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마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보였어?”
“그렇게 보였느니.”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왕님,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야.”
“착한 사람 맞느니.”
단호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말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내 대답의 어디가 또 불만인지, 마왕님께서 불퉁한 얼굴을 보이셨다. 잘난 얼굴로 그런 표정 좀 짓지 말라고 뺨이라도 꼬집어 줄까 했는데 딸랑이는 방울 소리가 들렸다.
“길마님! 마왕님이랑 둘이서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너는 대낮부터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싶어?”
“길거리에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요, 뭐.”
용사님네 가게의 문을 열고 나온 대공이 작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보다 큰일이에요!”
―맘마!
대공을 따라 나온 림이도 대공을 따라 짧은 발을 움직이며 말했다.
“드슬이 새끼가 사라지기라도 했어?”
그렇지는 않을 거다. 내 손목에 묶여있는 사슬의 끝은 드슬이를 향해있었으니 말이다.
내 말에 드슬이에게 당한 게 있는 대공이 꺼림칙한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그건 아니고요. 길마님 얼굴이 지금 TV에 나오고 있어요!”
“뭐……? TV에 내 얼굴이 나오고 있다고……?”
“네! 그러니까 빨리 와보세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황급히 대공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다시 들어간 용사님네 가게에서는 손님이 없어서인지 TV 볼륨이 최대한으로 틀어져 있는 상태였다.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제보가 필요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화면에서 보이는 건, 제 동생 ‘도하운’입니다.
아니, 오빠?!
6. 왜 나는 너를 만나서
“아하하하! 성녀님을 이렇게 보게 되네요.”
TV에서 보여주고 있는 ‘도하운’의 얼굴에 칼 단발을 친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잿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남자가 말했다.
“그보다 큰일이야. 시온 씨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그보다 더한 큰일은 우리 성녀님은 여전히 어여쁘시다는 거겠지요. 그러니 그런 날파리들이 꼬여있는 거겠지요?”
“미친 새끼.”
욕을 얻어먹었으면서도 좋은지 남자는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처웃지만 말고 시온 씨가 어디 갔나 좀 찾아봐 봐.”
“어련히 알아서 돌아오겠지요.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지만 불안하단 말이다.”
잿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남자의 말에 칼 단발을 친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워낙 유쾌한 웃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기는…….
“아오! 이 시발 새끼가 진짜! 작작 처웃고 시온 씨 좀 찾아보라고! 일주일이 넘었잖아, 지금!!”
개뿔이었다.
남자는 잿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남자가 던진 쿠션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그 사이좋은 모습을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흐음, 사이 안 좋아 보이네.”
분명 흐릿하게만 보이는 인영들인데도, 남자는 잘만 보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마법진이 깃들어 있었으니 말이다.
해로운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고는 기지개를 켰다.
“일단 길마님께 돌아가 볼까.”
여기서 더 파고들었다가는 상대 쪽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해로운은 그들이 있는 장소를 확인한 뒤 용사가 운영 중인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강하수, 이 개새끼야!!”
“…….”
그런데 아무래도 타이밍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랑 해로운 법사님을 팔았냐!”
느닷없이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해로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 한가로이 난장판을 구경 중인 길드원들이 보였다.
“법사님, 오셨어요?”
“법사, 네 이름 진짜 ‘해로운’이었구나? 정말 잘 어울리네.”
“용사님, 그거 칭찬 아니죠?”
해로운의 말에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딸랑이며 종이 울리더니 택배원이 스티로폼 상자 여러 개를 들고 들어왔다.
“강인한 사장님! 택배 왔습니다!”
“…….”
그 목소리에 정령사의 멱살을 잡고 있던 도하운이 황급히 몸을 피했고, 강하수는 콜록거리며 기침을 토해냈다.
용사, 강인한은 택배원이 내미는 종이에 서명을 하고는 그를 돌려보냈다. 택배원이 돌아가자 해로운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용사님 이름이 ‘강인한’이었어요? 완전 잘 어울리죠?”
“칭찬 고맙단다.”
“…….”
본전도 못 찾은 해로운이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용사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던 유대공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카운터에 기대며 꺼낸 해로운의 말에 강인한과 유대공이 그를 쳐다봤다. 해로운은 택배원이 떠나기 무섭게 다시 강하수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도하운을 보며 물었다.
“저 두 사람은 왜 싸우는 중이래?”
“아, 그게 말이죠…….”
유대공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흐렸다. 그 수상쩍은 모습에 해로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법사, 네놈이 도하운이를 납치한 걸로 세상에 공표되었느니.”
유대공이 흐린 뒷말을 말해준 건 가게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는 우마훈이었다. 우마훈의 말에 해로운이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마왕님? 법사 지금 이해 못 했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얼굴에 우마훈은 해로운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해로운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에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법사, 네가 길드장을 납치했다는 소식 말이지.”
유대공과 강인한의 말에 해로운은 얼굴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
그보다 누가 누구를 납치해? 납치하기도 전에 죽을 텐데? 그렇게 해로운은 유대공이 건넨 동영상을 재생시켰고.
―회사원 헌터 H 씨, 해로운을 하운의 대대적인 적으로 공표하는 바이며…….
은혜로운 고용주가 하는 말에 입을 쩍 하니 벌렸다. 동영상의 재생이 끝난 뒤 해로운은 굳어버린 턱관절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정령사님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라는 거죠?”
유대공과 강인한, 그리고 우마훈은 사이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강하수로부터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해로운은 두뇌 회전이 빨랐다.
도하준과 도하인이 도하운의 행방을 찾기 위해 강하수를 여러 번 찾았다고 들었다. 필시 그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생겨났을 거고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 사달이 난 게 분명했다.
생각을 끝마친 해로운이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화사함에 유대공과 강인한이 질린 얼굴로 해로운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곧장 손을 움직였고.
“아악!!”
정령사는 천장 높이 날아올랐다.
―맘마? 맘마!!
푹신한 담요 위에서 잠을 자고 있던 해츨링이 강하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날아오르더니 허공에 떠있는 그의 주위를 호기심 가득한 기색으로 빙빙 돌았다.
“하하, 그대여. 그건 그대의 장난감이 아니라네.”
그런 하림을, 대공이 두 팔을 뻗어 자신에게로 오게끔 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영문을 몰라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기만 하던 강하수가 해로운을 발견하고는 소리 질렀다.
“망할 법사 놈이! 당장 내려놓으십시오!”
“정령사님이야말로 망할 정령사 놈이죠? 이 상황 진짜 어떻게 해결할 거죠?”
“그…그게…….”
어찌 됐든 강하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 * *
그래, 망할 정령사님아! 어쩌자고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나는 강하수를 매섭게 노려봤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충 현재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여느 날과 똑같이 빈말로도 사랑할 수 없는 동생님께서 정령사 새끼의 사무실에 들이닥쳤고, 곧장 화질이 낮은 사진 하나를 정령사에게 내밀었단다.
그 사진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촬영장 내부 CCTV에 녹화되어 있던 나와 법사, 그리고 정령사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하운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셋이서 사라졌는데 당신 혼자만 돌아온 이유가 뭐냐면서 동생은 정령사 새끼를 닦달했고…….
“도하인 부길드장님께서 저를 납치범으로 모는데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납치범으로 만들었다는 거죠?”
정령사 새끼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해로운 법사님을 방패 삼아 내세워 버렸던 거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의자를 끌어 털썩 주저앉았다.
“…개판 5분 전.”
“아, 깜짝아.”
느닷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혀를 깨물 뻔했다. 나는 놀란 심장을 다스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나와있었어?”
“길드장님, 네가 정령사님과 싸울 때부터.”
“울기는 다 울었나 봐?”
“…….”
드슬님께서 얼굴을 가득 찌푸리고 나를 노려봤지만 하나도 안 무서웠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내일 눈 붓겠네. 치유해 줘?”
“…시끄러.”
드슬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빨갛게 짓눌린 눈가를 손등으로 꾹꾹 눌렀다.
“길마님!!”
빼액, 지르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법사가 씩씩거리며 나와 드슬이 새끼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 새끼랑 왜 같이 있어? 그새 사이가 좋아진 거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죽일 듯이 싸우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허공에 떠다니고 있던 정령사가 가볍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둘 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드슬이 새끼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드슬이 새끼는 법사를 날 선 시선으로 노려보는 중이었고.
나는 분위기를 좀 환기시켜 보고자 손목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까이에 서있던 드슬이의 손목도 함께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