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조심히 다녀오세요. 괜히 성녀님께 걸려서 저번처럼 당하지 마시고요. 그래도 부럽네요, 성녀님께 맞을 수 있는 인생이라니.”
정말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남자는 사납게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내뱉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건물을 뛰어넘은 끝에 다다른 곳은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버려진 마을이었다.
[재개발을 당장 중단하라!]
[재개발 확정을 축하합니다!]
서로 상반된 내용이 담긴 낡은 현수막이 반쯤 찢어진 채 곳곳에 걸려있었다.
드나드는 길고양이도 없이 텅 비어있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특별한 점이 없어 보이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콰과광!!
“……!”
멀리서 들려오는 파열음에 남자는 곧장 검을 꺼내 들었다. 그렇게 남자가 검을 쥐기 무섭게 또 한 번 요란한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남자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아 드러난 광경에 남자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곳곳에 짓뭉개지고 으깨진 파편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광경에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타난 메시지에 혹시나 했지만, 설마 자신이 아는 ‘드래곤’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니.
남자는 작게 숨을 내쉰 뒤 드래곤의 기척을 쫓고자 했다. 두 눈을 감고 생명체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뒤에서 느껴지는 불온한 움직임에 곧장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타난 생명체를 완전히 베기 전에 남자는 검을 멈췄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해츨링?”
―맘마?
어리기 그지없는 새끼 드래곤이 빨간 눈을 말똥하게 뜨고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느닷없이 나타난 어린 드래곤의 모습에 남자는 당황했다. 하지만, 아직 어리다고 해도 드래곤인 건 변함없다. 어떻게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모르겠지만…….
드래곤은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그건, 지난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어린 드래곤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우―웅.
“……!”
하늘을 가리는 여러 개의 붉은 마법진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다.
눈에 익숙한 것에 남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대여, 어서 이리 오시게.”
―맘마!!
그사이 해츨링은 간드러진 목소리에 날개를 퍼덕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너는 진짜 분위기 깨게 애를 꼭 그렇게 불러야 해?”
“이렇게 불러야 우리 림이는 제 말을 알아듣는단 말이에요!”
“그렇게 안 불러도 림이는 말을 알아듣는 거 같던데, 그치 림아?”
―맘마!!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부서진 파편 사이로 여자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자 쪽은 도망치면서 희미하게 본 얼굴이었다.
어찌 됐든 지금 상황은 검을 쥐고 있는 남자에게 있어 그리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다.
“안녕, 드슬님.”
그 와중에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혼자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자리를 박차며 여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와, 놀라라.
나는 코앞에서 가로막힌 검에 침을 꿀꺽 삼키며 몸을 뒤로 뺐다.
“길드장, 정신 안 차릴 거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용사님께서 가로막은 검을 그대로 휘두르며 드슬이 새끼를 저 멀리 보내셨다. 나는 그런 용사님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따라왔었네?”
“가게도 쉬고 있고 심심해서 말이지.”
용사가 검을 바닥에 꽂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구경이나 하려고 했더니 이게 뭐 하는 짓이니?”
타박하는 목소리에 나는 뚱하게 말했다.
“내가 뭐.”
“길드장이란 인간이 배에 구멍 뚫리려고?”
나는 용사에게 드슬이 새끼한테 이미 배에 구멍 뚫린 전적이 있다고 말해주려다가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길마님은 이미 드슬님한테 칼빵 맞은 적 있는데요, 사장님.”
그런데 입을 다문 보람도 없이 대공 새끼가 혀를 놀리고 말았다.
“뭐? 길드장, 유대공이 한 말이 사실이니?”
“사실이기는 하지?”
내 말에 용사님께서 얼굴을 찌푸리신다. 그러고는 바닥에 꽂아뒀던 검을 고쳐 잡으며 말했다.
“드슬이 새끼를 왜 그렇게 쫓나 했더니, 잡아 족치려는 거구나?”
“…….”
용사님께서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신 것 같다. 물론 잡아 족칠 목적이 없는 건 아니라서 할 말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니?”
“어떻게 하기는.”
용사님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성검(聖劍), ‘영광의 검’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립니다.]
나는 손에 잡힌 것을 그대로 잡아 휘두르며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용사님 말대로 저 새끼 잡아 족치러 가야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고를 칠지도 모르는 놈이니 붙잡아야 했다. 이런 내 말에 맘마 몬스터가 동조하듯 날개를 활짝 펼쳤다.
―맘마!
“길마님, 험한 말 쓰지 마세요! 우리 림이가 배운다고요!”
암만 봐도 맘마 몬스터는 평생을 가도 ‘맘마’만 외칠 것 같은데 말이지. 하지만 대공은 맘마 몬스터를 꼭 끌어안고 열심히 ‘아빠’라는 말을 가르쳐 주는 중이었다.
―아쁘마!
“하하, 그대여. 아빠라네, 아빠.”
“…….”
잘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에 지금은 드슬이 새끼를 붙잡는 게 먼저다.
용사님에 의해 저 멀리 날아갔던 드슬님께서 검을 고쳐 잡으며 몸을 바로 했다.
“…인원이.”
“늘어났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거야.”
드슬이 새끼를 잡으면 일단 내 배에 구멍 낸 것부터 갚아준 뒤, 마왕님의 힘을 빌려 금단의 언약이니 뭐니 하는 것도 맺을 거다.
그다음에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무림이 새끼를 잡으러 가야지.
생각만 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계획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드슬님, 혹시 몰라서 묻겠는데 나한테 할 말 있어?”
“…….”
없는 것 같다.
보자, 드슬님과 이번이 세 번째 대치니까…….
절대로 놓칠 수 없다.
나는 고이 펼치고 있던 세 손가락을 꼭 접고는 그대로 걸음을 박찼다.
“……!”
단번에 눈앞에 들이닥친 검을 드슬이가 몸을 뒤로 빼며 피해냈다. 여하튼 간에 날랜 것 하나는 인정해 줘야 했다.
뭐, 날래기는 내가 더 날래지만.
그대로 몸을 돌려 발을 휘둘렀다.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드슬이 새끼가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너는…….”
어째 할 줄 아는 게 발길질뿐이냐고 눈으로 욕하는 것 같다. 나는 드슬이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그런 말이 있다.
검은 거들 뿐, 상대의 시선을 빼앗는 건 발길질이라는…….
“길마님, 집중하세요!!”
―맘마!!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말이다. 코앞에 다가온 끝이 뾰족한 검날에 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 마법진에 드슬이 새끼가 동요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가를 찡그렸다.
“…법사는 여기 없는데.”
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법사가 설마 한 명뿐일까? 검을 쓰는 사람도 너를 포함해서 두 명인데.”
마왕님은 검이 아니라 창을 쓰니 제외다.
내 말에 드슬이 새끼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나는 대공을 향해 고개를 까닥거렸다.
|Pr. 북부대공| : 감사 인사는 나중에 하고 앞이나 제대로 봐여!!!
어차피 단단히 붙잡아 놨으면서 왜 저러나 했더니…….
“길드장!!”
후―웅!
분명 대공의 마법에 꽁꽁 묶여있었을 드슬이 새끼가 어느새 마법에서 풀려나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핏물이 느껴졌다.
물론 손등으로 닦아내자마자 피는 멎었지만 말이다.
“역시, 간단하네.”
“……?”
곧장 다시 공격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드슬이 새끼는 주먹을 쥐었다가 펼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너.”
“저, 저요?”
그러다가 난데없이 우리 대공님을 부르신다.
“다시 해봐.”
“……?”
대공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대공과 똑같은 얼굴로 드슬이 새끼를 쳐다봤다.
저 자식이 우리 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잘난……. 잘난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 대공님한테 뭐라는 거야?
하지만 드슬이 새끼는 이미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허공에다가 검을 한 번 휘두르고는 본 적 없는 웃음을 입가에 걸치고 있었다.
“다시, 해보라니까. 너.”
더욱이 목소리에는 왜인지 분노가 실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공도 이를 느꼈나 보다. 하림이를 꼭 끌어안고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Pr. 북부대공| : 님, 저 사람 갑자기 저한테 왜 저래여? 저 좀 무서운데;
|Pr. 신살자(길드장)| : 나도 좀 무서워.
|Pr. 북부대공| : 님이 무서워하면 어케여ㅠㅠㅠ!!
하지만 단답 일색이던 새끼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는걸. 그것도 대공님께서 마법을 사용하자마자 변하셨다.
잠깐, 그러고 보니…….
“대공.”
“네?”
나는 대공에게로 향하는 드슬이 새끼의 시선을 막아 세우며 대공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Pr. 신살자(길드장)| : 저 새끼한테 마법 다시 한번 더 써봐.
|Pr. 북부대공| : 그치만 무서운데여ㅠㅠ!
|Pr. 신살자(길드장)| : 저 새끼가 너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하면 나랑 용사님이 막을게.
용사님도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드슬이 새끼를 향해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대공이 나와 용사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침을 꿀꺽 삼킨다.
|Pr. 신살자(길드장)| : 하림이가 너를 보고 있단다, 대공아.
그러니까 어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렴!
“이씨…….”
대공이 우는소리를 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드슬이 새끼를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드슬이 새끼의 주변으로 금색의 마법진이 펼쳐졌다.
“…….”
저를 감싸는 마법진의 향연에 드슬이 새끼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