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갑자기 나온 키 이야기에 나는 버럭 소리 질렀다.
“스무 살 넘어서 크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저는 컸습니다!!”
“커서 좋았겠네!”
“악!!”
나는 강하수의 발목을 냅다 걷어차 주고는 비상구 앞에 멈춰 섰다.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아래로 내려가면 된답니다!”
발목을 부여잡고 끙끙 앓고 있던 정령사님께서 친절하게도 알려주셨다.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대신 곧바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찰박―
그러나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물에 나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정령사님께서 뒤늦게 아래로 내려오며 구시렁거렸다.
“제가 키를 가지고 놀린 것도 아니고! 스무 살에 컸다고 말한 것뿐인데 그렇게 걷어차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정령사님.”
“왜 부릅니까!”
성난 목소리에 나는 바닥을 가리켰다. 내가 가리키는 곳을 본 정령사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너희 지하 주차장 천장 공사 다시 해야 되나 봐.”
“뭐, 이런……!”
나는 놀란 목소리를 뒤로하며 비상구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찰박이며 튀어 오른 물이 신발을 적신다. 그 뒤로 정령사의 걸음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나를 따랐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령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해?”
“그건 기억합니다.”
기억한다고 했으면서 돌아오는 말이 없다. 제대로 기억하는 거 맞냐며 한 소리를 하려는데 정령사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래요. 딱 저렇게 생겼습니다.”
―아…아아……?
“…….”
왜인지 눈에 익숙한 하얀 SUV 차량 위에 푸른 머리칼을 지닌 여자가 앉아있었다. 정확히는, 여자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다리가 자리하고 있어야 할 곳엔 생선의 꼬리가, 귀가 자리하고 있어야 할 곳엔 생선의 아가미와도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찾았네, 세이렌.”
뭍으로 올라오신 인어님을 찾았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사슬을 움직이고자 했다.
정령사가 멍하니 서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아나! 이 새끼가 진짜!!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있는 힘껏 강하수의 발을 밟아주었다.
“아악!!”
강하수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강하수는 그대로 허리를 굽히고서는 발을 어루만지며 내게 소리 질렀다.
“진짜, 좀!!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습니까? 왜 자꾸 밟으십니까, 왜!!”
“한 번밖에 안 밟았어. 그리고 정신 차려. 너 또 넋 나갈 뻔했거든?”
내 말에 정령사님께서 몸을 움찔거리시고는 고개를 떨구신다. 나는 그 모습에 짧게 혀를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봤자 방해만 될 거 같으니까 여기 있어. 법사 새끼 좀 불러주고.”
“법사 놈은 왜 부른답니까? 올 수는 있고요?”
“있을걸.”
아니, 틀림없이 올 수 있다.
나는 정령사에게 씨익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심사 끝나고 센터로 끌려갈 거야?”
내 물음에 정령사가 격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 고갯짓에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잔말 말고 불러.”
도대체 어떻게 부른 건지, 길드 전체 메시지에 법사의 울부짖음이 가득 올라왔지만 무시했다. 가까이 마주한 세이렌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입을 뻐금거린다.
―아, 아아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나는 말을 흐리고는 이내 방긋 웃음을 보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긍금하지도 않고 말이지.
나는 곧바로 손에 잡힌 검을 휘둘렀다.
《칭호, ‘검성(劍城)’의 봉인이 강제적으로 해제됩니다.》
칭호 효과에 제한이 가해진다는 메시지가 나타났지만 내 알 바는 아니다.
[절대 권능, ‘법칙 위의 절대자’가 활성화됩니다.]
가해진 제한은 모두 없던 것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키야아아악!!
입을 뻐금거리기만 하던 세이렌이 돌연 아가리를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질렀다. 고막을 찢을 듯이 들려온 소리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것만이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윽…….”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 내 몸 이곳저곳을 할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더욱이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푸르게 인 궤적이 그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성역으로 일단 짓뭉갤까.
그렇게 걸음을 뒤로 물리고 권능을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보드랍게 나를 감싸는 바람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칼날과도 같은 바람이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한 명밖에 없었다.
|Pr. 신살자(길드장)| : ㄱㅅ
“메시지 보낼 시간에 집중이나 하십시오!”
따끔하게 혼내는 목소리에 키득거리며 웃고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푸르게 인 전격이 그대로 세이렌을 베고 지나갔다.
―키에에에!
또 한 번,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하얀 SUV의 천장이 세이렌이 흘린 검은 핏물에 적셔지기 시작했다.
쿵, 쿠쿵―
차창이 두드려지는 소리에 나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아… 아아…….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세이렌은 핏물을 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단번에 숨을 끊어줄 작정이었는데 괜한 고통을 준 것 같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던 터라 나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손에 쥐어진 검을 높이 들었다.
―성녀님.
세이렌의 얼굴 위로 겹쳐지는 핏물 가득한 남자의 모습에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만족하시나요?
놀리듯이 묻는 목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 망할 인어 새끼가 같잖은 재주를 부리고 있나 보다. 이를 으득 갈며 높이 들었던 검을 그대로 내리치려 했다.
퍼엉, 눈앞에서 터지는 머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검붉은 핏물이 뺨에 묻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것을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닦아내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길마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사라졌다. 나는 힘없이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멍하니 목소리를 내뱉었다.
“…법사?”
해로운 법사 새끼가 두 눈을 휘게 접으며 말한다.
“정령사님께서 안으로 좀 들어오라고 하도 난리를 부려대서 와봤더니…….”
법사가 물기가 가득한 지하 주차장을 한 번, 그리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하얀 SUV를 한 번 쳐다보고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법사는 영문을 모르겠죠!”
돌발성 적합자 심사가 종료됐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악보!!”
“응?”
“네?”
법사와 정령사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하얀 SUV 차량에서 내려오고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악보 찾으러 가야 해!!”
정령사가 내 외침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의뢰 끝낸 거 아니었습니까?”
“너 때문에 하다 말고 나왔거든!”
왜인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강하수를 향해 짜증스레 외치고는 그대로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길마님, 스톱!”
그런데 망할 법사님께서 순식간에 내 앞을 막아섰다.
“뭐야? 비켜!!”
“비키고 싶은데 비킬 수 없죠? 심사 종료됐죠? 밖에 있는 사람들 지금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겠죠?”
법사의 말에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여기는… 그러니까……!”
“일단… 먼저……!!”
이미 사람들이 들어왔는지 소란스럽다. 나는 머리를 헤집고는 남은 시간을 살폈다.
분명, 돌발성 적합자 심사가 종료되면서 멈췄을 시간은 다시 흘러가는 중이었다.
【00:04:03】
5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다. 초조함에 손톱이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법사님께서 느닷없이 물었다.
“악보 있는 곳이 어딘데?”
“어? 어… 그러니까…….”
갑자기 머리를 굴리려니 생각이 나지가 않는다. 녹음실이 있던 곳이 몇 층이더라? 모르면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대표님! 녹음실 있던 곳이……!”
“아니다, 그냥 정령사님이랑 여기에 잠깐 있어봐.”
법사는 내 말을 끊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법사 놈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몰라, 나도…….”
법사, 이 새끼 내 계획을 알고 튀신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꼭 잡아 조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는데 귀 가까이서 버럭 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당신! 조금 전에 뭡니까!!”
“악! 내가 뭐!!”
얼얼해진 귀를 붙잡고 펄쩍 뛰는데 정령사가 삿대질하며 잔뜩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죽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고막을 때린 정령사 새끼를 쳐다보는데 정령사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길드장님도 홀렸었군요. 홀렸는데 그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모르셔도 됩니다.”
정령사는 간단히 대꾸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야!!”
아니, 이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짜증 나는 대답이 ‘아무거나’와 ‘몰라도 돼’라고!
대답 안 해주면 발목을 한 번 더 걷어차겠다고 협박하는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령사님 말이 맞죠. 길마님은 모르셔도 되죠?”
“……?”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던 법사님께서 손에 팔랑거리는 종이 몇 장을 들고 나타나셨다.
“자, 여기 악보. 이거 맞지?”
“어……?”
얼떨결에 법사가 내민 것을 받아 드니 곧바로 메시지가 나타났다.
[의뢰인, ‘하늘에서 떨어진 좌천사’의 S급 성물, ‘망령을 부르는 악보’를 획득하셨습니다.]
[성좌, ‘하늘에서 떨어진 좌천사’가 당신께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받아 들었던 악보가 환한 빛에 휩싸이며 사라졌고, 곧 보상이 어떠니 뭐니 하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나는 입술을 살짝 벌리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법사를 쳐다봤다. 법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법사님은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죠!”
그 말 위로 나타나는 메시지가 있었다.
[칭호, ‘신살자(神殺者)’의 모든 권능에 제한이 가해집니다.]
법사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