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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의 길드는 바르게 커야 합니다-69화 (69/168)

69화

그와 동시에 건물 곳곳에 내리치던 벼락도 쥐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상황 속에서 남자가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할 거예요, 아무것도.”

고요가 내려앉은 가운데, 저 막 좀 뚫어보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그 외침에 남자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사태를 최대한 빠르게 종료시키는 겁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알려주지도 않고 잘도 말하는군.”

도빈의 말에 남자가 건물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쳤다.

“사태를 종료시키는 건 제가 할 테니까요.”

도빈이 얼굴 가득 불만을 드러냈다. 남자는 도빈의 그런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도빈 씨는 강 대표님을 찾아 최대한 빠르게 현장에서 벗어나 주시기 바랍니다.”

도빈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는 건 딱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뒤늦게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도빈 씨.”

도빈 씨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며, 아부성 가득한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도빈은 남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도빈 씨?”

도빈은 건너편을 쳐다보고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렵겠군.”

“어렵다니요?”

“사이비, 아니.”

도빈이 말을 잠깐 멈췄다가 남자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지한결.”

이름을 불린 남자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빈이 손가락을 들어 건너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자리에 ‘글로리아’가 오는 것도 네가 그렇게나 말하던 ‘일어날 일’ 중 하나인가?”

“……!!”

남자는 당혹해하며 도빈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 *

“원래 의뢰란 게 이런 거예요?”

“이런 거냐니?”

무림이가 혼란에 빠진 거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렇게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는 거냐고요.”

“오히려 반대 아니니?”

용사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지.”

심사든 던전이든 게이트든 의뢰를 받아들여 그것들로 인해 일어날 피해를 막아내는 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지만, 보람찬 인생은 살아갈 수 있다.

드슬님께서 길드장이셨다면, 의뢰는 무슨. 이 사회는 진작에 무너졌을 거다. 드슬님만이 아니라 다른 새끼들이 길드장을 맡았어도 그랬을 거다.

나는 건물의 난간에 발을 걸치며 입을 열었다.

“의뢰 공유한 거 다 읽어봤지?”

“네.”

“당연히 읽어봤죠!”

대공과 법사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림이 새끼는 황급히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저 망할 무림이 새끼, 의뢰 공유한 거 안 읽고 있었구나. 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검은 막으로 둘러싸인 화랑의 건물을 쳐다봤다.

[길드, ‘화랑(花郞)’의 건물 내에서 이세계, ‘데키온’의 마신이 현신하고자 합니다.

이세계의 신이 완전히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그의 숙주를 처치해 주세요.]

▷ 길드 보상: S급 성물 ‘레메게톤’

망할 별님 같으니라고.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신을 처치해 달라고 해야지, 우리 마왕님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마왕님을 처치해 달래?

▷ 실패 시: 데키온의 마신 ‘■■■■’의 현신.

※ 마왕(魔王)의 혈족이 죽임을 당할 예정입니다.

※ 신살자(神殺者)의 혈족이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가 될 예정입니다.

※ 정령사(精靈師)가 죽임을 당할 예정입니다.

나는 짜증스레 머리를 헤집었다.

혹시나 싶어 마왕님과 정령사님께 메시지를 날려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법사를 시켜 날려 보낸 진언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길드장? 보는 눈이 너무 많은데.”

용사님의 말에 나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소란이 가득했던 거리가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하지만 검은 막을 주위로 헌터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선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두에, 오빠와 도하인이 있었다.

【00:33:32】

※ 신살자(神殺者)의 혈족이 죽임을 당하거나 불구가 될 예정입니다.

줄어드는 시간 아래로 보이는 글자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법사님이랑 무림님이 어그로 좀 끌어줄래?”

“이미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린 몸인데, 여기서 얼마나 더 끌어 달라는 거죠……?”

나는 법사님을 향해 씨익 웃음을 지었다.

마왕님을 죽일 생각 따윈 없다. 그렇다고 의뢰에 실패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오빠와 도하인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싶었다. 오빠와 도하인뿐만이 아니다.

저기 저 자리에 있는 헌터들을 여기서 어떻게든 멀리 벗어나게 만들고 싶었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 * *

“해로운! 지금 당장 인질을 놓아주기를 바란다!!”

센터에서 급히 파견된 제5팀의 팀장, 이수혁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길드인 ‘화랑’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제 진입조차 불가하고.

“해로운! 다시 말한다!! 지금 당장 인질을 놓아주지 않으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영웅이자 이제는 범죄자로 추락한, ‘회사원 헌터 H 씨’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도하준이 이수혁에게서 확성기를 빼앗아 들고는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로운 씨, 지금 당장 인질을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로운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이렇게 되는구나.”

도대체 어그로를 어떻게 끌어달라는 건지,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무림님 인질로 잡고 헌터들 앞에 좀 나가봐.”

도하운의 말에 해로운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와! 형아, 사람들 좀 봐요! 저 사람들 다 헌터죠? 저, 저렇게 많은 헌터들 처음 봐요! 완전 어메이징!!”

해맑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해로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저기요, 무림 씨? 무림 씨 지금 저한테 인질로 잡힌 사람이거든요?”

해로운의 말에 최강이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얌전히 잡혀있잖아요?”

“잡혀만 있으면 안 되고, 겁먹은 얼굴이나 뭐 그런 것도 보여줘야지.”

“겁이란 걸 먹어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요?”

“…….”

해로운은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최강은 해로운의 팔을 붙들어 잡으며 해맑게 물었다.

“형아, 그런데 저 사람이 형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데요?”

“굳이 안 알려줘도 돼.”

안 그래도 따갑게 꽂히는 도하준의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해로운! 지금 당장 인질을 놓아주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최강이 놀란 눈을 보였다.

“왓더, 퍽! 인질의 안전 따윈 안중에도 없어요?”

“설마.”

해로운을 향해 총구가 겨눠졌고,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해로운은 그와 동시에 최강의 등을 앞으로 밀쳤다.

“왓더……!”

날아들던 총알이 최강을 피해 갔고 해로운이 눈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만 저격할 수 있게 해놨겠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붉은 마법진이 곳곳에 펼쳐졌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법사가 레드 카펫 깔아줬죠?

|Pr. 신살자(길드장)| : ㄱㅅ

모두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한 완벽한 어그로였다.

“법사님 혼자 저렇게 둬도 돼요?”

“걱정되면 법사님 도우러 가든가.”

내 말에 대공이 뒤를 흘긋거렸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붉게 펼쳐진 마법진을 보고는 대공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제 도움이 딱히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아요.”

대공의 말에 용사님께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대공, 너는 가게에서 하림이나 보고 있지 그랬니?”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근데……!”

“근데?”

대공은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이기만 했다.

“말 안 할래요.”

아니, 이 자식이? 말을 하다 마는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유대공의 굳게 다문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면 하림이한테 너네 아빠는 아주 못된 사람이라고 할 거야.”

“제가 뭐 했다고?”

“말을 하다 멈췄잖아!”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 중 하다가 말을 하다가 멈추는 거다. 내 말에 대공님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길마님도 자주 그러면서!!”

나는 그래도 된다.

대공님의 억울한 외침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검은 막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법사님께서 어그로를 너무 잘 끌어주셔서 헌터들의 시선이 모두 검은 막에서 벗어나 있었다.

튕겨 나가거나 그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나를 비롯한 용사님과 대공님은 아무런 문제 없이 검은 막 안으로 들어갔다.

“마왕의 마법인가 보구나.”

“그런가 봐요. 이상하네?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대공님께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리저리 주위를 두리번거리신다.

“그러고 보니 유대공, 너도 마법사였구나.”

“설마 잊고 계셨어요, 사장님?”

“허구한 날 하림이를 붙잡고 ‘그대’거리고 있으니 잊을 수밖에 없지 않겠니?”

“저도 안 그러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즐기는 것 같던데. 그보다 이 녀석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와우.”

뒤따라 들어온 대공의 목소리에 용사님이 눈살을 찌푸리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라니?”

“나도 모르지.”

로비 바닥에 핏물이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안내를 돕는 데스크 역시 피로 적셔져 있었다.

“마왕이랑 정령사가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그러게,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붉게 발자국이 찍혔다.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건물 안에서 우리들의 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길마님, 마왕님이랑 정령사님 찾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찾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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