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는 법사가 보낸 다급한 메시지를 외면했다.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니ㅣㅁ!!!
나는 정령사와 똑같이 법사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고는 정령사를 불렀다.
“강하수 대표님.”
부른 목소리에 강하수가 흠칫, 몸을 움츠리더니 애매하게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물었다.
“도대체 나보고 저 새끼의 뭘 어떻게 도와주라는 걸까요? 네?”
“그…그게 말입니다.”
강하수가 뺨을 긁적이더니 이내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말고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건지나 빨리 말해.”
도대체 무슨 대단한 걸 부탁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궁금할 지경이다.
강하수는 크게 숨을 내쉬고서는 입을 열었다.
“보셨다시피 마왕님께서 ‘하운’이라는 이름에 저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것 같네. 저 드라마 작가님이랑 상의해서 ‘하운’이라는 이름 바꾸면 안 돼?”
“안 됩니다. 1화부터 나온 인물이라서요. 그리고 도비 군도 하차했는데 멀쩡한 인물 이름도 개명시키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다.
정령사가 지친 얼굴을 두 손을 들어 문지르고는 말을 이었다.
“대본에서 ‘하운’이라는 이름이 등장했을 때, 당신이 나오냐고 제게 묻더군요.”
아니, 그걸 왜 물어?
당혹감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령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왜 나오지도 않는 도하운이의 이름을 집어넣은 거냐고 성을 내면서 제게 또 묻더군요.”
“…….”
정령사도 참 고생이 많았구나 싶기는 무슨,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짊어지게 되다니! 꼴좋다!!
속으로 그렇게 정령사를 비웃고 있는데 정령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설마 저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운’과의 촬영은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그냥, 쟤 드라마에서 빼.”
마왕님 하는 꼴을 보니 그것밖에 답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령사는 내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 어차피 우마훈 촬영분은 아직 방영 안 되지 않았어?”
그냥 도비 새끼 다시 불러서 찍는 게 빠를 거 같은데.
정령사가 끙, 앓는 소리를 내고는 얼굴을 문지르며 목소리를 뱉어냈다.
“…이미 계약서에 도장 찍었고, 언론에 기사까지 다 뿌렸습니다.”
“무슨 기사?”
“화랑의 우마한 길드장의 동생이 저희 소속사와 계약했고, 드라마까지 출연한다고요.”
정령사가 그러지 말아야 했다면서 한탄한다. 그 와중에 법사는 기어코 그 기사를 찾아내 이거냐고 정령사에게 보여줬다.
나는 법사의 멱살을 잡으려 드는 정령사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우마훈이 너희 소속사랑 계약했다고? 우마한 길드장이 그것도 허락해 줬어?”
지금까지 봐왔던 우마한의 성격상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 출연하게 해줬다는 것도 이상하다.
정령사가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웅얼거렸다.
“그게… 이야기 도중에 우마한 길드장님께서 제 정체를 알아버리셔서 말입니다…….”
“와우, 대표님도 그분께 들켰어요?”
“당신도 우마한 길드장님께 들켰습니까?”
놀라 묻는 목소리에 법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진작에 그분께 걸렸죠! 저기 감독님께 혼나고 계시는 저분 덕분에!!”
그래도 그 덕분에 법사는 센터에서 제대로 된 검사 없이 ‘헌터’로 인정받게 됐다. 우마한 길드장이 검사를 주관하는 감독관에게 뒷돈을 찔러 넣어줬다던가, 그랬다고 했던 거 같다.
“어쨌든 그 덕분에 마훈 군을 수월하게 저 자리에 앉힐 수는 있었지만…….”
정령사의 흐려진 목소리에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마훈 씨!! 응? 제발 대본대로 하자, 응?! 아니면 애드립을 쭉 치든가!!”
정령사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보다시피 저런 상태지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정령사에게 법사가 소곤거렸다.
“마왕님을 저 자리에 앉힌 것부터가 잘못된 거죠? 정령사님께서는 지금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밟히고 계시는 거죠?”
“그 입 좀 제발 닥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헉! 말하는 걸 낙으로 삼고 있는 로운이한테 닥치라고 하다니!! 강 대표님 너무하죠!”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법사 새끼를 한 번 쳐다보고는 정령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저 ‘하운’ 역을 맡은 사람, 대역을 서서 우마훈이랑 연기하라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당신의 뭘 믿고요!”
“…….”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기분이 나빴다. 살짝 표정을 굳히자 정령사가 덥석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마훈 군 매니저 역할을 좀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진짜 매니저 역할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마훈 군의 제어 좀 부탁드립니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내보이고 있는데 정령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마훈 군의 분량이 얼마 안 됩니다! 3일… 아니 일주일 정도만 좀 해주시면……! 사례는 두둑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의뢰도 뛰라면 무슨 의뢰든 뛰겠습니다!!”
오,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일주일에 일곱 번, 콜?”
“물론이지요!!”
정령사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도비 군도 저러지는 않아요!!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을 전달해도 어쩌라느니 그렇게 나오는데 아주 환장하겠습니다!!”
마왕님께 쌓인 게 많았나 보다. 그 마음 아주 잘 알지. 나는 정령사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강 대표님 호구 잡혔죠?”
그리고 정령사의 손등을 두드려 주던 손을 들어 깐죽거리고 있는 법사 새끼의 입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법사가 제 입술을 붙잡고선 울상을 짓는다.
“하운 아가씨 너무하죠. 하나뿐인 보디가드에게 이렇게…….”
“오빠한테 전화해야겠다. 보디가드가 정신 사납게 하는데 해고 좀 시켜달라고.”
“얌전히 있겠습니다, 아가씨.”
법사가 다소곳하게 허리를 바로 폈다. 정령사가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법사는 그런 정령사를 보며 눈웃음 지었다.
“하지만 곤란하죠, 강 대표님?”
“뭐가 곤란하다는 겁니까?”
법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어떤 아가씨인데 저분의 뒤치다꺼리를 맡기세요?”
나는 법사의 손을 쳐내며 눈가를 찡그렸다.
“어떤 아가씨고 자시고 오빠한테 보고하는 게 귀찮아서 곤란한 거겠지, 해로운 새끼야.”
“앗, 들켰다.”
법사가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인다.
“도하운아.”
그사이 감독님께 잔뜩 혼이 난 마왕님께서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셨다. 법사님이 다가온 마왕님께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마훈이, 나는 안 보여?”
“법사 놈아, 내 이름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말아라.”
법사가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이내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니.”
그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강하수는 씩씩거리는 감독을 보고는 곧장 그에게로 갔다. 마왕이 감독이 있는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입술을 씰룩였다.
“혼났느니.”
“혼날 만했어.”
마왕님께서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신다. 나는 짧게 혀를 차고는 말했다.
“이 세상에 ‘하운’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하면 어떡해?”
“내가 알고 있는 ‘하운’은 너뿐이니라.”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나는 뚱한 얼굴을 보이는 마왕님을 빤히 쳐다보다가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우마훈, 연기하는 거 재미있어?”
“모르겠느니.”
“싫지는 않다는 거지?”
마왕님께서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도비 새끼도 하는 연예인을 너라고 못 하겠냐. 저 망할 주둥이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촬영하는 동안 단단히 교육하면 되겠지.
어차피 일주일이면 되는 일이라고 했고, 드슬이 새끼는 찾아오면 찾아오지 나를 피해 도망갈 거 같지는 않으니까.
“잠깐! 길……!”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법사가 다급히 나를 부르다 말고는 이를 악물며 내게 물었다.
“도하운 아가씨, 강 대표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아니시죠?”
“받아들일 생각인데.”
“야!!”
버럭, 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법사를 쳐다봤다. 법사가 얼굴을 찌푸리며 묻는다.
“하준 형님한테는 어떻게 허락받으려고!!”
법사의 목소리에 시선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Pr. 정령사| :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우리는 강하수의 손님으로 온 거다. 그러니 이 이상의 소란은 곤란하다.
하지만…….
“우리 오빠한테 멋대로 ‘형님’ 붙이지 마! 해로운 새끼야!!”
“!!”
나는 회사원 헌터 H 씨를 소환하고 턴을 종료했다.
* * *
오랜만에 오빠와 도하인이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랜만에 가족끼리 저녁 시간을 가지는데 도하인이 크게 밥숟갈을 뜨며 물었다.
“야, 너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 촬영장 다녀왔다며?”
“응.”
“재미있었어, 하운아?”
오빠의 물음에 아니, 라고 답하려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회사원 헌터 H 씨를 소환했지만 촬영장에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고! 뭐가 해롭습니까, 하운 양!!”
강하수가 놀라운 순발력으로 해로운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곧장 나와 해로운을 데리고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정령사님께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하운아?”
“재미있었어.”
나는 밥알을 골라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도하인이 재미있었다면서 표정이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무시했다.
나는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그런데 오빠.”
“응?”
“나 좋아하는 연예인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