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내 말에 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대공을 가리킨다.
“흑발 냉미남 북부 대공님께서 엄숙하고 진지하며 근엄한 목소리로 SOS를 보내며 법사의 잠을 하도 방해해대서 와봤습니다, 길마님.”
“제가 언제 그랬다고!!”
“졔가 언졔 그롔다고!!”
법사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대공의 말을 따라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랬잖아, 대공님. 다짜고짜 진언을 날려대며 길마님에 대해 물어대는데……! 대공님 덕분에 법사는 오늘 잠 다 잤죠!!”
“그게……!”
대공이 말을 멈추더니 입술을 삐죽이고선 소리쳤다.
“법사님 포털 이용한다고 나간 사람이 갑자기 결계를 쳐달라고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내 탓이야?”
자리에서 일어선 대공이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였다.
“싸우려면 저 멀리 한강 나가서 싸우든가.”
“죽고 싶냐.”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을 들었는지 대공이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법사는 건물에 새겨진 긴 상흔을 지워내고 있었다.
“그보다 새끼 도마뱀은 어쩌고 혼자 나왔어? 용사님은?”
“림이는 지금 꿈나라에 갔고요. 사장님께선 가게 청소 중요. 저는 잠깐 나온 거예요.”
“용사님? 사장님? 여기 용사님도 계셔?”
건물을 말끔하게 복구시켜 놓은 법사님께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렇다고 해주자 법사님께서 감탄하신다.
“와~! 우리 길드원들 오늘 다 만나겠죠? 길마님아, 근데 붙잡고 있던 사람이 드슬 님이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말했다.
“그 망할 새끼 잡으러 가야 해.”
왜 뒤에서 칼빵을 놓았는지 듣지도 못했거니와 물어볼 것이 하나 더 생겼다.
허공을 뒤덮었던 푸른 진.
그건 분명 글로리아의 마법이었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착각했을 리도 없고.
“…일진 더럽게 사납네.”
별님께서는 의뢰 안 내려주시고 뭐 하시나 모르겠다. 의뢰를 받아야 신살자의 힘을 사용해 그 새끼를 쫓아볼 텐데. 복잡한 머리를 긁적이고선 법사와 대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폰을 꺼냈다가 크게 입을 벌렸다.
[하인놈] ―부재중 73
[하준이 오빠] ―부재중 41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법사 새끼가 화면에 뜬 부재중 전화 수십 통을 보고는 깐죽거렸다.
“우리 길마님, 망했죠?”
“…….”
그래. 망했다, 이 새끼야!
4. 태산이 높다 하되
어쩌지? 이 상황을 어쩌면 좋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보려고 하는데 손에 쥐고 있던 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하준이 오빠]
화면에 뜬 이름에 황급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화를 받기 무섭게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도하운!!
하지만 불행은 연속으로 일어난다고 했던가.
“오빠, 그게 있잖아? 내가 지금 잠깐 편의점에 나왔거든?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 나왔는데……!”
―라면은 무슨……!!
오빠의 애타는 목소리가 끝을 맺기도 전에 전화는 뚝, 끊기고 말았다.
“여보세요? 오빠? 하준이 오빠?”
설마 아니겠지, 라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오빠를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더욱이 어둡게 꺼진 화면은 다시 켜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법사 새끼가 깐죽거린다.
“법사님은 도하준 길드장님과 전번 교환해서 폰 빌려줄 수 없죠.”
“…….”
눈앞이 절로 깜깜해진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폰 빌려드려요?”
“응!!”
대공의 말에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대공이 바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내게 건네주려는가 싶더니 다시 물린다.
“……?”
지금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미간을 한껏 좁히고는 대공 새끼를 쳐다보는데 대공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빌려줄 테니까 녹음한 거 지워줘요.”
“녹음? 무슨 녹음?”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으니 대공 새끼가 쨍하게 소리 질렀다.
“그거 있잖아요! 프란체스카랑 대화하던 거!”
프란체스카, 익숙한 그 이름에 반응한 건 법사님이셨다.
“프란체스카라면 길마님이 외우시던 마법의 주문?”
“마법의 주문 아니거든요?!”
“그럼 뭔데?”
“그……!”
대공은 말을 하다 말고는 뚱한 얼굴을 보였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그건, 그리스의 12신 중 하나인 헤라가 애지중지 키우던 공작새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 없나 보다.
아, 진짜! 마법의 주문이고 자시고!
“알았어! 지워줄 테니까 빨리 빌려줘!!”
1분, 1초라도 급한 상황이었다.
“진짜 지워줄 거예요?”
“진짜 지워줄게!!”
대공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대공이 건네는 휴대폰을 빼앗듯이 들고선 오빠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망할! 통화 중이잖아!!
산 넘어 산이고, 갈수록 태산이다. 이 답도 없는 상황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고는 버럭 소리 질렀다.
누구한테?
“법사님! 포털 좀 열어줘!!”
법사님한테.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빨리 집으로 가서 오빠한테 싹싹 빌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망할 법사님께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레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하겠죠, 길마님?”
“곤란하기는 뭐가 곤란해! 언약 맺은 거 잊었어? 빨리 열어달라니까?!”
내 말에 법사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놀란 눈을 보이신다.
“허억, 언약이라니! 우리 길마님, 법사 혀 잘리는 거 그렇게나 보고 싶어요?”
“장난치지 말고!”
“장난치는 게 아니라, 그 꼴로 가시려고?”
“!!”
법사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붉게 적셔진 내 상의였다.
핏물이 말라붙어 있는 것도 문제지만 망할 드슬이 새끼의 칼질 때문에 너덜해진 것도 문제였다. 겉옷으로 어떻게 가려볼까 하다가 불가능이란 것을 깨닫고 처연한 얼굴로 법사에게 물었다.
“마… 마법으로 어떻게 못 해?”
“클리닝(Cleaning)은 해줄 수 있겠지만 구멍 난 건 메꿔줄 수 없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붉게 핏물이 말라붙어 있던 옷이 말끔하게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난잡하게 헤집어진 건 그대로였다. 이대로는 돌아가도 문제다.
내 기필코 드슬이 새끼를 족치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면서 일단 지퍼를 끌어 올려 상의를 가려보고자 했다.
“어, 어때?”
“…무슨 대답을 원해, 길마님?”
두 눈을 휘게 접으며 묻는 법사 새끼의 질문에 나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려 주었다.
진짜 어쩌지?
이제 머리도 안 굴러간다. 그냥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며 집으로 돌아갈까 할 때, 또 다른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대공, 너 거기 있니? 왜 이렇게 안 돌아와?”
용사님!!
나는 대공 새끼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한달음에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나갔다.
“용사님! 용사님아!! 나 좀 도와줘!!”
애타게 용사님을 부르는 나를 보고 법사 새끼가 미니 마왕님이라면서 놀려댔지만 무시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용사님께서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나를 반기셨다.
“길드장……? 너 아직도 안 갔니? 그보다…….”
용사님이 눈살을 찌푸리신다.
“꼴이 왜 그러니?”
“설명할 시간 없어! 옷! 옷 좀 빌려줘!!”
“옷이야 빌려줄 수 있기는 한데… 길드장, 너한테 좀 클 텐데?”
“상관없어!!”
나는 용사님의 팔을 붙잡고는 멀뚱히 서있는 법사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법사!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법사?”
“네, 법사랍니다. 안녕, 용사님.”
법사님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든다. 용사님은 법사가 건네는 해맑은 인사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상황을 영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뭐가 어쨌든 간에…….
“둘이 인사는 나중에 해! 유대공! 법사 새끼 도망가려고 하면 붙잡아야 해! 안 그러면 녹음 안 지워줄 거야!”
“지워준다고 했으면서!!”
메롱이다.
대공의 녹음은 파일 1, 파일 2 등 여러 개로 곳곳에 저장되어 있다. 그런 귀중한 것을 하나만 저장해 뒀을까봐?
나는 혀를 날름 내밀어 주고는 그대로 용사님의 가게로 달려갔다.
용사님이 누가 보면 내가 주인인 줄 알겠다고 구시렁거렸지만…….
미안, 용사님! 내가 좀 급해!!
* * *
상황은 다행히 잘 해결이 됐다.
아니, 잘 해결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일단 용사님의 옷은 동묘 시장에서 도하인의 옷을 사면서 겸사겸사 산 거라고 둘러댔지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고 있었던 거야! 형이랑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그리고 네 방에 그 껍데기들은 뭐야?!!”
망할 도마뱀 새끼의 알껍데기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말 안 해?!!”
입이 열 개라도 말 안 한다. 아니, 이건 못 한다.
“도하운!!”
고막을 정통으로 내리치는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그냥 죽으란 법은 없다고 좋은 수가 생각났다.
|Pr. 신살자(길드장)| : 법사님, 나 너 좀 팔아도 돼?
|Pr. 9서클대마법사| : ??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법사를 어디다 팔려고 그러시는 거죠ㅠ?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법사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Pr. 신살자(길드장)| : 마왕 닮아가냐.
|Pr. 9서클대마법사| : 마왕님 닮아가냐니!!
|Pr. 9서클대마법사| : 어떻게 그런 심한 소리를 할 수가 있죠!!!
|Pr. 9서클대마법사| : ୧( ಠ Д ಠ )୨
|Pr. 9서클대마법사| : 법사 지금 매우 빡쳤죠!!
|Pr. 신살자(길드장)| : ㅗ
법사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하나 보내준 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게… 해로운 씨한테 받은 건데…….”
“해로운? 뭐가 해로워?”
“아니… 회사원 헌터 해로운 씨. 그 사람한테서 받은 거라고.”
“너 구해준 사람?”
“응.”
도하인이 샐쭉하게 두 눈을 뜬다. 나는 그 눈을 피하며 입술을 비쭉였다.
“오빠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