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운아, 같이 가!!”
서하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뒤를 따라붙는다. 나는 나보다 한 뼘은 큰 서하를 쳐다보며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여기 근처에 끝내주는 곳 있거든? 오전이랑 오후에는 카페인데 저녁에는 칵테일 바(Bar)야.”
“저녁에 가자고?”
“역시 내 친구.”
내 그럴 줄 알았지.
“거기가 어딘데?”
“여기!”
서하가 활짝 웃으며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Vai tu, Echina]
멋들어진 필기체로 쓰인 간판이었다.
“바이 투? 무슨 말이야?”
“네가 가라, 에키나.”
“……?”
“라는 뜻이라던데?”
서하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가라, 하와이’를 뭘 저렇게 멋들어지게 표현해 놨지?
그보다.
“…에키나?”
“외국 어디 지명이래.”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가 초록 창을 켰다.
<국어사전>
[에키나]: 갑자기 몹시 놀랐을 때 저도 모르게 내는 말.
[에키나 에키나]
[45. 루드베키아와 에키나세아의 차이점은?]
나는 이렇게 쓸모없는 지식을 하나 얻게 되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가게 이름이 너무 익숙해서.”
용사님은 ‘에키나’의 귀환자다. 진리의 눈을 통해 봤으니 왜곡된 정보일 리가 없다. 거기다 장사를 하러 가야 된다고 했었지.
용사님의 가게가 서하가 보여준 가게일 확률은…….
“여기 사장님이 엄청 친절하시거든! 친구 데리고 오면 서비스 많이 준다고 했었어!”
낮을 거 같다.
집까지 태워다 주고 너덜해진 옷도 가져가 준 용사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나는 용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어야 했었다.
놓으라면서 내 목덜미를 잡아당긴 것, 절대 잊지 않을 거다. 대공을 이용해서라도 꼭 복수할 거다.
나는 서하가 보여준 화면을 넘기며 물었다.
“여기 손님 많아? 예약해야 되는 거 아니야?”
“예약까지는 안 해도 돼~!”
서하가 메뉴판을 보여주며 뭐가 맛있는지 가르쳐 줬다.
아직 해가 쨍한 오후였지만 우리는 서로 사이좋게 마실 칵테일과 안주를 골랐다.
그렇게 메뉴를 정하다 보니 동묘 시장에 도착해 있었다.
“인이 옷 뭐 사줄 건데?”
“저번에 사준 거랑 비슷한 걸로 사줄까 하는데? 그래야 삐친 거 풀릴 거 같아.”
“어디서 샀는지는 기억해?”
“그걸 어떻게 기억해.”
여기도 옷, 저기도 옷 그리고 여긴 신발.
“…….”
기가 막힌 물건 배치에 감탄하며 도하인의 사이즈에 맞을 옷들을 찾아봤다.
“운아! 여기 하운 점퍼 있어!”
하운의 로고가 떡하니 박힌 야구 점퍼가 보였다.
도대체 이게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나는 L 사이즈의 점퍼를 들어보며 서하에게 물었다.
“후드 집업 말고 이걸로 할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조용히 점퍼를 내려났다.
|9서클대마법사| : 나는~ 개똥벌레~♬
|9서클대마법사| : 일이~ 너무 많네~♪
뭐야, 얘는 갑자기 왜 이래.
“운이~! 이쪽에 예쁜 거 많아!”
서하의 외침에 걸음을 옮기며 메시지를 보냈다.
|신살자(길드장)| : 퇴사해
|9서클대마법사| : 。•́︿•̀。
|9서클대마법사| : 취업난 심하죠ㅠ
“…….”
법사 새끼의 말은 그냥 무시해야겠다. 하지만 법사 놈은 언제나 그랬듯 호락호락한 새끼가 아니었다.
|9서클대마법사| : 업무의 위대함을 모르는 길마님이 너무 불쌍해!!
|신살자(길드장)| : 아오 저 ㅅㅂ새끼;
|9서클대마법사| : (૭ ᐕ)૭?
대공한테 저 새끼 위치 추적 좀 해달라고 부탁하고픈 심정이었다.
업무의 위대함이고 자시고 의뢰의 위대함은 너무나도 잘 안다.
[성좌, ‘한라산이 내 베개다’로부터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이것 봐봐. 얼마나 위대해.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눈앞에 뜬 메시지를 쳐다봤다.
“운아! 이거 어때? 인이한테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아?”
“도하인 별명이 종놈으로 완벽하게 굳어질 거 같은 옷이네.”
서하는 말없이 옷을 내려났다. 서하가 다시 옷을 고르는 걸 보며 나는 입에 붙은 이름을 찾았다.
|Pr. 신살자(길드장)| : 대공.
|Pr. 대공| : 안 되여
|Pr. 신살자(길드장)| : 이번에는 또 왜 안 되는데
|Pr. 대공| : 할머니 위독하심;
|Pr. 신살자(길드장)| : ㅎ
|Pr. 대공| : ㅎ;;
할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할머니냐, 이 불효자 자식아. 안 된다니 뭐 할 수 없기는 개뿔이다.
|신살자(길드장)| : 사랑하는 길드원 여러분 주목.
전체 메시지를 보내기 무섭게 대공의 애타는 개인 메시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대공의 메시지 따위 무시다.
|9서클대마법사| : 길마님 또 낮술하심?
|신살자(길드장)| : 넌 제발 좀 ㄷㅊ줘
|9서클대마법사| : ᕕ( ᐛ )ᕗ?
“시발.”
진화된 이모티콘에 새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옷을 고르던 서하가 무슨 일이냐고 고개를 든다.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 : 님ㅣ1!!!
|대공| : 스퇍잇1!!!!!!
|9서클대마법사| : ?
결국 대공이 전체 메시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 : 아 진짜ㅠㅠ저 알바 가야 한다고요ㅠㅠㅠㅠ
|신살자(길드장)| : ^^
|대공| : 님아ㅏㅠㅠㅠ알바 진짜 어렵게 구한거데에ㅠ
|신살자(길드장)| : ^^?
어쩌라고.
나는 수업을 듣다가고 과제를 하다가도 시험을 치다가도 뛰쳐나갔었다고!!
의뢰라고는 전혀 뛰지 않는 너희 때문에 말이지. 덕분에 나의 학점은 아름답게 조져졌다.
엉엉 눈물을 보내는 대공에게 나는 어퍼컷을 날리기로 했다.
|신살자(길드장)| : 그대의 이름은 프란체스카♪
[‘북부 대공’ 님께서 의뢰를 받으셨습니다.]
|9서클대마법사| : 어메이징;;
법사 새끼가 ‘프란체스카’가 무슨 마법의 주문이냐고 묻는다. 나는 그 메시지를 무시하며 서하에게 다가갔다.
“이건 어때?”
“내려놔.”
도하인을 진짜 대감 댁 하인으로 만들 생각이야?
* * *
의뢰를 끝낸 대공이 알바에 결국 늦어서 사장님한테 혼났다느니 뭐니 다소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만족스럽게 쇼핑을 마쳤다.
“하준이 오빠한테 늦게 들어간다고 말했지?”
“응. 들어올 때 말하래. 데리러 온다고.”
“앗싸~!”
돈 굳고 시간 굳으니 좋아할 만하다. 나는 하품을 하며 서하의 뒤를 따랐다.
“운이, 어제 잠 못 잤어? 하품을 계속하네.”
하품은 공기가 부족해서 하는 거라고 고쳐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 못 잔 거치고는 얼굴이 아주 환한데?”
“…그래?”
“응. 운이, 너 언제나 병든 닭처럼 쪼고 있었잖아.”
“내가 그랬어?”
서하는 내가 얼마나 병든 닭처럼 굴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 건 ‘성녀’의 칭호 효과 때문일 거다.
“그리고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도중에 튄 적도 많았지!”
“…오늘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죽어라 고생했던 지난날이여 안녕, 이제 대공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자유를 되찾을 거란다. 대공한테만 맡길까. 아마 병상에 누워있을 마왕에게도…….
아니다.
마왕에게 맡기는 건 아닌 거 같다. 그럼 용사한테?
“다 왔어! 여기야!!”
정신을 퍼뜩 깨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Vai tu, Echina]
사진이랑 좀 많이 다른 가게가 보였다. 역시 보정이 최고지. 서하가 곧장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나는 서하의 뒤를 따르며 내부를 구경했다.
내부는 사진이랑 똑같았다.
“잠깐만요, 지나갈게요.”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가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상자를 든 남자가 서있었다.
“…대공?”
“……?”
대공이 뒤늦게 나를 알아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뭐야! 님이 왜 여기 있어요?!”
“내가 할 말인데? 알바한다는 데가 여기였어?”
“네!! 근데 뭐예요? 님이 여기는 왜 왔어요! 나가요, 나가!!”
“뭐래. 내가 왜 나가? 여기 손님으로 온 거거든? 절대 안 나가. 사장님~! 여기 알바가 손님 쫓아내려고 하는데요~?”
“아, 좀!!”
안쪽에 자리 잡은 서하가 왜 안 오냐면서 나를 부른다. 그때 주방 안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대공! 왜 이렇게 소란스럽니! 너 오늘 알바도 늦었으면서 일 제대로 안 할래?!”
쨍하니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사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짧게 친 머리칼에 나는 멍하니 말했다.
“용사?”
용사가 자리에 멈춰 서고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길드장?”
그 목소리를 들은 대공이 당황한 얼굴로 나와 용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두 분이서 뭐라는 거예요?”
나와 용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공을 쳐다봤다. 대공이 흠칫 놀라더니 울먹인다.
“내 인생 왜 이래…….”
내가 할 말이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용사님이시고.”
“너는 북부 대공?”
“북부는 떼고 말해주세요.”
용사와 북부 대공님께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신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동시에 말했다.
“그리고 님은 길마님.”
“그리고 너는 길드장.”
“…….”
알아줘서 아주 눈물 나게 고맙구나, 길드원들아.
“도하운! 안 와?”
“갈게!”
아차, 서하를 잊고 있었다. 나는 대공과 용사에게 검지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주문이나 받으러 와.”
“나가라니까요!!”
“사장님, 알바생이 손님보고 나가라고 하네요. 이거 인별에 올려도 되나요?”
“죽고 싶니?”
어깨를 으쓱여 주고는 서하가 자리 잡은 곳으로 갔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서하가 몸을 내빼며 내게 물었다.
“사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대충.”
“알바생이랑도?”
“응.”
“여기 모른다며?”
나는 멋쩍게 웃음을 보이며 대답을 피했다. 서하가 말한 ‘친절하신 사장님’이 용사님이셨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