막아야 했다.
[칭호, ‘신살자(神殺者)’가 네 번째 족쇄를 견고히 다집니다.]
붉은빛이 가득했던 풍경이 서서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비쳤던 풍경이 몇 번째의 ‘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요동치는 ‘기억’을 묶고자 합니다.]
이 빌어먹을 칭호를 다시 봉인시켜야 한다는 거다.
―뭐야, 실망했어?
저건, ‘나’에게 묻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누구한테 묻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저게 무슨 기억인지도 모르겠으니까.
《칭호, ‘전장의 학살자’가 사슬 아래 봉인되었습니다.》
《칭호, ‘절대 악(惡)의 지배자’가 사슬 아래 봉인되었습니다.》
나타난 메시지에 나는 파르르 떨리던 입술을 꾹 깨물고는 고개를 들었다. 사이비 녀석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나 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사이비에게 다가갔다.
“네가, 도대체 왜…….”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는 게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곧장 사이비의 어깨를 쥐고는 흔들었다.
“야, 정신 차려.”
사이비가 흠칫, 몸을 떨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여 나를 쳐다본다. 이번에는 내가 흠칫, 몸을 떨고는 사이비 녀석한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글로리아.”
분노와 증오, 그것들이 뒤섞인 감정이 사이비 녀석한테서 보였다. 언제인가 익히 보던 시선들이었다.
“글로리아……!”
“윽!!”
내가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사이비 새끼가 내 멱살을 쥐고선 나를 넘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힌 머리가 얼얼했지만, 통증을 느낄 새가 없었다.
“당신들 때문에! 당신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
나를 넘어뜨린 사이비 새끼가 내 멱살을 쥐고선 강하게 흔들어댔다.
“흐윽, 윽. 내 동생도, 당신들만 아니었다면……!”
그러고는 흐느끼며 울음을 토해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멍하니 입술을 벌리고 있는데, 사이비 새끼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내 목으로 옮겼다.
“이게 진짜!”
“헉……!”
나는 그대로 사이비의 복부를 차고는 몸을 일으켰다.
“정신 차려! 네 헛소리 들어줄 시간 따윈 없으니까!!”
“콜록, 아윽…….”
헛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사이비 새끼를 쳐다봤다.
【HIDDEN STATUS OPEN】
망할.
[Main]: 회귀자(봉인)
[Sub]: 세계의 대리자(Ex), 세계의 수호자(S), 글로리아의 대적자(S), 멸망한 세계의 중도 포기자(A)
불현듯이 도비 새끼가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010―□X□X―X■X■]: 그래, 글로리아에서 온 녀석들은 침입자라고 말이다.
떠올랐던 기억을 지우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너…….”
나를 쳐다보는 사이비 새끼의 흔들리고 있는 시선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새끼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저 새끼의 멱살을 잡고서 흔들고 싶다.
귀환자도 아닌 네가, 어떻게 ‘HIDDEN STATUS’를 지니고 있냐고. 글로리아와 관련된 칭호는 무엇이며, 너의 ‘세계’는 무엇이냐고.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을 기고 있는 사이비 새끼에게서 걸음을 돌리고는 말했다.
“정신 못 차릴 거 같으면 계속 그렇게 있어. 나는 가야겠으니까.”
그러나 몇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나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후―웅!
“……!!”
쏜살같이 지나간 날 선 것이 뺨에 기다란 생채기를 만들었다.
―호오, 신기하구나. 이번에도 빗나가 버리다니.
뺨을 타고 흐르는 핏물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 녀석이 ‘성녀’라서 그런 건지, 아님. 이 녀석이 아직도 나를 거부하고 있어서 그런 건지…….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그와 함께 어둠 속에 잠겨있던 형체도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이나 짐의 공격을 피했구나, 성녀여.
“너, 이……!”
나타난 건 마왕,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강 대표님!!”
마왕, 아니. 마왕의 몸을 차지한 마신 새끼가 강하수의 머리칼을 움켜쥐고선 끌고 오고 있었다.
마신의 다른 손에는 내 뺨에 생채기를 낸 것으로 보이는 기다란 창이 들려있었다.
―성녀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뭘 어떻게 생각해.”
그보다 마왕님 얼굴로 그렇게 이죽거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안 어울리거든.
[성검(聖劍), ‘영광의 검’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립니다.]
곧장 검의 손잡이를 잡고선 걸음을 박찼다.
카―앙!
가로막힌 검에 마신 새끼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러니까 마왕님 얼굴로 그렇게 웃지 말라고!
나는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마신 새끼가 쥐고 있던 창이 내 목을 노리며 빠르게 들어왔다.
―젠장……!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에서 멈추었다.
나는 그 틈을 타 마신 새끼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한 번 해주고는 강하수를 잡아챘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고, 몸속 한 군데가 터진 것 같지마는 그래도 정령사님께서는 색색거리며 힘겹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강 대표님! 강 대표님은 무사하십니까?!”
“무사하셔.”
곧바로 성녀의 힘을 사용한 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마신 새끼를 쳐다봤다.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화가 난 듯 보였다.
“야! 이, 개새끼야!!”
그렇게 보였는데 저 망할 새끼가 창을 들더니 냅다 자신의 손을, 아니. 마왕님의 손을 단번에 꿰뚫어 버렸다.
―놀란 얼굴이구나, 성녀여.
“그럼, 안 놀랐겠냐?”
마신 새끼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등에서 창을 빼 들고는 짙게 웃음을 지었다.
―꼭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느낌인 것 같아서 말이지. 말을 듣게 하려면 이리할 수밖에 없느니라.
“거참, 지랄맞은 신님이네.”
―무엄한……!
노기 어린 표정에 가운뎃손가락을 한 번 날려준 뒤 사슬을 움직여 정령사님을 묶었다.
“사이비!”
“지한결입니다!”
이름을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나는 지한결이 있는 쪽으로 정령사님을 내던졌다.
“다친 사람을 이렇게……!”
“치료했으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뒤로 빠져있기나 해. 도움도 안 될 것 같으니까 말이지.
[권능, ‘성역(聖域)’이 활성화됩니다.]
―큭……! 또 이런 같잖은……!
“재주에 당하는 별님은 어디 사는 누구지?”
나는 먼저 사슬을 움직여 마신 새끼가 쥐고 있던 마왕님의 창을 빼앗아 버렸다.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그 고운 얼굴에 한 대 먹이려는데, 마신 새끼가 짓누르는 무게감에도 몸을 움직여 내 주먹을 피했다.
쿠―웅!
사방으로 튀어 오른 잔해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마신 새끼가 주먹을 피해버릴 줄은 몰랐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강하게 힘을 발휘 중인데 말이다.
아무래도 그때보다 더 커다란 힘이 이쪽으로 넘어왔나 보다.
―그때와 같이 짐이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 같으냐?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으면서 잘도 말한다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신 새끼를 중심으로 독기가 퍼져나갔다.
성녀의 힘으로도 몰아내기 벅찬 독기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절대 권능, ‘법칙 위의 절대자’가 활성화됩니다.]
[권능, ‘정화’의 힘이 강화됩니다.]
시원하게 이는 바람과 함께 독기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선 마신 새끼를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 같냐고?”
당황해하는 얼굴에 나는 그대로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권능, ‘전진(前進)’이 활성화됩니다.]
코앞에 보이는 얼굴에 사슬을 움직여 마신 새끼의 목을 옥죄었다.
―크윽……!
“어쩌냐? 이번에도 그럴 거 같은데?”
굴욕적이라는 얼굴이 꽤 봐줄 만은 했지만, 역시 마왕님께 어울리는 얼굴이 아니다.
나는 엉망이 된 회의실을 둘러보고는 내게 붙잡힌 망할 별님께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우마한 길드장은 어디 있어?”
정령사님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마한 길드장도 분명 같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화랑의 주인 되는 자는 그 어디서도 보이지가 않았다.
보이는 건, 누가 흘렸는지 모를 핏자국들뿐이었다.
―우마한이라.
마신 새끼가 목을 옥죄고 있는 사슬을 두 손으로 붙들어 잡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이 녀석이 흘리고 있는 눈물이 어떤 의미일 거라고 생각하느냐?
“시끄러.”
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고 있는 모습도, 재수 없이 웃고 있는 모습도 마왕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의미인지는 우마훈한테 직접 들을 거야.”
나는 그대로 손을 들었다.
―자, 잠깐……!
“잠깐은 무슨.”
남의 세계에서 깽판 치는 새끼를 봐줄 필요는 없지.
더욱이 겨우 돌아와 제 할 일을 찾아가려는 녀석을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새끼인데, 봐줄 필요가 있겠어?
[권능, ‘신벌(神罰)’이 활성화됩니다.]
―아악!!
번쩍, 이는 전격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쫘악―!
때리는 맛이 참 찰지다.
―빌어먹을 성녀 같으니라고……!
맞는 사람, 아니. 신님께서는 꽤 괴로워 보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기에 나는 있는 힘껏 한 번 더 손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