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보는 눈이 많아서 때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법사 새끼의 오판이다.
나는 팔꿈치를 들어 빠르게 법사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법사가 짧게 신음을 내고는 옆구리를 부여잡는다.
|Pr. 9서클대마법사| : 이, 폭력적인……!!
나는 혀를 날름 내밀어 주고는 오빠와 도하인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형님!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느……. 도하운아!”
“…….”
우마한을 뒤따라 나타난 우마훈 씨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거다. 마왕님의 등장에 그의 형인 우마한이 얼굴을 찌푸리며 나를 가리켰다.
“우마훈, 쟤가 왜 여기 있어.”
그건 강하수 대표님께 묻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지금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확히는, 넋이 가출한 것같이 보였다.
마왕님께서 내 앞을 막고는 우마한에게 말했다.
“도하운이가 내 매니저이니라.”
“뭐? 지금 뭐라고 했어?”
마왕님, 앞 좀 막지 말고 비켜주실래요? 저 그냥 매니저 일 안 하고 오빠한테 가려고요.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마왕님께서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도하운이가 내 매니저라 했느니!!”
“…….”
도망치는 건 글렀다. 나는 마왕님의 어깨 너머를 흘긋거렸다가 곧장 고개 숙였다.
우마한 길드장이 댁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내 동생에게 접근했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죠, 우마한 길드장님. 목적 같은 거 없습니다. 저는 단지 마왕님께서 할 줄 아는 것을 찾으신 것 같아 옆에서 좀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거든요.
하지만 내게로 향하는 우마한의 시선은 끈질겼고, 결국 나는 고단수를 두기로 했다.
“왕훈 연기 보고 반했거든요!!”
시, 시발……!
자괴감에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덮어버렸는데 사람들 눈에는 이상하게 비쳤나 보다.
|9서클대마법사| : 우리 길마님의 컨셉은 ‘성덕’이셨죠.
|정령사| : 굉장히 수줍어 보이십니다, 길드장님――^^
이 망할 녀석들! 길드장 체면 살려줄 생각은 안 하고 구겨줄 생각만 하고 있지!!
이를 으득 가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우마한 길드장님?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됐네요!”
“…로운 씨?”
해로운 법사 새끼가 성큼, 앞으로 나가더니 마왕님 옆에 서셨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게 해주던 아티팩트는 벗은 채였다.
드러난 얼굴에 우마한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해로운에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하운과 손을 잡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왜 자꾸 제 연락을 안 받으시는 겁니까?”
“법사 놈이 형님의 연락을 받지 않았느냐?”
마왕님 말에 법사의 혈압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법사한테 개인 메시지가 날아왔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마왕님 입 좀 제발 막아줘ㅠ
날아든 메시지에 나는 마왕님께 개인 메시지를 날렸다.
|Pr. 신살자(길드장)| : 마왕님,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길드원들을 제발 ‘이름’으로 부르자. 알겠지?
마왕이 나를 쳐다보고는 불만 가득한 얼굴을 보인다. 나는 그 얼굴을 무시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Pr. 마왕| : 알겠느니.
돌아온 대답에 만족해하며 나는 앞을 막아서고 있는 마왕과 법사의 뒤로 몸을 숨겼다.
법사가 마왕의 말을 무시하고는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받기 곤란하니 안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마한 길드장님.”
법사의 말을 끊은 건 우리 오빠였다. 오빠와 도하인이 내게 다가와서는 양옆에 섰다. 오빠의 말에 우마한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도하준 길드장?”
우마한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오빠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서는 대답했다.
“댁네 남동생분의 연기가 얼마나 뛰어난지 구경 좀 하려고 왔습니다. 제 하나뿐인 여동생이 좋아하는 연예인이 어떤 놈인지 좀 살펴보고 싶어서요.”
‘하나뿐인’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면 착각이겠지.
오빠의 목소리에 우마한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린다.
“저는 그럼 댁네 여동생이 제 하나뿐인 남동생을 얼마나 잘 살펴봐 주는지 구경 좀 해야겠군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매니저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저 재수 없는 새끼가 감히…….”
이 와중에 도하인이 금방이라도 우마한에게 달려들 듯이 굴고 있다.
하인아, 제발 얌전히 있어줘.
도하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우마한은 콧방귀를 뀌고서는 멍청한 얼굴로 서있는 정령사에게 물었다.
“강 대표님, 마훈이 매니저 말입니다. 오늘부터 일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네… 그렇습니다만…….”
강하수의 말에 우마한이 나를 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뭐 해요? 일 안 하시고.”
시, 시발…….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너무한 거 같다.
내가 마왕님의 매니저 일을 맡게 됐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이었다.
마왕님께 물이라도 건네줘야 하는데 줄곧 넋이 나간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강하수가 입을 열었다.
“저… 우마한 길드장님. 한 가지 미리 말씀을 못 드린 게 있습니다만.”
그러고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이분께서도 마훈 군의 매니저를 잠깐 맡아주기로 했답니다.”
“…로운 씨가요?”
우마한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해로운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마왕님께서도 해로운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고는 말했다.
“나는 해로운이가 싫으니.”
“누구는 좋은 줄 아나요, 우마훈 씨?”
법사님께서 곧장 그 말을 맞받아치며 미소를 지으신다. 사이좋은 두 길드원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마왕님의 매니저 일이 시작됐다.
“해로운아, 물이 마시고 싶으니라.”
“마훈 씨는 손이 없나요, 발이 없나요?”
“둘 다 있느니.”
하지만 매니저로 부려지는 건 해로운 법사님뿐이었다.
마왕이 법사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벌써 열 손가락이 넘어갔다.
“마훈아! 버, 아니. 로운 씨만 네 매니저 아니잖아!!”
결국, 보다 못한 우마한이 버럭 소리 질렀지만…….
“마훈 씨가 로운 씨에게만 시키겠다는데 왜 그러십니까, 우마한 길드장님?”
오빠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이 물었다.
|Pr. 9서클대마법사| : •́ㅿ•̀
|Pr. 9서클대마법사| : 하준 형님! 의리를 저버리셨죠! 법사 완전 실망했죠!!!
법사님께서 분에 찬 메시지를 보냈지만 당연히 나는 이를 무시했다.
어차피 마왕님 곧 촬영 들어가니까 조금만 참아, 법사님.
참고로 마왕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천막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하운’의 도하준과 도하인, ‘화랑’의 우마한 그리고 회사원 헌터 H 씨.
신기하다면 신기하지만 같이 있기에는 겁나는 조합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아이고, 아직 모여계셨군요! 다행입니다.”
“강 대표님?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오빠의 물음에 강하수가 뺨을 긁적였다.
“아이고… 그게 말입니다…….”
“제가 붙잡았답니다, 하하.”
강하수의 뒤를 이어 나타난 사람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의 나 감독이었다. 감독님께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귀한 분들께서 촬영장을 찾아주셨으니 드라마가 더 대박이 날 건가 봅니다.”
마왕님 때문에 그대로 쪽박 날 거 같은데요.
감독님께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더니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저, 다름이 아니라… 혹시 카메오로 출연해 주실 수 있을까 하여 이렇게 찾아왔답니다.”
감독님의 말에 강하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오빠와 도하인, 우마한 길드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독님께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다들 이해를 못 한 게 분명했다.
|Pr. 9서클대마법사| : 헐, 대박; 법사도 이렇게 데뷔하나요;
하지만 법사는 알아들었나 보다. 날아든 메시지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장을 보냈다.
|Pr. 신살자(길드장)| : 너는 이미 데뷔했잖아.
|Pr. 9서클대마법사| : (૭ ᐕ)૭?
|Pr. 신살자(길드장)| : 9시 뉴스로 이미 데뷔하셨잖아요, 법사님^^
|Pr. 9서클대마법사| : ㅅㅂ;
지난번에 일어났던 게이트와 최근의 돌발성 적합자 심사로 법사는 이미 공중파 뉴스에 모자이크돼서 여러 번 출연했었다.
법사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그 처연한 모습에 나는 몰래 키득거리며 웃었다.
감독님께서는 알아듣지 못한 세 사람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마한 길드장님과 해로운 씨는 우마훈 씨가 맡은 ‘왕훈’의 측근으로, 도하준 길드장님과 도하인 부길드장님은 왕훈과 대적 중인 ‘왕현’의 측근으로…….”
감독님께서 말을 흐리더니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묻는다.
“그렇게 카메오로 출연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분량은 얼마 안 되니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된다며 감독은 말을 덧붙였다. 오빠와 도하인이 서로 눈을 맞추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우마한도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도 좋습니다. 동생이 연기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정말 뜻깊겠군요.”
“형님, 나를 그렇게나 생각해 주고 있었던가?”
“…….”
우마한이 그리고 있던 미소는 이내 일그러졌지만 말이다.
회사원 헌터 H 씨는 안타깝게도 출연을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맡은 일이 우선이라서요.”
맡은 일이라면 내 경호를 말하는 걸 거다. 답지 않게 책임감이 강하구나 싶었다.
어쨌든, 해로운을 제외한 ‘하운’의 내 가족과 ‘화랑’의 마왕님네 형님이 특급 카메오로서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 * *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의 나 감독은 찾아온 기회를 쉽게 저버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H-Entertainment의 도비가 하차하겠다고 난리를 부렸을 때는 무슨 액이 꼈나 싶었지만, 그 대신 들어온 우마훈은 아주 복덩이 역할을 해내는 중이었다.
“나 감독, 짐은 황자 따위가 아니라 군주니라.”
“…….”
비록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