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하여 드슬이 새끼를 자극할 만한 질문을 내던졌다.
“너에게 접근한 새끼들이 ‘엘로시아’란 이름을 들먹이던?”
“너……!”
드슬이 새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단번에 내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그 손을 마왕님께서 눈 깜짝할 사이에 잡았지마는.
눈앞에서 잔뜩 떨리고 있는 드슬님의 손에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왕님, 내버려 둬.”
마왕님께서 나를 한 번, 그리고 드슬님을 한 번 쳐다보고는 그 손을 놓아주었다.
드슬이가 손목을 어루만지며 나를 노려본다.
그것도 잠시.
“큭… 흐…….”
드슬이 새끼가 입가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암만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뭐야, 왜 저래?”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마왕님께서 이를 듣고 말해주셨다.
“혀가 마비됐느니.”
“왜……?”
마왕님,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주라도 날렸어?
마왕도 법사만큼이나 성격이 안 좋구나 싶었는데, 마왕이 허리를 바로 펴며 말했다.
“언약에 제대로 응하지 않으면 먼저 혀가 마비되고 그다음에 혀가 잘리느니라. 도하운아, 원한다면 지금 당장 저 녀석의 혀를 잘라주마.”
“아니, 됐어. 됐습니다, 마왕님.”
내 입으로 드슬이 새끼한테 혀가 잘린다니 뭐니 그런 소리를 했지만, 누가 그런 광경을 보고 싶어 하겠어! 절대 싫어!!
이 와중에 드슬이 새끼는 나를 원수 보듯이 보고 있다. 하긴, 너와 내가 원수가 아니면 뭐겠냐.
…귀환의 길드장과 귀환의 길드원이지. 그리고 그 귀환의 길드원님께서는 귀환의 길드장님을 죽이려 들었다.
불현듯이 떠오르는 사실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그대로 드슬이 새끼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드슬이 새끼가 곧장 내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나는 그 손을 사슬로 묶어버렸다.
“으…웁……!”
“그러게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분노에 찬 시선이 아주 따끔거렸다. 물론, 말로만 그랬다는 거다.
“마왕님, 3분 정도 지나도 내가 정신 안 차리면 좀 깨워줘.”
“저놈이랑 같이 잘 생각인 게냐?”
“아니, 그게 아니라…….”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기는 하니까. 나는 그 고갯짓을 마지막으로 성녀의 힘을 사용했다.
[권능, ‘동조’가 활성화됩니다.]
이건 사용하기 싫었는데.
부디 ‘글로리아’와 관련된 걸 내게 보여줬으면 했다. 그게 드슬이 새끼의 가장 강렬한 기억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 바람은 눈앞에 드러난 초원에 무참히 부서져 내렸다.
그저 인적 드문 시골길에 펼쳐진 들판이겠거니 했을 거다. 곳곳에 자리한 부서진 성벽들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성벽들 위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커다란 새들은 또 어떻고.
불어오는 바람에 커다란 새들이 날개를 펼치고는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가 버린다.
푸른 하늘 아래서 하얀 깃이 휘날리는 게 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이를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이시온’의 기억에 동조합니다.]
그 메시지가 나타나기 무섭게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로시아.”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반쯤 부서진 성벽, 지는 해에 드리워진 그늘 아래에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가 서있었다.
“…무슨 일로?”
그리고 내 기억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청년의 이미지인 드슬이 새끼가 마주 보고 서있는 중이었다.
또 하나,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검을 쥐었던 한쪽 팔이 없었다.
“…….”
이름이라면 몰라도, 저런 모습을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여자가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으려나.”
여자의 백색 눈동자 안에 금색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드슬이 새끼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대던 ‘엘로시아’라는 존재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엘로시아?”
“시온.”
‘엘로시아’는 그대로 드슬님께 다가가서는 그 뺨에 손을 얹었다.
좋아요, 엘로시아 씨! 그대로 뺨을 내리치는 겁니다!
하지만 드슬이의 기억 속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펼쳐지는 건 하늘을 뒤덮는 금색이 어우러진 마법진이었다.
제 뺨에 얹어진 손을 잡으려던 드래곤 슬레이어가 당황함이 가득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본다. 그사이 그의 뺨에 얹어졌던 여자의 손은 거두어진 지 오래였다.
“엘로시아? 갑자기 마법은 왜 펼친 거야?”
“…….”
여자는 대답 대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고개 숙여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인사했다.
“죽음의 드래곤, 리비티나로부터 저희 제국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그런 인사는 왜…….”
드래곤 슬레이어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금색 마법진이 그의 주위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엘로시아! 이게 무슨 짓이야!!”
“제국의 수호자로서, 당신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뭐……?”
애틋한 사이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온, 이게 내 마지막 배려야.”
여자는 그렇게 물러났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고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에워싸고 있는 마법진에 손을 얹었다.
“네 이름은 오랫동안 기억되겠지. 드래곤 슬레이어, ‘시온’으로.”
망할.
여자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드래곤 슬레이어의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나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감정의 이름들에 휩쓸려 가지 않기 위해 나는 걸음을 뒤로 뗐다.
그와 동시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주변을 에워싸던 금색의 마법진에 빛이 돌기 시작했고.
“엘로시아!!”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짙은 혈향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래, 그래서 이걸 사용하기 싫었다.
역시나 애틋한 연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그런 벅찬 기억보다는…….
“도하운아.”
누군가 나를 끌어당기며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힘겹게 숨을 들이켜 마셨다.
“괜찮으냐?”
나는 내 팔을 끌어 잡고 있는 마왕의 손을 떼내고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크게 숨을 들이켜 마신 후 내뱉으며 마왕님께 물었다.
“…벌써 3분 지났어?”
“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1분 전에 깨워버렸느니라.”
마왕의 말에 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저놈의 상태도 안 좋아 보였느니.”
마왕의 말에 나는 뒤늦게 드슬님의 상태를 파악했다. 가슴 언저리를 부여잡고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내고 있는 모습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깨우지 말 걸 그랬느냐?”
“아니, 잘했어.”
나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마왕님께 부탁했다.
“마왕님, 드슬님 혀에 걸린 마비 좀 풀어줄 수 있어?”
“꼭 풀어줘야 하느냐?”
마왕님께서 다소 불만이 넘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끅끅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내고 있는 모습이, 마왕님 눈에는 애처롭지 않나 보다.
나는 마왕님을 향해 씨익,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부탁할게.”
마왕님은 그제야 드슬님의 혀에 걸린 마비를 풀어주셨다. 이번에도 말을 안 들어주면 치유해 주려고 했는데 다행이다.
하지만 드슬이는 제 혀에 걸린 마비가 풀렸을 텐데도 끅끅거리는 숨만 토해낼 뿐이었다.
나는 그런 드슬님의 앞에 다가서고는 무릎을 굽혔다.
“드슬님.”
“너……!”
곧장 멱살을 움켜잡히며 몸이 뒤로 쏠렸다. 잔뜩 어질러져 있는 테이블 위로 머리가 부딪혀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도하…….”
“마왕님, 나 괜찮아.”
그러니까 끼어들지 말라고, 나는 마왕을 향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왕은 이번에도 순순히 내 말을 들어줬다. 꽤나 심기가 불편해 보였지만 말이다.
테이블에 머리를 워낙 세게 부딪혀서 혹이라도 나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건 금방 아물 테니 상관없었다.
“너 따위가 뭔데, 내 기억을 훔쳐봐.”
“…….”
나는 내 멱살을 잡고 있는 드슬님의 손목을 강하게 붙들어 잡으며 물었다.
“그럼 너는 뭔데?”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널 죽인 새끼를 만나겠다고, 날 죽이려 들었던 너는 뭐냐고.”
사납게 구겨져 있던 드슬이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뒤늦게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똑똑히 들어, 이시온.”
나는 망할 드슬님의 멱살을 움켜쥐어 내게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너는 나 못 죽여. 죽인다 해도 ‘엘로시아’라는 사람을 절대 만날 수 없어.”
현실을 직시해서인지.
“너도 알잖아. 아니, 봤잖아.”
시온은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내 입을 막으려는 듯이 손을 올렸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고 그는 힘없이 손을 떨궜다.
그 형편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의 기억 속에서 봤던 ‘엘로시아’의 마지막 모습을 일깨워 주었다.
“엘로시아가 너와 함께 목숨을 끊는 걸, 너도 봤잖아. 이 미련한 새끼야.”
* * *
드슬님의 기억 속에서 원하는 건 얻지 못했다. 찝찝한 기억만 보고 왔지. 나는 괜히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도롯가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위험하도다.”
“안 위험해.”
언제 따라 나왔는지 모를 마왕님께서 잔소리를 하셨지만, 오가는 차라고는 보이지 않는데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 말에 마왕님이 뚱한 얼굴을 보이더니 나를 따라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용사님네 가게 앞에서 처량하게 앉아있었다.
“…도하운아, 그 녀석을 동정하는 게냐?”
느닷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응?”
“드슬이인지 시온인지 뭔지 그 녀석을 동정하는 게냐고 물었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