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마왕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법사는 이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상큼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와.”
“다녀오겠느니.”
마왕님께서 법사의 팔을 잡고 끌고 가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법사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길마님? 길마님! 나 그냥 여기서 옷 갈아입을게!!”
“응, 거절한다.”
“길마님! 야!!”
나를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를 무시하며 문을 닫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렸을까.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헌터님들. 소란으로 인해 도로가 꽉 막히지 뭡니까?”
“……?”
“거기에 저희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께서 사고 하나를 크게 쳐버려서 말이지요. 그것도 수습한다고……. 응?”
느닷없이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시죠? 헌터분들은 어디에?”
멍한 물음에 나는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게이트 관련으로 모인 헌터분들은 반대 쪽 회의실에 있어요. 회의실 바꿨다고 공지 날아가지 않았어요?”
이번 게이트 관련으로 크게 공을 세운 건 회사원 헌터 H 씨, 이하 ‘9서클 대마법사’다.
하지만 외곽 지역에서 시민의 대피를 도우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협력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브랜드 홍보 촬영 중이던 H-Entertainment 소속의 연예인들이다.
그리고 그 연예인들이 소속된 연예 기획사의 대표가…….
“강하수 대표님 맞으시죠?”
“네, 네. 맞습니다.”
어떻게 알아봤냐면서 강하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짓는다.
H-Entertainment는 여러모로 유명한 곳이었다.
소속 연예인들이 전부 헌터로 활동 중인 것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표가 평범한 일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님을 이렇게 볼 줄이야. 사인이라도 받을까 하다가 써먹을 데가 어디 있겠나 싶어서 회의실이나 알려주기로 했다.
“이쪽으로 쭉 가시면 여기랑 비슷하게 생긴 문이 하나 더 나올 거예요. 회의는 그쪽에서 열리고 있어요.”
“아이고! 고마워요, 학생.”
강하수가 허리를 꾸벅이고는 내가 가르쳐 준 곳으로 헐레벌떡 뛰어간다.
좋은 일 하나 했다고 뿌듯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모바일로 바둑 게임 하나를 끝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왔느니.”
“왜 이렇게 늦었어?”
마왕은 대답해 주는 대신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였다.
왜 저러는가 싶었더니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법사 놈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마훈이 때문에 길을 잃어버렸었거든.”
갑자기 왜 이름으로 부르는 거래? 어쨌든 간에.
“길을 잃어버렸으면 그냥 마…….”
법사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손짓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다 같이 헤매버렸네요.”
조금 전에 들은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학생……?”
“…….”
님, 내가 분명 길 알려줬잖아요. 왜 저 자식들이랑 같이 들어오는 거야?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길을 잃고 헤매고 계셔서.”
그래서 데리고 왔다면서 법사가 친절하게 알려준다.
“미안해요, 학생. 학생이 알려준 쪽으로 가봤는데 암만 찾아봐도 회의장이 보이지 않아서.”
강하수 대표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사이에 회의장이 또 바뀌었나? 그게 아니고서야 못 찾을 리가 없는데?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길치인 거야?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해 드릴게요. 야, 법…….”
사님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Pr. 신살자(길드장)| : 님 이름이?
내 메시지를 봤을 텐데 법사님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다. 대신 법사님께서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그냥 여기 있지?”
“싫어.”
|Pr.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법사는 마왕님이랑 있기 싫죠ㅠ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법사를 쳐다봤다. 내 시선에 법사가 다급한 얼굴로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
|Pr. 9서클대마법사| : 마왕님이랑 한 번만 더 같이 있다가는 화병 걸려 법사 뒈질 거 같죠ㅠ!!
글자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겨있는 거 같다.
|Pr. 9서클대마법사| : 그래도 남겨두고 간다면 법사는 집으로 돌아가 버릴 거죠!!!!
|Pr. 9서클대마법사| : ୧( ಠ Д ಠ )୨
“…….”
하찮기 그지없는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해 줄까 잠깐 고민했다.
고민할 것도 없지. 그냥 답을 안 보내면 되잖아. 대신 같이 가자고 고개를 끄덕여 주기는 했다.
“우마훈 너는 어떻게 할래?”
“짐도 같이 가겠느니.”
마왕의 말투에 강하수가 입을 살짝 벌린다.
놀랍죠? 근데 저거 익숙해지는 게 편할 거예요. 익숙해지기도 전에 회의장에 데려다줄 거지만.
“갈까요? 강하수 대표님 도착하면 회의 시작할 거라고 했으니까 아직 시작 안 했을 거예요.”
“아이고,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학생. 나 때문에 괜한 수고를 하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요.”
강하수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이고는 내 뒤의 법사와 마왕을 흘긋거리며 속닥거렸다.
“그보다 학생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센터 소속 헌터들은 아닌 거 같은데…….”
“짐은 학생이 아니니라.”
“흐악!”
“악!!”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강하수가 비명을 질렀다. 고막을 때린 비명 소리에 나 역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강하수가 심장 부근을 쥐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노, 놀라라…….”
나는 욱신거리는 귓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쟤는 신경 쓰지 마세요.”
강하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하수 대표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는 사이, 나를 놀리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Pr. 9서클대마법사| : ㅋㅋ길마님ㅋㄱㅋ마왕님의 그윽한 목소리에 놀라셨죸ㅋㅋㅋ?
|Pr. 신살자(길드장)| : 그런 거 아니니까ㄷㅊ
법사 새끼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성큼성큼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헌터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곳이 보였다.
“아, 저기인가 보군요!”
강하수가 활짝 웃음을 짓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모여있는 헌터들 사이에서 도하인을 본 것 같다. 마주쳤다가는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튀셔야 했다. 하지만 강하수가 급하게 나를 붙잡으며 허리를 꾸벅였다.
“아이고. 정말 고마워요, 학생. 여기, 이건 제 명함인데 나중에 회사에 한번 찾아와 줘요. 애들 앨범이든 사인이든 뭐든 줄게요.”
“네? 딱히……. 연예인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도 받아줘요. 학생들도 자, 여기.”
강하수는 법사와 마왕에게도 명함을 쥐여줬다.
법사가 명함을 빤히 바라보더니 왜인지 모르게 뿌듯한 웃음을 보인다.
왜 저런 재수 없는 웃음을 보여주나 했더니 날아온 메시지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9서클대마법사| : 아홉수에 학생 소리를 듣는 법사라죠(૭ ᐕ)૭!!
|신살자(길드장)| : 어쩔;
저 이모티콘은 이제 안 쓰나 했더니!!
마왕님도 받아 든 명함을 빤히 보더니 입을 여셨다.
“짐은 학생이 아니니라.”
또 그 소리냐.
근엄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강하수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학생이 아니라고 했지요?”
“그렇다. 짐은 학생이 아니라 마왕……!”
법사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왕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왕이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마왕?”
강하수의 넋이 나간 얼굴에 나는 과장스레 말을 지어냈다.
“마훈이가 어린이 극단에서 배우를 하는데! 마왕 역할에 엄~청 심취해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멍하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한껏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법사가 마왕의 뒤통수를 눌러 허리를 숙이게 만든다. 나 역시 허리를 꾸벅이고는 빠르게 걸음을 뒤로 돌렸다.
강하수와 헌터들의 모습이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와 법사는 마왕의 입을 놓아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기는!”
마왕의 형님께 빙의한 것처럼 마왕의 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아프도다!!”
“아프라고 때린 거다, 마왕 새끼야!!”
법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와… 마왕님. 마왕님은 자기 입으로 자기가 마왕이라고 말하고 싶어?”
“짐이 마왕인 것은 사실이거늘. 부끄러워할 이유가 있느냐?”
“…….”
법사가 질린 얼굴로 마왕을 쳐다봤다. 그 시선에 마왕님께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됐어. 그냥 마왕님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해.”
내 말에 법사가 한 손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아이덴티티가 너무 독특한 거 같습니다, 길마님.”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다, 법사님아.”
“왜죠?”
“자아 성찰하고 답을 한번 찾아보시죠.”
법사가 심장 부근에 손을 얹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짧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Pr. 9서클대마법사| : (૭ ᐕ)૭?
“아오!!”
이, 시발 새끼!!
“아! 잠깐만!! 잠깐만 타임!!”
네 모근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 법사의 머리칼을 뜯어버릴 듯이 집어 당기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누군가는 보나 마나 마왕님이셨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빼액 소리 질렀다.
“왜!!”
“신살자야, 법사의 머리는 내가 잡아당기고 있을 테니 저것 좀 보거라.”
“그게 무슨 소리야, 마왕님!!”
법사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마왕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헉.
나도 모르게 법사의 머리칼을 놓아버렸고, 내 빈자리를 마왕님께서 메꿔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