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대공의 품에 안긴 림이가 기분 좋다는 듯이 방실방실 웃고 있다. 해맑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니 양심이 살짝 아파왔지만 그래도 나는 말했다.
“드슬님께서 나도 노리는데, 지성이 있는 단 하나뿐인 드래곤을 어떻게 안 노릴까……?”
“……!”
나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하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이 크게 몸을 움찔거리더니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아…안 들키면 되잖아요!”
퍽이나.
물론 대공의 말대로 림이가 드슬이한테 들키지 않고 성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드래곤의 특성상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공도 말해놓고 좀 아니다 싶었는지 뚱한 얼굴을 보인다.
―맘마? 맘마~?
림이가 그런 대공의 얼굴에 제 뺨을 비비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하, 그대여 간지럽다네.”
“…….”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대공을 쳐다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망할 ‘그대’ 소리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소름이 돋은 팔을 박박 문지르고 있는데 대공이 물었다.
“림이를 어떻게 이용할 건데요?”
퉁명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이 림이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고는 나를 보고 있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말이다.
나는 그 시선에 눈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드슬님께 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칭호가 붙어있겠어?”
대공이 친절하게도 하림이의 귀를 막으며 불퉁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야 드래곤을 잡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가 붙은 거겠죠.”
“그렇겠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는 듯이 묻는 목소리에 나는 비딱하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림이가 맘껏 돌아다니게 할 거야. 림이도 좀 큰 거 같은데 세상 구경 좀 해봐야지.”
“우리 림이가 어딜 봐서 컸다는 거예요?”
대공의 눈에는 불어난 하림이의 몸이 보이지 않나 보다. 아니, 보이는데 못 보는 척하는 거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용사님과 함께 잠깐 잠적 탄 적 있잖아. 그때 림이 1차 성장 일어났지?”
“…….”
정답인가 보다.
내가 있던 ‘글로리아’의 드래곤은 총 세 번에 걸쳐 성장했다. 브레스를 사용하게 되는 1차, 언어를 습득하는 2차, 폴리모프라 불리는 외형 변경 마법을 익히는 3차.
“길마님네 드래곤이랑 제가 있던 곳의 드래곤이 꽤 비슷했나 보네요.”
“그냥 찍은 건데?”
대공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내가 있던 곳이랑 네가 있던 곳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도 모르는데 내가 뭘 알고 말했겠냐?”
그냥 찍었지.
내 말에 대공이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맞아요, 1차 성장 일어났어요. 그거 때문에 가게가 날아가 버려서…….”
대공이 말을 하다 멈추더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설마 맘껏 돌아다니게 한다는 게 우리 림이 날뛰게 만들려고요?”
“날뛰게라니. 적당히 뛰어놀게 만들 거야.”
“그게 그거잖아요!!”
빽― 지르는 목소리에 림이가 화들짝 놀라 대공을 쳐다본다. 대공이 그런 림이를 보듬어 안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그대여. 내가 그대를 놀라게 해버렸군.”
“…….”
몇 번이나 보는 광경이지만 진짜 적응 안 된다. 나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표정을 풀며 말했다.
“그렇게 림이가 날뛰면 드슬이가 잡으러 올 거야. 그때 드슬님을 잡을 거고.”
“우리 림이는요?!”
“당연히 드슬이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거지.”
내가.
덧붙여 말한 목소리에 대공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림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나도 좀 소중하게 여겨줬으면 하는데, 저 망할 대공님이.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남들 눈에도 안 띄게 할 거야. 저기 누워계시는 법사님 힘 좀 빌려서.”
“나……? 내가 뭐……?”
“……?”
느닷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파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법사님께서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고 있었다.
“법사님, 괜찮아?”
“괜찮은데… 여긴 또 어디야?”
법사님께서 얼굴을 찌푸렸다.
“정령사님은 왜 밑에서 자고 있고?”
“여기는 용사님네 가게고 마왕님이 실수로 너희 둘을 잠재워 버렸어.”
“마왕님이? 폭발에 휘말리기 전에 마왕님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
“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법사를 쳐다봤다. 법사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지르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어?”
“보다시피. 너는?”
“나도 다친 데는 없는데…….”
왜인지 지쳐 보이는 목소리였다. 법사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나갈래. 바람 쐬고 싶어.”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 아닌지 법사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저거 저대로 보내도 되나, 걱정될 정도였다.
―맘마?
“네가 하림이구나. 용가리처럼 생겼네…….”
저거 저대로 보내면 안 될 거 같다. 법사는 대공의 품에 안겨있는 하림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법사님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요?”
“그러게.”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쨌든, 림이 콜?”
―맘마!
“좋아, 콜.”
“저기요, 길마님!!”
대공이 빼액, 소리 질렀지만 나는 이미 하림이와 손뼉을 치는 중이었다.
“정령사님 좀 보고 있어.”
“싫어요! 안 보고 있을 거예요!!”
저렇게 소리 질러도 정령사님 보고 있어줄 거라는 걸 안다. 나는 그렇게 밖으로 나갔다.
분명 손님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가게는 휑했다. 나는 카운터에서 정산 중인 용사님한테 다가갔다.
“손님들 그새 다 나가셨나 봐?”
“길드장, 네 덕분에 말이지.”
저는 한 게 없는데요.
나는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용사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내게 카드를 돌려줬다.
“99만 원까지만 그었단다.”
“그것참 감사하네요.”
진짜로 그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카드를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법사님은?”
“저기 밖에. 애 상태 안 좋아 보이더구나.”
“그래서 상태 좀 봐주려고.”
법사님께서는 처량하게 도로가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래.
딸랑, 울리는 소리에 법사님께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신다.
“법사님, 괜찮아?”
내 물음에 법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와, 길마님 친절하죠. 설마 법사가 걱정돼서 나온 건…….”
“맞으니까 빨리 말해. 괜찮아?”
법사가 놀란 눈을 보이더니 이내 배시시 웃음을 짓는다.
“길마님, 그거 알아?”
“뭐.”
“분명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인지 기억이 안 나는 찝찝함.”
“모르겠는데.”
내 말에 해로운 법사님께서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 길마님, 참 친절하죠? 이럴 때는 몰라도 안다고 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상태 안 좋아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새 괜찮아졌나 보다.
나는 손을 들어 법사의 이마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권능, ‘안식’이 활성화됩니다.]
‘안식’은 상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었다.
힘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를 잠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이걸로 서하를 잠재웠었는데 말이지. 어쨌든 간에 마왕이 사용한 힘이 생애 가장 끔찍했던 순간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으니, 꽤 도움이 될 거다.
법사가 이마를 손으로 매만지며 나를 쳐다본다. 꽤 놀란 눈치였다. 나는 이를 무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당히 바람 쐬고 들어와. 아, 혹시 모르니 휴대폰은…….”
“드슬님 덕분에 박살 났죠.”
법사님께서 액정이 나간 폰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걸로 해로운 법사님도 드래곤 슬레이어를 족치러 갈 이유가 생겼다.
법사가 무릎에 턱을 괴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
“안 돌아갈 건가 보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준 형님과 도련님께서 걱정하실 텐데.”
“알아, 그래서 안 가려는 거야.”
오빠와 도하인은 마왕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우마한 길드장과 다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내게 죄책감과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때가 되면 돌아갈 거야.”
법사님이 내 말에 눈웃음을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자. 혼자 돌아가기 좀 무섭거든.”
“싫은데.”
“치사하게 그렇게 나오기야? 그럼, 나 지금 당장 하준 형님께 가서 너 여기 있다고 다 일러바칠 거다?”
“해봐, 지금.”
나는 보이지 않던 사슬을 일부만 보이게 하며 해로운 법사님을 위협했다.
법사님이 무섭다며 키득거린다. 그 얄미운 얼굴에 나는 손을 들어 법사님의 이마를 한 대 때렸다.
“아프죠!!”
아프라고 때린 거다.
* * *
아프다.
우마한은 가슴을 묵직하게 눌렀다가 떨어지는 손길에 힘겹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가 뚜렷해지자 고고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자신을 토닥거리고 있는 동생이 보였다. 문제라면, 그 손길이 굉장히 투박하다는 거였다.
“…마훈아,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안심시켜 주고 있는 것이니라.”
“안심은 둘째 치고, 아픈데.”
“그럼 살살 하겠느니라.”
아니, 그냥 그만두면 안 될까.
우마한은 한숨을 내쉰 뒤 주변을 둘러봤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놈에게 당한 뒤 그대로 병실로 직행했나 보다.
동생, 우마훈은 우마한이 주변을 둘러보는 그 순간에도 그를 토닥여 주고 있었다.
“…마훈아, 그만하면 안 될까?”
“아니 된다. 도하운이 안심시켜 주라고 했느니.”
“도하운……?”
우마한은 결국 우마훈의 손목을 붙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마훈아, 도하운이랑 도대체 무슨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