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권능, ‘치유’가 활성화됩니다.]
그래, 이 정도는 간단하게 치유했지. ‘성녀’라는 이름이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다.
이를 으득 갈며 다짐했다.
저 시발 새끼, 내가 꼭 소멸시키고 만다.
손에 잡히는 사슬을 있는 힘껏 휘둘렸다. 불꽃에 살갗이 익는 느낌이 들었지만 고통에는 곧 익숙해졌다.
―커헉……!
“어디서 불장난질이야.”
―네 녀석! 어떻게 염화의 불꽃을……!!
“염화? 어쩐지 그쪽 별님들께서 엄청 난리를 부리더라.”
[성소(聖所), <염화 지옥>이 저작권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합니까, 별님들아!!
마신의 어깻죽지를 꿰뚫은 사슬이 그대로 그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내리치는 푸른 전격은 장식 요소로 치자.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아느냐……!!
“내 알 바냐!”
마신 놈이 사슬을 두 손으로 붙잡더니 누가 봐도 나는 이세계의 악의 화신이라는 얼굴로 웃음을 보였다.
소름 끼치는 기분에 어서 저 새끼를 처리하자, 그렇게 권능을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
날카로운 창이 내 몸을 관통했다. 울컥거리며 토해지는 것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하! 이것이 바로 짐이 가진 힘이니라!!
마신을 묶고 있던 사슬이 풀어졌다. 마신은 그대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검게 이는 기운이 보인다.
아오, 시발!!
[칭호, ‘신살자(神殺者)’의 두 번째 족쇄가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칭호, ‘신살자(神殺者)’의 세 번째 족쇄가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마왕 새끼 안 다치게 적당히 하려니 서러워서 안 되겠다.
몸은 곧바로 치유가 됐지만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치유’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검(聖劍), ‘영광의 검’이 주인의 부름을 기다립니다.]
손끝에 잡히는 검의 손잡이가 느껴졌다. 단숨에 이를 뽑아 들려고 할 때.
“미쳤니? 아니면 목숨이 두 개야?”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와 동시에 대검이 광풍을 일으키며 휘둘러졌다.
“그리고 마왕 새끼는 또 왜 저러는 거라니? 돌아도 애가 단단히 돈 거 같은데?”
쿵, 하고 대검을 바닥에 꽂은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뻐금거렸다.
“…용사?”
용사님이 마왕님 잡으러 나타나셨다.
용사님이 여기서 이렇게 등장한다고요?
“레이드 뛰러 왔어……?”
“뭐라는 거니? 마왕 잡으러 온 것뿐이란다.”
레이드 뛰러 온 거 맞네.
용사가 짜증스레 물었다.
“길드장, 너야말로 의뢰도 안 받았으면서 왜 여기 있는 거니? 꼴은 또 왜 그렇고?”
용사의 말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길드장인 거 어떻게 알았어?”
용사님께서 그걸 질문이라고 했냐는 얼굴로 대답해 준다.
“법사 새끼한테 포털 열어달라고 했잖니? 위치가 여기구만.”
아, 그랬지.
목 언저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새끼 하는 짓이 못 미더워서 도우러 왔다가 뒹구는 중.”
“너 참 세상 힘들게 사는구나?”
용사님께서 혀를 차시고는 대검을 다시 든다.
―성녀에 이어 용사의 등장이라!!
우―웅, 울리는 진동에 용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의 옆에 서며 권능의 범위를 확대했다.
용사가 나를 흘긋거리며 싱거운 인사를 건넸다.
“땡큐.”
“천만의 말씀.”
“그런데 쟤는 도대체 뭐니? 마왕 새끼가 아닌 거 같은데?”
“이세계의 마신께서 마왕 몸에 현신했어.”
“허…….”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 용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뒈져주실 별님들께서 왜 그리 지랄들인가 했더니.”
귓가에 들린 욕설에 입을 살짝 벌렸다.
[성좌, ‘사탄보다 더 대단한 지옥의 군주’가 용사의 입담에 감탄합니다!]
별님, 나도 감탄했어.
용사도 같은 메시지를 봤나 보다. 쯧, 혀를 차더니 내게 말했다.
“길드장, 혹시라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말이야.”
“응.”
“메시지 창 뮤트 기능 건의할 수 없니?”
“그걸 누구한테 건의해?”
건의할 수 있으면 진작 건의했겠지. 덧붙인 말에 용사가 그것도 맞는 말이라면서 실없는 웃음을 보였다.
나는 꽤나 무게가 나가 보이는 대검을 간단하게 들고 있는 용사를 보며 물었다.
“그보다 마왕이랑 아는 사이야? 왜 온 거래?”
“칭호 보렴. 내가 저 새끼랑 아는 사이인지 모르는 사이인지.”
곧바로 진리의 눈을 사용해 용사의 칭호를 살펴봤다.
[Main]: 용사(Ex)
[Sub]: 에키나의 귀환자(Ex), 소드 마스터(S), 영웅(S), 절대 방어자(A)
‘데키온’이 아니라 ‘에키나’라면.
“…마왕이랑 모르는 사이잖아?”
“모르는 사이래도 ‘마왕’이잖니.”
멀쩡해 보였는데 얘도 콘셉트충이었던 건가. 마왕이랑 용사랑 아주 쌍으로…….
용사가 질색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렴. ‘용사’ 의 칭호 때문에 온 것뿐이니까. 의무를 이행하라면서 시끄럽게 구니, 원.”
“아하.”
용사님의 적은 대개 마왕님이시니, 그게 여기서 이상하게 적용이 됐나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용사님 얼굴 보려면 마왕님이 날뛰면 되겠네.”
“끔찍한 소리 하지 말렴.”
―짐을 앞에 두고 시시덕거리느냐!!
내리치는 전격을, 나는 피했고 용사는 대검을 휘둘러 막아냈다.
쿠궁―!
움푹 패버린 땅에 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길드장, 그렇게 내빼기니?”
“회피 본능으로 나도 모르게.”
“웃기는 놈일세.”
짧게 말을 마친 용사가 대검을 고쳐 쥐고는 그대로 땅을 박찬다.
그와 동시에 검은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용사는 우습다는 듯 대검을 휘두르며 이를 갈라냈다.
|Pr. 용사| : 뒤에서 지켜만 보고 있을 거니?
날아온 메시지에 웃음이 나왔다.
|Pr. 신살자(길드장)| : 그럴 리가.
손끝에 매만져졌던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칭호, ‘검성(劍城)’의 봉인이 강제적으로 해제됩니다.》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메시지들을 무시하고는 곧장 검을 휘둘렀다.
|Pr. 신살자(길드장)| : 용사님, 머리 숙여.
용사가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황급히 몸을 젖힌다.
푸르게 인 궤적이 마신을 향해 날아갔다.
―이까짓 잔잿……!!
쿵―!
잔해 더미에 파묻힌 마신의 모습이 봐줄 만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용사님께서 멍하니 그 꼴을 구경하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길드장! 너 미쳤니?!”
“나는 머리 숙이라고 미리 말해줬어.”
그것만으로 어디냐며 어깨를 으쓱여 주는 건 덤이었다.
용사가 얼굴을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검을 휘두르며 나는 소리가 경쾌하게도 들린다.
―감히… 짐을……!!
그사이 잔해에 파묻혀 있던 마왕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용사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마왕 새끼 어쩌니? 정신 차리면 꽤 쪽팔려할 거 같은데.”
“절대로 안 그럴걸.”
허공을 딛고서는 용사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보다 마왕님 잡으러 오셨다면서?”
용사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검을 고쳐 잡았다.
“정신머리 잡으라고 온 거거든. 미친 콘셉트충이 돌아버린 콘셉트충이 된 건가 했더니 접신당한 거였다니.”
“접신…….”
어쨌거나 맞는 말이다.
‘정화’로도 막기 힘든 독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몰려오기 시작했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려니 용사가 성가시다는 듯이 대검을 크게 휘둘러 바람을 불러 일으켜 독기를 몰아냈다.
“신살자.”
“……?”
용사의 손에는 어느새 대검 대신 두 자루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칭호, 믿어도 되는 거겠지?”
나는 비웃음과도 같은 웃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해 주었다.
나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용사가 키득거리며 걸음을 뗀다.
마신의 주변으로 이는 날 선 검은 기운이 우리를 향해 들이닥쳤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것들을 향해 내달렸다.
아래서 들리는 폭발음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을 거다.
[성소(聖所), <염화 지옥>이 보이는 광경에 흥미진진해합니다!]
[성소(聖所), <올림푸스>가 이세계의 신과 대적하는 귀환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입니다!]
[성소(聖所), <아스가르드>가 이세계의 신과 대등하게 싸우는 귀환자들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망할 별님들 같으니라고.
[절대 권능, ‘성문(星門)’이 활성화됩니다.]
지고하신 별님들께 우리는 유흥거리고, 흥밋거리고, 관심거리지?
【‘성문(星門)’ 개방】
[파괴된 차원, ‘글로리아(Gloria)’의 ‘중앙 대신전’을 불러옵니다.]
[하늘의 권좌에 앉아있는 별들의 눈이 가려집니다!]
“용사!!”
뒤바뀐 풍경에 당황하여 멈춰 선 용사가 보였다.
나의 외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날아드는 것을 튕겨내며 다리를 움직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숨쉬기 벅찬 기운이 목을 옥죄어 왔다.
―한낱 인간 따위가!!
“신을 죽였거든.”
몸을 틀며 사슬을 움직였다. 길게 늘어진 사슬이 마왕의 모습을 뒤집어쓴 마신의 몸을 옭아맸다.
그와 함께 용사가 마왕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꿰뚫어도 하필 내가 꿰뚫었던 그곳이었다.
―비겁한……!!
발버둥 치는 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하나가 아닌 여럿의 목소리로 겹쳐 들려온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들이었다.
살려달라며 울부짖고, 죽이려 드는 나를 저주하는.
[절대 권능, ‘멸(滅)’이 활성화됩니다.]
지독한 목소리들이었다.
마왕의 머리를 힘주어 잡았다.
칼바람과도 같은 것이 팔을 휘갈키고 지나갔다. 하지만 너덜해진 팔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